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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21> 전현직 편집국장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뤄진 지 40일이 넘었지만 공안당국의 수사는 지지부진하다. 최근에는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마저 부정하며 공안당국이 오히려 수사를 기피(?)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4차례 출두 조사를 받고, 2차례 국정원 앞까지 갔다가 돌아온 안영민 편집주간이 그동안의 수사경과를 정리했다. <편집자말>

 

8월 17일 오전, <민족21> 9월호 마감 때문에 새벽까지 업무에 시달리던 것도 잠시, 아침부터 최종 원고 확인으로 내 휴대폰이 끊어질 짬이 없었다. 그러는 새 부재중 전화가 두 통이나 와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국정원 전화번호였다. 전화를 걸어 "마감 업무 처리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출발한다. 11시 30분쯤 도착 가능하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수사관이 잔뜩 볼멘 목소리로 따진다.

 

"안영민씨 때문에 5명의 수사관이 대기하고 있는데 10시에 오기로 한 사람이 1시간 30분이나 늦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참았다. 지난 7월 6일 압수수색 이후 무려 40여 일 동안 엉망이 된 내 생활과 <민족21> 업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출두 시간에 좀 늦는 걸 따지는 국정원 처사가 황당했다. 하지만 어쩌랴. 부르면 가야 하는 피의자 신분인 것을.

 

헌법으로 보장된 '변호인의 조력 받을 권리'마저 무시하는 국정원

 

심재환 변호사와 11시 30분에 국정원 민원실에서 만나기로 하고 서둘러 국정원을 향했다. 7월 11일, 15일, 19일, 26일에 이은 5번째 조사.

 

실은 8월 2일 소환에 응해 출두했지만 변호사에게 가방 검색을 요구하는 국정원 측에 항의하다 조사를 받지 못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당시 국정원 측은 외부 방문객은 예외 없이 소지품 검사를 해야 한다는 규정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제까지 이 규정을 변호사에게까지 들이댄 적은 없었다.

 

피의자와 동행하는 변호사는 단순한 외부 방문객이 아니다. 피의자가 수사기관과 대등한 지위에서 인권을 보장받으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동행하는 조력자이며, 매우 특별한 사정과 조건에서만 제약을 받는 헌법적 권리의 행사를 통해 피의자에게 지원군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자이다.

 

그런데도 구치소나 법원, 검찰청에서도 요구하지 않는 가방 검색을 국정원에서 강요해온 것이다. 변호사와 나는 이것이 명백한 불법임을 지적하고 돌아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국정원은 조사 불응으로 처리하겠다고 협박하더니(피의자가 조사에 불응할 경우 체포영장을 청구할 근거가 된다), <조선일보>에 정보를 흘려 다음 날 "<민족21>, 천안함 폭침한 정찰총국 지령 받아"라는 제목의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싣도록 했다. 설사 그것이 국정원에서 흘린 정보가 아니라 하더라도 뜬금 없는 <조선일보>의 왜곡보도는 <민족21>에 대한 보복 조치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가방 검색이 문제였다. 나는 미리 변호사에게 당부했다.

 

"<민족21> 입장에서는 수사를 빨리 끝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 국정원 측과 타협하여 실질적으로는 가방 검색을 하지 않으나 형식적으로만 검색대를 통과하는 방법으로 들어가 주셨으면 합니다."

 

의뢰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는지 변호사도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민원실에 도착해 출입증을 교부받는데 뜻밖의 일이 터졌다. 우리가 도착한 직후 국정원 직원 두 사람이 민원실로 들어오더니 우리 쪽을 향해 캠코더를 설치하고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뒤늦게 이를 확인한 심 변호사가 스마트폰으로 우리를 촬영하는 캠코더를 찍었다. 그러자 국정원 직원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언성을 높였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여기는 사진 촬영이 금지된 곳입니다. 당장 촬영한 내용을 지워주십시오."

"아니, 왜 우리를 찍는 겁니까? 이건 명백한 불법 촬영입니다. 내가 지금 사진을 찍은 건 불법행위에 대한 증거 확보를 위한 겁니다."

 

심 변호사도 언성을 높이며 항의했다. 국정원 측은 CCTV가 고장이 나서 급히 설치한 캠코더라고 변명했지만 이에 대한 확인서를 써달라는 심 변호사의 요청을 거부했다. 국정원 측은 아마 오늘도 지난번처럼 검색대 통과 문제가 불거질 것에 대비해 미리 촬영을 해둘 요량이었던 것 같다.

 

변호사의 가방까지 뒤지겠다는 국정원

 

옥신각신 끝에 일단 조사를 받고 나온 뒤 다시 시시비비를 가리기로 하고 출입절차를 밟았다. 내가 먼저 검색대를 통과하고 심 변호사가 검색대를 통과하려는 순간, 민원실 직원이 제지했다.

 

"가방은 놔두고 들어가십시오."

"왜죠? 지금 변호사의 가방을 뒤지겠다는 겁니까?"

 

지난번 때와 달리 검색대 통과를 수용하겠다는 변호사에게 국정원 측은 뜻밖에도 소지품 검사를 요구한 것이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불법행위이자 명백한 변론권 침해다. 국정원이 이미 저지른 같은 짓에 대해서 법원의 판단을 구하기 위하여 준항고라는 절차를 통해 그 불법성을 확인받으려 하는 중이고, 대한변협 등 변호사단체에서도 국정원의 불법행위를 지탄하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국정원의 반성 없는 연이은 불법행위에 부닥친 우리는 결국 오늘도 조사를 받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국정원 측은 검색대 통과와 사진 촬영 금지 등이 대통령령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만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헌법으로 보장된 권리이다. 이를 묵살하고 방해하는 것이 국정원의 수사방식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지난 40여 일 동안 나와 <민족21> 직원들은 국정원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려왔다. 그들이 갖다 붙인 '간첩' 낙인은 '국정원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뭐가 있기는 있는 거 아냐'라는 의구심을 낳더니 어느새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을 통해 기정사실화 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국정원의 일방적인 수사 진행과 정보 흘리기에 맞서 적극 해명하려는 우리들의 노력은 변호사의 조력이라는 헌법이나 형사소송법상의 가장 기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와 <민족21>이 거대한 공안기관에 맞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국정원 측이 <조선일보> 등에 흘린 '225국, 또는 정찰총국의 지령을 받아 활동해왔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지난 4차례의 소환조사에서 단 한 번도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조사에서는 주로 내가 지난 5월과 6월 두 차례 일본을 방문한 경위와 행적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가 진행됐다. 나는 5월의 일본 방문은 <민족21> 창간 10주년 축하 광고비를 수금하기 위해서였고, 6월의 방문은 지난 3월에 출간한 저서 <행복한 통일 이야기> 일본어판 출간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음을 분명히 밝혔다.

 

하루빨리 증거를 제시하고, 차라리 영장을 청구하라 

 

그밖에 2005년 내가 <민족21> 대표이사에 취임한 뒤 1년에 1∼2차례 일본을 방문한 이유 역시 <조선신보>와의 사업 협의와 취재를 위한 것이었고, 이때 국정원에서 북의 공작원이라고 주장하는 조아무개 재일조선인총련합회 국제통일국 부국장과 만난 것 역시 사업 협의와 취재를 위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자 국정원 측은 세 번째, 네 번째 소환조사에서 이른바 '왕재산사건' 관련자와의 관계를 집중 추궁했다. 나는 이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해 해명했다. 국정원 측은 왕재산사건 관련자 중 <민족21> 감사로 활동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을 통해 지령을 받거나 보고를 한 사실이 없는지 집중 추궁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와 관련한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네 번째 소환조사가 끝날 무렵 나는 국정원 측에 "내가 조아무개 부국장이든 아니면 또 누구든 북측 공작원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활동한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했고, 국정원 측은 다음 번 조사에서 증거를 제시하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이제까지 변호사 동행 없이 출두했던 나는 그들이 제시하는 증거에 대한 법적인 조력을 위해 변호사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하지만 변호사와 동행한 날, 그것도 두 차례 모두 국정원 측은 뚜렷한 근거나 이유를 제시하지 않은 채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방해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나는 국정원이 압수수색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하자 "당신이 시인하지 않으면 아버지를 구속할 수도 있다"고 회유와 협박(?)을 하기 위해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극력 방해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왕재산사건 관련자 문건에 이름이 나왔다' '북이나 일본 쪽에서 작성한 모종의 문건이 있다' 등 출처불명의 말에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내가 북의 지령을 받아 그 어떤 행동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와 <민족21>에 대한 수사가 언제 종결될지는 알 수 없다. 연일 계속 뿌려되는 빗줄기처럼 공안당국의 불법수사, 여론재판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지만 도대체 그들이 무슨 근거로 나와 <민족21>을 북의 공작원에 포섭된 간첩 집단으로 몰아가는지 역시 알 수 없다. 과연 이런 식의 수사를 언제까지 용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증거가 확실하다면 지금이라도 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하라고 국정원에 호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두 달 가까이 진행되는 공안 칼바람 앞에 나도 <민족21>도 지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우리는 의연히 맞서 싸울 것이다. 짜맞추기 수사, 불법수사, 여론재판식 수사 앞에 우리가 굴복한다면 그것은 거대한 공안집단에 민주주의와 통일이 굴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태그:#안영민, #정용일, #민족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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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지와 민족21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현재는 (사)평화의길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며 유튜브 채널 명진TV를 총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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