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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3대 영산의 하나인 한라산. 한라산 자락을 의지해 살아가는 제주사람들은 제주의 척박한 환경에서 삶의 질곡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희망과 좌절, 굴곡의 삶 속에서 제주의 공동체 삶과 가족과 개인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살아온 제주사람들은 무엇에 의지해 그 질박한 삶을 꾸려왔을까? 감히 제주문화의 뿌리라 부를만한 무속신앙 그리고 신당은 어떤 의미인가? 독특한 무덤양식으로 산담과 동자석을 세운 까닭은? 유교식 포제와 무속적 당굿은 어떤 관계인가? 해안가 자연마을에는 왜 방사탑들이 세워져 있을까? 

들리는 말로 제주의 기독교 인구는 7%다. 그나마 제주 본토인은 2% 조금 넘는다고 한다. 제주 기독교인의 대다수는 육지에서 내려와 사는 사람들이라 할 만하다. 왜 이렇게 제주의 기독교 교세는 허약할까? 제주에 내려와 살면서 많은 의문이 생긴다.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된 무속신앙 자료 1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된 무속신앙 자료 1
ⓒ 신창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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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국립박물관에서 과거 신당에 그려 붙였던 그림 석점을 보았다. 제주 전래의 무속신앙에서 표현된 그림일 듯하다. 제주에서 민간신앙은 크게 유교적 신앙과 무속 신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유교적 신앙은 포제, 기우제 등 마을제이고 무속신앙은 본향당을 비롯한 당 신앙이다. 미신 타파 정책의 시행으로 포제단과 신당이 파괴되거나 신앙 의례가 소멸되기도 했다.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된 무속신앙 자료2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된 무속신앙 자료2
ⓒ 신창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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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 타파 정책은 조선시대는 물론 일제시대, 4.3사건, 새마을 운동 및 기독교도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단과 당이 존재하고 신앙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신당의 수는 현재에도 300곳을 상회한다. 마을에 따라서 신당이 전혀 없기도 하고, 더러는 신당이 존재하지만 폐당 지경에 이른 곳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마을에서는 여전히 신당을 중심으로 신앙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일상생활에서 민간신앙 요소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생활 속에 민간신앙 요소가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생활 속에 깊이 융해되어 있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을마다 신당... 일상생활에 자리잡은 민간신앙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된 무속신앙 자료3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된 무속신앙 자료3
ⓒ 신창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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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민간신앙은 제주의 역사와 문화 속에 살아있는 제주문화의 중요한 뿌리다. 신당은 제주인이 고단하고 척박한 삶 속에서 정신의 의지처로 삼았던 신들이 좌정한 곳, 가족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정성이 서린 곳, 그곳으로부터 삶의 질곡을 극복하고 지혜와 운명공동체로서의 마을의식을 길러왔던 곳이다.

민간신앙이 행해지는 곳을 찾아 제주인의 삶과 문화를 찾아보면, 그 오랜 역사적 시간을 관통하며 전승되어온 정신의 의미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의미가 가진 퍼즐을 풀어야 제주는 진정 축복받은 땅으로 거듭날 것이다. 제주에 많은 관광객들이 오고, 많은 기업들이 사옥이전을 검토하고, 국제도시가 만들어지고 있어도 제주인의 정서 속에 흐르는 그 무엇, 이 땅 제주가 가진 그 무엇을 찾아내고 활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제주 땅과 또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결코 어울리지 못할 것이다. 제주인들이 걸핏하면 타지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 있다. '육지것들...'   

탐라순력도 중 한 장면으로 300여년전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주의 신당을 혁파하는 사실을 기록한 그림
▲ 건포배은 탐라순력도 중 한 장면으로 300여년전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주의 신당을 혁파하는 사실을 기록한 그림
ⓒ 제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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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탐라순력도에 나온 '건포배은'으로, 1702년(숙종28) 12월 20일, 향품문무(지역 관리들) 300여 명이 관덕정 앞과 건입포에서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은혜에 감사하는 절을 하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배례장면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유난히 서늘해 보이는 한라산과 성 밖 각 마을에 있는 신당들이 불타고 있는 장면이다. '건포배은'과 신당 파괴 두 사건을 한 도면에 표현한 것이다.

그림 아래에는 불에 타 없어진 신당이 129곳, 훼손된 사찰이 5곳이며, 285명의 무격(남녀무당)을 농업으로 돌려놓았다고 적고 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과 <탐라계록초>에 이 두 사건의 내용과 전후가 밝혀져 있다. 건포배은은 이형상 목사가 조정에 장계를 올려 허락을 받음으로써 그동안의 민폐가 상당히 줄어든 것에 대해 국은(國恩)을 입었다 하여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린 것이다.

<남환박물>에 의하면 건포배은 이후 향품문무 등은 이형상 목사를 찾아가 인사를 올리며, 국은에 감격한 백성들은 그 은혜와 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섬의 어리석은 몇 가지 풍속을 스스로 금하겠다고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음사(淫祀:부정한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였던 것이다.

결국 신당파괴는 이형상 목사와 향품문무들과의 만남이 있은 다음 날의 사건이었다. 두 사건을 한 도면 안에 표현한 것은, 당시 제주도민들의 정서는 정반대였겠지만 이형상 목사는 신당 혁파 자체를 큰 업적으로 여겼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당시 불태워진 신당은 다음 이희태 목사 때 많이 재건된다. 제주도민들의 정서에 반했기 때문이다.

이 정서는 2011년 현재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


태그:#제주무속신앙, #탐라순력도, #건포배은, #국립제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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