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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세종대왕
세종세종대왕 ⓒ 이정근

칠흑 같은 밤. 별빛마저 졸고 있는 야삼경. 사위(四圍)는 적막에 쌓여있고 풀벌레 소리만 애처럽다. 바람이 분다. 흩날리던 낙엽이 얼굴에 떨어졌다.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분명 선왕의 성음인데 이승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인지 저승에서 들리는 목소리인지 아련했다.

"세손을 잘 보필해 주시오."

임금 세종의 목소리였다. 병약한 아들과 나이어린 손자를 남기고 떠나면서 당부한 고명이다. 정신이 몽롱하다. 뇌성벽력이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꺼풀이 무겁다. 피비린내가 콧속을 파고든다.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고개를 돌렸다. 몇 사람인지 모를 장정들이 널브러저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아들 승규 같았다. 흔들어 보았다. 미동이 없다. 

"게 아무도 없느냐?"
가까스로 일어난 김종서가 고함을 질렀다. 허나, 목소리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입안에서 맴돌았다. 어디서 보았는지 원구가 달려왔다.

"대감마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가노 원구가 김종서를 부축했다. 원구의 품에 안긴 김종서가 겨우 입을 열었다.

굳게 잠긴 성문, 노 재상을 외면했다

"빨리 달려가 돈의문을 지키는 자에게 고하라. 내가 역도(逆徒)의 습격을 받아 죽게 되었으니 의정부에 고하고 내의(內醫)로 하여금 약을 가지고와 나를 구료하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리고 말이다."
김종서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안평대군댁에도 꼭 전하라고 일러라. 수양대군의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었으나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내금위를 보내면 그 자를 잡을 수 있다고."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기백은 찾을 길이 없다. 두만강을 건너와 백성들을 괴롭히던 야인들을 떨게했던 장군의 위엄은 간 곳이 없었다. 김종서의 명을 받은 원구가 돈의문에 이르렀으나 굳게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돌아온 원구로부터 보고를 받은 김종서는 망연자실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 않을 수 없다. 상처 난 머리를 싸매라 명한 김종서는 치마저고리를 찾으라 일렀다. 여자 옷으로 갈 입은 김종서가 교자에 올랐다. 교군들의 발바닥에 불이 붙었다. 교자가 돈의문에 당도했다.

"좌상 대감이시다. 어서 문을 열어라."
숙위하는 군사들이 문루에서 내려다보았다.

"좌의정은 뒈졌다는데 웬 좌상이냐? 귀신이라도 된단 말이냐?"

숭례문 한양성곽의 남문이다
숭례문한양성곽의 남문이다 ⓒ 이정근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메아리쳤다. 발길을 돌렸다. 어둠에 교꾼들이 넘어지고 자빠지며 소덕문(서소문)에 도착했다. 역시 열어주지 않았다. 숭례문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문은 꿈쩍하지 않았다.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던 한양 성문이 이렇게 높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파루가 되면 도성에 진입할 요량으로 남묘 주변에 있는 아들 승규의 처갓집으로 찾아들었다.

"이 야심한 밤에 어찌된 일입니까?"
피투성이 머리에 여장을 한 김종서를 발견한 유참판이 기겁을 했다. 얼마 전 공조참판에서 물러난 유참판은 김종서와 사돈의 연을 맺은 사이였다.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이르다 말씀입니까?"
유참판은 김종서의 손을 잡고 말을 잃었다. 이 때였다. 사내아이 둘이 김종서 앞에 엎드려 통곡했다. 사세가 여의치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감지한 승규가 그의 아들을 외갓집에 피신시켰던 것이다.

"조동아, 수동아, 이 할애비의 말을 똑똑히 들어라. 할애비가 죽거든 너희들이 원수를 갚아주라."
아이들의 아비 승규가 죽었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김종서의 가슴은 미어졌다.

"명심하겠습니다."
할아버지의 손을 잡은 조동이와 수동이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 때였다. 원구가 김종서에게 귀엣말을 속삭였다.

"여기 있으면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습니다."
"그럼 어디가 좋겠느냐?"
"큰 서방님이 가끔 들리는 마님댁이 청파역에 있습니다. 거기가 안전할 듯 싶습니다."
얼핏 들은 것 같다. 사내아이가 하나 있다는 것도.

"좋다. 그리로 가자."
김종서의 교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아이들도 다른 곳으로 피신시켜 주시오."
김종서가 유참판의 손을 꼬옥 잡았다. 뜨거움이 전해졌다.

"알겠습니다. 염려마십시오."
김종서가 잡았던 손을 놓자 교군들이 잰걸음을 놓았다. 교자가 골목 어귀를 빠져나갈 때까지 움직이지 않던 유참판이 눈물을 훔쳤다. 이윽고 교자가 김승규의 소실이 살고 있는 집에 도착했다. 여장한 김종서를 안방으로 안내한 여인이 절을 올렸다. 뒤태가 곱다. 승규가 감추어둘 만한 여인이었다.

"일찍 인사 올리지 못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김종서가 싸맨 상처 사이로 넌지시 내려다보았다. 수려하다. 지애비를 닮아서 여자 보는 눈만큼은 세련 됐다고 칭찬해주고 싶지만 승규는 옆에 없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승규가 죽었다고 승규의 여자에게 전해주지 못하는 김종서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할아버지에게 인사 올려라."
사내아이가 공손히 절을 했다.

"너희 아버지 함자가 어떻게 되느냐?"
"김자 승자 규자라 하옵니다."
사내아이가 또렸하게 답했다. 김승규. 자신의 아들이지만 이 아이의 애비다. 네 애비가 적도들의 흉기에 죽었다고 말해주지 못하는 김종서의 가슴이 타들어 갔다.

"너의 할아버지라는 누구라고 가르쳐 주더냐?"
"대호 장군님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대호(大虎)가 무슨 뜻인 줄 아느냐?"
"육진을 개척했던 큰 호랑이 장군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네 할애비다."

김종서가 아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이가 뒤로 물러나며 안겼다. 그리고 얼굴을 쳐다보았다. 믿어지지 않았다. 치마저고리에 피투성이 머리를 감싸고 있는 이 노인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평소에 아버지가 전해주던 할아버지는 갑옷에 투구를 쓰고 긴 칼을 차고 있던 장군이었다.

실낱같은 혈육, 너는 살아 남아야 한다

"아가, 애비의 옷을 찾아오너라."

승규가 없는데 승규의 옷을 찾아오란다. 어디에 쓰려는 용도인지 궁금했지만 어느 안전인가? 정실도 아니고 후처도 아닌 소실은 내치면 남이다. 승규가 이곳에 오면 내주려고 곱게 손질해놓은 옷을 내왔다. 입고 있던 치마저고를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김종서가 승규 소실에게 나직이 말했다.

"이 옷을 저 아이에게 입혀라."
"아니, 이 치마저고리를 사내아이에게 말씀입니까?"
"그렇다."
누구 앞이라고 더 이상 토를 달 수 있겠는가. 사내아이를 건너방으로 데리고 간 여인이 치마저고리를 입혀 아이와 함께 돌아왔다.

"네 이름이 뭐냐?"
"명동이라 하옵니다."
사내아이가 또렸또렸하게 답했다.

"누가 지어준 이름이냐?"
"아버님께서 지어주셨습니다."

"할애비가 새 이름을 지어줄테니 앞으로는 극동이라는 이름을 써라."
"싫사옵니다. 아버님께서 밝고 건강하게 자라 태양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지어준 이름인데..."
뽀로통한 사내아이가 말끝을 흐렸다.

"명동이란 이름도 좋다만 넌 앞으로 수양을 극해야 한다."
"수양이 뭡니까?"
"나라를 도적질한 천하의 도둑이니라."
"네?"
사내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네가 어디 아이라 했지?"
김종서가 승규 소실을 쳐다보았다.

"속리산 아래 두메산골입니다."
"그럼 더욱 좋구나. 저 아이를 동이 트기 전에 그리로 보내라."
김종서가 승규 소실 손에 뭔가를 쥐어 주었다.

"시간이 없다. 냉큼 떠나라."

극동이가 떠난 얼마 후,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 이흥상이 양정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들이닥쳤다.

"죄인은 오라를 받아라."
모든 것을 체념한 김종서가 천천히 나왔다.

"내가 왜 죄인이단 말이더냐? 초헌(軺軒)을 가져오라."

기백은 아직 죽지 않았다. 일국의 재상인데 어떻게 걸어가겠느냐는 것이다. 초헌은 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던 수레다. 꽤 긴 자루에 의자가 달려있고 지면으로는 외바퀴가 달려있는 고급 이동 수단이다.

"이 늙은이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 하는군."

고함과 함께 양정의 칼끝이 번쩍였다. 순간, 고목이 쓰러지듯 김종서가 무너져 내렸다. 핏빛 김종서의 옷자락에 낙엽이 흩날렸다. 그 낙엽사이로 김종서의 시구도 날리는 것만 같았다.

삭풍은 나모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 소래에 거칠 것이 없애라


#수양대군#김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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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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