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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말기 암 환자였다. 아빠는 엄마가 7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도 우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엄마 스스로도 얼굴에 황달이 오고 복수가 차오르는데도 "약 먹으면 다 낫는대. 엄마가 설마 죽겠니?"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이었다. 기말고사를 마친 나는 여동생과 번갈아가며 병원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날 새벽 담당의사가 간이침대에서 자고 있는 나를 깨워서 "1주일밖에 안 남았다"고 했다. '독한 년, 사람 죽는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까지도 엄마가 1주일 뒤에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혼수상태였다. 무지막지한 양의 '마약'들이 투여됐다. 복수가 차오르던 한 달 전부터 그날까지 엄마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섭취한 것이라고는 다량의 마약과 영양제 정도였다. 의사는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했다. 나와 동생은 한 시간 반 동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늙은 할머니 혼자 집 앞 계단에 앉아 "느그 애미 언제 오냐"고 묻는, 그 황량하고 썰렁한 집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내가 맞이해야 할 죽음이 실감났다. 짜장면하고 탕수육하고 짬뽕을 주문했다. 지금 먹지 않으면 언제 다시 밥을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문한 식사를 기다리며 밀린 세탁기를 돌리고 고모에게 전화를 해 할머니를 모셔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집 안 창문은 다 잠그고 콘센트도 다 뽑아놨다. 빈집 티가 역력하게 났다. 그 어둡고 쓸쓸한 집에서 나와 동생은 정신없이 짜장면과 탕수육과 짬뽕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병원으로 돌아갔다.

집에서 만든 김밥
 집에서 만든 김밥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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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이는 밥을 정말 예쁘게 먹네"

결국 엄마는 죽었다. 경기도 광명 철산동에 있는 성애병원에 빈소를 차렸다. 엄마가 옛날에 살던 동네이기도 하고 몇 번의 수술을 받았던 곳이기도 하고, 우리가 나고 자란 동네이기도 했다. 상계동 큰고모가 김밥을 잔뜩 사와서는 빈소 앞에 앉아 있는 나와 여동생에게 건네줬다. 동생은 안 먹겠다며 우는데 나는 그 순간 왜 그렇게 배가 고프던지.

호일을 벗겨 고모가 입안에 넣어주는 김밥을 받아먹다가 나는 엄마 김밥 생각이 났다. 엄마는 내가 소풍 가는 날이면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을 잔뜩 싸주곤 했다. 다들 김밥천국에서 김밥 두어 줄 사오고 마는데 엄마는 냉동실에 보리차하고 콜라를 얼려두고 예쁘게 싼 김밥을 찬합 가득 싸줬다. "혼자 먹지 말고 도시락 못 싸온 애들 있으면 나눠주라"고.

엄마가 살아 있다면 지금의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배고픈 아이가 있으면 먹여야 한다는 것이 엄마의 지론이었다. 여동생이 중학교에 다닐 때 집이 가난해 도시락을 못 싸오는 애가 동생이랑 같은 반에 있었는데, 엄마는 아침이면 도시락을 두 개씩 쌌다. 하나는 내 동생 것이고 하나는 도시락을 못 싸오는 그 애 것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나는 급식을 했지만 동생이 다니던 중학교는 아직 급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동생은 책가방에 교과서도 안 넣고 다니는 앤데 도시락을 두 개나 갖고 가야했으니 짜증이 오죽했을까. 그럴 때마다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도시락 못 싸오는 애라고 무시하지 말고 기분 나쁘지 않게 건네 줘."
"엄마. 걔가 뭐 도시락 받으면 고마워하는 줄 알아? 당연한 줄 알고 받아먹는다니까? 엄마가 걔 밥해주는 사람이야?"
"그게 뭐가 어때서? 맛있게 잘 먹으면 됐지."

내가 제도권 교육을 받기 시작한 8살부터 엄마가 죽기 전까지 내내 엄마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고 다녔다. 아침 안 먹겠다고 '뻐팅기는' 날이면 엄마가 화를 냈다. "아침을 먹어야 살도 안 찌고 머리도 잘 돌아가"라고 했는데, 엄마 아침밥 덕분에 나는 소아비만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 같다. 장담하건대 엄마는 단 하루도 우리의 아침을 거른 적이 없었다. 입원하는 날까지 밥솥에 밥을 잔뜩 해놓고 갔으니까.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는 내가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으면 엄마가 내 앞에 마주 앉아 "아름이는 밥을 정말 예쁘게 먹네"라며 밥 먹는 내 볼을 쓰다듬어줬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아 일부러 엄마 보는 앞에서는 밥을 많이 먹었다. 내가 아침밥을 먹는 시간이 길어지자 같이 등교하는 친구들이 짜증을 냈다. 내가 아침밥을 너무 오래, 많이 먹어서 늘 지각을 했기 때문이다. "야 전아름, 제발 아침 좀 안 먹으면 안 되냐?"라고도 할 정도였다.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촛불집회'에 참가한 대학생들이 '주먹밥 부대'가 만들어 준 주먹밥을 나눠먹고 있다.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촛불집회'에 참가한 대학생들이 '주먹밥 부대'가 만들어 준 주먹밥을 나눠먹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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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밥맛 따라하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엄마가 죽고 나는 살림을 시작했다. 엄마가 했던 것처럼은 할 수 없겠지만 흉내를 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냉장고에서 사망 직전인 대파 한 단은 씻어서 다듬어 냉동실에 넣어놓고 역시 싹이 나기 일보 직전인 마늘도 죄다 빻아서 냉동실에 넣어놨다. 찬거리 없으면 시장 나가서 사오기도 하고 어지간한 찌개나 나물, 밑반찬 류는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게 됐다. 아빠 생일에는 소고기를 넣고 미역국을 끓였는데 새벽에 아빠가 먹으면서 "엄마가 한 맛이랑 똑같네"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밥을 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엄마가 해준 그 밥 맛이 안 나는 것이다. 가족들 모두 '밥맛'이 이상하다고 퉁박을 놓았다. 기껏 차려준 밥상 앞에서 밥투정 부린다고 짜증을 냈지만 내가 먹어보기에도 이 맛은 그 맛이 아니었다. 어떤 날엔 반 이상 타기도 하고, 어떤 날엔 이상하게 밥이 설익고, 어떤 날엔 아예 죽처럼 퍼져버린 적도 많았다. 그런 밥들은 전부 개수구에 버렸다. 밥맛은 얼추 내 여동생이 엄마랑 비슷하게 흉내를 냈다. 그래서 아빠나 할머니는 나보다는 동생이 밥물을 맞추는 것을 선호했다.

나와 내 동생은 귀가가 조금 늦은 편이다. 그래도 집에 들어오자마자 꼭 하는 일이 있다. 밥솥을 열어 내일 아침 가족들이 먹을 밥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동생하고 아주 심하게 싸운 적이 있었다. 새벽 2시에 내가 동생에게 "아침에 먹을 밥이 없으니 밥 좀 해"라고 했더니 동생이 갑자기 "내가 밥하는 사람이냐?"며 득달같이 달려드는 것이다. '가족들이 내가 한 밥은 맛없어 하니 네가 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이었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해서 우리는 새벽 네 시까지 싸웠고 그 싸움에 지친 나는 첫차를 타고 학교에 갔다.

밥 때문에 싸운 일이 또 있었다. 할머니도 돌봐드리고 집안일도 해주시는 아주머니와의 갈등이었다. 어느 날 아침 유난히 일찍 일어났는데 밥이 없길래 압력밥솥에 밥을 안치고 있었다. 1년 사이 나름 밥하는 노하우가 늘어 요즘은 곧잘 한다는 소리를 듣고 있던 터였다. 아빠는 진밥을 좋아하니 쌀을 불려서 물을 조금 많이 넣고 은근한 불에 오래 놓는 방법으로 밥을 하고 있었는데 아주머니가 오더니 갑자기 가스레인지 불을 꺼버리는 것이다.

"아줌마. 불 더 켜놓으셔야 돼요."
"너무 오래하면 안 돼."
"솥에 물이 많이 들어가서 더 켜놔야 돼요. 밥솥 올려놓은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러니까 네가 하는 밥이 죽밥이지."
"아줌마, 저 죽밥 한 적 없는데요?"

짜증이 난 내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자 아주머니는 아무 말 않고 들어가 가스레인지 불을 올렸다. 그리고 아주머니랑 나의 사이는 어색해졌다.

모녀의 애절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 <애자>의 한 장면
 모녀의 애절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 <애자>의 한 장면
ⓒ 시리우스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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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엄마, 나 앞으로 잘 먹고 잘 살게

대치동 사는 작은고모가 간간이 집에 와 아빠가 좋아하는 고등어조림도 하고 나물도 무치고 국도 끓인다. 사실 친척들이랑 별로 친한 편이 아니기 때문에 고모들이 집에 오면 괜히 불편해 늘 "친구 만나기로 했어"라는 똑같은 레파토리의 변명을 대고 집을 빠져나온다. 대충 옷을 꿰어 입고 여느날처럼 문을 나서던 나를 작은 고모가 불렀다. 언제였더라.

"아름아. 밥 먹고 가. 점심 안 먹었잖아."
"친구 만나서 먹을 거야."
"먹고 가. 고모가 너 주려고 빨리 밥했어. 요새 왜 이렇게 살이 빠졌니?"
"아니야…."
"아니야. 빠졌어. 그러니까 조금만 더 빼."

할머니가 소파에 누워 드렁드렁 코를 고는 적막한 집 안에, 찌개 끓는 소리와 고모가 도마 위에서 칼질 하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고모는 칼질을 하다 간간이 훌쩍거렸다. 국산 양파가 아니었던 모양인지 매운내가 내 코를 스쳤다. 고모는 필시 양파가 매워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혼자 그 뜨끈한 밥을 떠먹던 나도 양파 냄새에 괜히 눈물 콧물이 나서 고모가 볶아놓은 소고기가 무슨 맛인지 잘 가늠되지 않았다.

사실 그때는 '먹는다'는 행위가 괴로웠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나의 욕구들이 정말 죄스러웠다. 평생 고생만 하다 간 사람이, 한 달 내내 아파서 아무것도 못 먹고 간 사람도 있는데 살아있는 내가 배가 고파서 뭐든지 맛있게 먹는 다는 사실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그 때 살이 빠졌다. 그때 내가 유일하게 맘 놓고 먹을 수 있던 것은 술이었고 술을 많이 먹고 주사를 부리고 집에 들어가지 않는 날이 다반사였다.

다시 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지난겨울 내가 갑상선 항진증 진단을 받고 나서다. 그 비슷한 시기에 같은 병으로 최고은 작가가 사망했다. 이 병은 아무리 먹어도 살이 쪽쪽 빠지고 아무리 먹어도 허기지는 증상을 동반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시기에 나는 거식증도 같이 겹쳐서 잔뜩 폭식하고 나면 바로 토하는 일들이 반복됐다.

늘 속이 쓰렸고, 배가 고팠고, 배가 아팠다. 이렇게 살다간 진짜 배고파 죽거나, 배불러 죽거나 어떤 식으로든 죽을 것 같아서 겁이 났다. 요즘은 그래서 불규칙한 식습관을 정상으로 되돌리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어느 날 엄마가 꿈에 나와서 일찍 다니고 밥 잘 챙겨먹고 다니고 술 끊으라고 했는데…. 엄마, 다른 건 다 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술은 못 끊겠다. 어떡하지?


태그:#엄마,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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