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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 판 박영감 "9천 원 이상 받아 본 적이 없는데"

16일 남평장에서 중간 상인들은 농민들이 들고 간 고추를 1근(600g) 당 1만 3천원에 사들였다고 한다. 전년도에 태양초 상품이 7~8천원 했으니 거의 두 배가 오른 금액이다. 동네 박영감 내외는 100근(60kg) 팔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고추를 9천 원 이상 받아 본 적이 없는데 뜻밖이라며 희색이 만면했다.

70대 중반의 박영감 내외는 부지런하다. 자식들은 도시로 가고 내외만 농사를 하는데 아직도 쉴 줄을 모른다. 지난해에는 여름 상추만으로 5백 만 원을 벌었다는 사실을 나에게 감추지 않았으며, 최근에는 여름 배추로 5백 만 원 정도 손에 쥐었다고 했다. 그런데 다시 고추로 목돈을 쥐었으니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요즘 시골 장에 나오는 태양초는 일단 건조기에 거의 건조시킨 후 이틀 정도 볕에 형식적으로 말린 것을 말한다. 그런데 박영감 댁에는 건조기도 없다. 순전히 비닐하우스와 마당에 널어 말린 완전한 태양초로 알고 있기에 수고한 대가를 받은 것 같아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고추농사. 쉽지 않은 농사가 있으랴만 고추농사처럼 품이 많이 드는 농사도 드물 것이다.
우리는 고추 모종을 사서 심기에 한 단계는 생략하고 있지만, 3월초 하우스 안에 밭을 만들어 고추 씨앗을 뿌리는 일부터 고추를 수확하여 말려 우리 밥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면 참 험난하다. 고추 모종을 심는 일, 고추를 따는 일도 그렇지만 말리는 과정에서 사람의 손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요즘 건조기가 나왔다고 하지만 정부 지원이 있다고 해도 소규모 농가에서 1년에 한 두 번 사용하는데 보통 3, 4백만 원 하는 건조기를 갖추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4인 가족이 1년에 소비하는 고추는 약 20근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매년 20근을 목표로 했지만 자급의 꿈을 이루기는 쉽지 않았다. 원인은 병충해 때문이었다. 텃밭 농사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살충제라는 농약을 써보기도 했으나 노린재를 잡는 일은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조금 익을만하면 달려드는 탄저병은 도무지 막을 길이 없었다. 곰팡이에 허옇게 상하는 붉은 고추를 보며 서운했던 마음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아니고는 모를 것이다.

그래서 지난해 200주 심었으나 금년에는 100주로 줄이고 목표를 순수한 태양초 10근으로 내려 잡았다. 그러면서 풋고추로 따는 양을 줄였다. 당연히 이웃들에게 생색을 내는 일도 접었다. 그런 결과 그런대로 수확한 양은 목표치에 이르렀는데 금년 여름 날씨는 고추 말리는데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사흘쯤 그늘에서 말리는 일은 그런대로 지장이 없었으나 햇볕 구경을 하기 어렵고, 해가 보이다가도 금방 쏟아지는 날씨를 예측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농민은 팔 것이 없어 가슴 치고, 도시 서민은 기절할 지경

거실 한쪽에 널어둔 고추
▲ 고추 말리기 거실 한쪽에 널어둔 고추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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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지원의 하우스 안에 건조 장소가 좁은 탓에 광주 집에 들고 와서 말리기도 했으나 널어 둘 곳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거실 바람이 잘 통하는 바깥쪽에 널어놓고 하늘의 눈치를 살폈지만 도움이 되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아내는 여러 번 옥상까지 줄달음을 치기도 했으니…! 비닐하우스는 물론 도시 집안에도 고추의 매운 내가 가실 날이 없었지만 이제 겨우 목표치의 3분의 1에 이르렀을 뿐이다.

고추 말리기는 볕이 좋아도 일주일 넘게 걸리는 일이다. 건조기가 있다면 시간은 단축되겠지만 그래도 사람 손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다. 그런 노고를 생각하면 고추가격이 어느 정도 오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해에 비해 너무 뛴 것 같아 절반 이상 사먹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도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오늘(21일)은 남평 장날이다. 점심을 먹고 고추가격이나 살피자고 들렸더니 오늘은 고추가 거래가 거의 없었다는 소문이었다. 농민들이 더 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인지 정말 내다 팔 것이 없어 그러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조짐이 영 좋지 않았다.

더구나 고흥 사는 지인이 전해준 소식에 의하면 그곳의 고추는 태풍으로 쓰러졌다고 한다.
지금까지 부족한 양을 구입했던 영암 지역도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한다. 아내는 지난봄의 소금과 마늘의 급작스러운 가격상승을 들먹이며 아무래도 지금 비싸더라도 예상 부족량을 사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데 말릴 자신이 없다. 과연 지금 사야 하는 것인지 조금 기다려야하는지도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가격이 올라도 대다수 농민들은 팔 것이 없어 가슴을 치고, 도시 서민들은 기절할 지경이니 이런 현상을 경제학에서는 어떻게 설명하는지 궁금하다.

오후에 모처럼 볕이 좋아 텃밭에 무와 알타리무, 쪽파 등을 심었다. 김장 준비를 한 셈이다. 배추는 며칠 후에 모종을 사서 심을 작정이다. 그러나 무나 배추가 잘 된다고 해도 고추 없는 김치를 생각하면 걱정이 크다. 백지나 물김치로 겨울을 나는 것이 아닌지…?

공장에 놀고 있는 기계가 많다면 기업가는 노동자들을 더 뽑아서 기계를 놀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답이다. 노는 농토는 늘고 있다면 정부는 쟁기질하는 농민을 육성했어야 옳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 정부는 돌아오는 농촌을 말하면서 기술 감독이나 넥타이 맨 관리직원을 늘리겠다는 농업정책을 자랑하고 있다. 이제 날씨 탓만 하지 말고 그런 농업 정책의 결과가 농산물의 가격상승으로 이어진 것이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모처럼 해를 보면서도 마음이 뒤숭숭했던 휴일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 필통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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