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뒷동산을 뛰어놀던 그 몸짓들이 돌이켜보니 하나하나 육상 아닌 게 없었다"고 되짚는 이가 있다. 스스로 촌놈이라고 여기며 들판을 들개처럼 쏘다니며 자란 원시인이라고 주저 없이 내뱉는 이... 그가 스포츠+음식+여행 전문기자 김화성이다. 그는 스스로 "맨날 술만 퍼 마신다"라며 "사각형을 싫어한다. 폐쇄공포증이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비 오는 날 흠뻑 젖은 채 맨발로 걷는 이. 영락없이 노숙자로 보이는 이. 그는 "신문기자이면서도 TV도 없다. 해고감이다. 그래도 용케 살아남았다. 자가용은 튼튼한 두 발"이라며 "아이들은 그런 아빠를 '옛날 옛적' 일찌감치 포기했다"는 말을 너무나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마치 남 이야기하듯이 그렇게 말이다.
그가 이번에 "자유와 해방의 스포츠가 육상"이라며 땀과 열정이 담긴 육상 역사를 숭어처럼 거슬러 올랐다가 어느 순간 낭떠러지 거센 물살처럼 육상 현장으로 되돌아오는 책을 펴냈다. <자유와 황홀 육상>이 그 책. 이 책은 원시 사냥부터 현대 육상 영웅들 레이스에 이르기까지 육상 그 속내를 자판이란 수술 칼로 속속들이 파헤친다.
이 책은 특히 2011년 8월 27일부터 9월 4일까지 9일 동안 대구에서 열리는 IAAF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코앞에 두고 나와서 육상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이들 마음을 반짝반짝 닦아준다. 이번 대회는 참가규모 212개국에 6000여 명에 이르는 선수와 임원, 기자단들이 참가한다. 선수들은 47개 종목에 남자 24종목, 여자 23종목이다.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는 1896년 첫 발을 내디딘 뒤 올해로 115년 만에 열리는 육상인들 축제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육상대회가, 그것도 13번째로 우리나라에서 열린다고 하니 "한국 육상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나타나는 '육상 왕초 기자'"인 그가 가만있을 리 없지 않겠는가.
'인간은 왜 달리고 뛰고 던지는가?'
"인간의 등 뒤에는 모두 끈이 달려 있다. 아무리 뛰쳐나가려 해도, 어느 한순간 그 끈이 잡아당긴다. 개의 목에 달린 끈은 눈에 보이지만, 인간의 끈은 보이지 않는다. 그 끈은 쇠줄보다도 더 강하고 질기다... 육상은 끈을 한순간 베어내는 단칼이다... 달려보면 안다. 던져보면 느낀다. 높이 뛰어보면 깨닫는다. '아, 내가 살아 있구나!' 소리치게 된다."
- 프롤로그 '나는 달린다, 고로 나는 살아 있다' 몇 토막 <동아일보> 스포츠 전문기자이자 음식+여행 전문기자로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김화성(55) 기자. 그가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앞두고 펴낸 <자유와 황홀 육상>(알렙)은 덧글에 붙은 글 그대로 '김화성 기자의 종횡무진 육상 인문학'이다. 이 책은 지구촌 곳곳을 주름잡고 있는 육상, 그 머리끝부터 발끝, 속마음까지 낱낱이 훑고 있다.
이 책은 제1부 '인간은 왜 달리고 뛰고 던지는가', 제2부 '한국 육상 만상', 제3부 '종목을 즐기기 위해 알아두면 좋은 육상 잡학 소사전' 등 모두 3부로 나뉘어져 있다. 별책부록으로 '육상경기 종목별 관전 가이드북'이란 덧글이 붙어 있는 <육상홀릭>도 육상을 잘 모르거나 그 속내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길라잡이다.
프롤로그 '나는 달린다, 고로 나는 살아 있다', '왜 세계 육상은 흑인들 세상인가', '단거리 선수(스프린터) 이야기', '장거리 선수 이야기',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고독'(1부), '민족 영웅 손기정 스토리', '한국 마라톤 중흥시대, 황영조와 이봉주'(2부), '출발과 도착 사이의 규칙' '신체, 근육, 정신, 자세'(3부), 에필로그 '억만 년 뭉치고 다져야 비로소 꽃이 핀다'가 그것.
23일(화) 광화문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만난 김화성 기자는 "한국육상은 우물 안 개구리"라고 못 박았다. 그는 "한국 육상에서도 얼마든지 수영의 박태환이나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가 나올 수 있다"며 "문제는 시스템"이라고 꼬집었다. 이는 곧 뛰어난 육상 꿈나무가 나와도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키워낼 디딤돌이 아직 마련되지 않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는 "지도자가 없다. 트레이닝은 주먹구구식"이라며 우리 육상계를 거칠게 비꼰다. 육상 꿈나무들이 한때 반짝하다가 사라지는 까닭도 이 때문이라는 것. 그는 "현대 육상은 과학"이라며 "육상은 10년 앞을 내다보고 투자해야 하는 데 근시안적인 행정이 문제다. 육상은 모든 스포츠의 기본"이라고 되짚었다. 태릉선수촌에서 짧은 기간 죽어라 훈련한다고 해서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는 것이 바로 육상이기 때문이다.
자유와 해방이 담긴 스포츠, 육상에 취해 놀다
"먹잇감을 쫓다 보면, 개울을 훌쩍 뛰어넘어야 하고, 강을 건너, 돌을 던지거나 창 혹은 화살을 날려야 한다. 그뿐인가. 때론 먹잇감과 드잡이를 벌여야 하는 상황도 닥친다. '달리고, 뛰고, 던지는' 동작 없이 이루어지는 스포츠는 거의 없다. 'Citius!(보다 빨리), Altius!(보다 높이), Fortius!(보다 힘차게)의 올림픽 모토도 결국은 육상의 정신과 똑같다. 걷거나 달리다 보면 머리가 맑아진다. 마음이 활짝 열린다. 걷기나 달리기는 한 가지에서 난 잎이다. '자유'와 '해방'의 스포츠이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준다."-22쪽 이 책은 선사시대 육상부터 미래 육상까지 한꺼번에 아우른다. 우리나라 육상에서 아프리카 육상과 지구촌 육상까지를 "인간이 달리고 넘고 던진다는 것"을 화두로 삼는다.
그렇게 달리고 넘고 던지다 보면 자유와 해방을 맛볼 수 있으며, 보너스로 황홀감까지 느낄 수 있는 통쾌한 매력을 지닌 스포츠가 육상이라는 것이다.
"'나라 없는 백성은 개와 똑같아. 만약 일장기가 올라가고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연주되는 것을 알았다면 난 베를린 올림픽에서 달리지 않았을 거야'... 손기정 선생은 당시 일제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일본 이름 '기테이 손'이 아니라 한글로 '손긔졍'이라고 당당히 사인했으며, 자신이 '코리언', 즉 조선인임을 분명하게 밝혔다."-128~129쪽 손기정은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시상대에서 계속 고개를 푹 수그리고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를 월계수 화관으로 가린 채. 왜 그랬을까. 김화성은 "생애에 다시는 일장기를 달고 달리지 않으리라 스스로 굳게 맹세하기 위해서"라며 "손기정은 실제로 해방이 되기까지 단 한 번도 마라톤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고 썼다.
우리나라 마라톤은 딱 두 번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손기정과 황영조가 그들이다. 하지만 세계 마라톤 제패는 꽤 화려하다. 손기정 제자 서윤복은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세계최고기록으로 우승했고, 1950년 보스턴 마라톤에서도 손기정이 길러낸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 2, 3위를 휩쓸었다. 이는 1945년 광복 뒤에 이루어진 일이다.
우리나라 마라톤을 이야기하면서 이봉주를 빼놓을 수 없다. 황영조와 동갑내기였던 이봉주는 '천재형'이었던 황영조와 달리 '은근과 끈기형'이었다. 이봉주는 1996년 애틀란트 올림픽에서 비록 은메달에 머물렀지만 우리나라 으뜸기록을 갖고 있다. 1935년부터 1952년까지 17년 동안 세계으뜸기록은 손기정과 그가 길러낸 제자 서윤복이 갖고 있었다.
육상은 흑인잔치?... 마라토너들이 선글라스를 끼는 까닭?"'흑인은 결코 장거리를 달릴 수 없다'고 여겨지던 시절, 아프리카 흑인 사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비킬라 아베베. 이탈리아에게 5년 동안 무단 점령당했던 에티오피아의 영웅이다. 아베베가 로마 올림픽에서 돌아오는 날, 에티오피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16km 넘는 길을 마중 나와 왕관을 벗어 아베베의 머리에 씌웠다." -71쪽 김화성은 "육상과 축구는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밥이요 빵"이라고 말한다. 그는 "아프리카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들판을 달리며 넘고 던진다. 그리고 공을 찬다"라며 "가난한 그들이 운동을 잘하면 부족 전체에 부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라고 귀띔한다. 까닭에 지금 단거리뿐만 아니라 장거리에서도 흑인들 세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
흑인들이 달리기에 뛰어난 까닭에 대해 미국 생물학자 빈센트 사리히는 재미있는 통계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그는 이 결과에서 지구촌에서 뛰어난 마라토너가 나올 확률은 "케냐의 칼렌진 부족이 100만 명에 80명 꼴이라면 그 이외 다른 국가는 인구 2000만 명에 1명 정도"라고 밝혔다. 왜 그럴까?
케냐 칼렌진 족에는 '캐틀 라이딩'(소 도둑질) 전통이 있었지만 훔치다 걸리면 곧바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칼렌진 남자들은 결혼을 하려면 소 두세 마리는 훔쳐 와야 했다. 이는 곧 으뜸 마라토너만이 아내를 얻을 수 있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까닭에 수백 년 동안 으뜸으로 잘 달리는 유전자만 남게 됐고 오늘날 케냐 선수들이 바로 그 유전자를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김화성은 "흑인들 엉덩이는 빵빵하다. 허벅지 뒤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부분이 늘씬하고 팽팽하다. 그래서 잘 달린다"고 분석한다. 그는 "이 빵빵한 엉덩이에서 순간적인 강력한 힘이 분출된다. 학자들은 이 빵빵한 엉덩이 근육을 파워 존이라고 부른다"라며 "파워 존이 잘 발달해야 빠르게 달릴 수 있다. 흑인들의 파워 존은 백인종이나 황인종에 비해 눈에 띄게 잘 발달돼 있다"고 매듭지었다.
여기서 육상 힌트 두 가지. 첫째, 육상 선수들이 발목이 가늘고 머리가 작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 답은 몸무게 때문이다. 몸무게가 1kg만 더 나가더라도 기록이 3분이나 늦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마라토너들은 왜 선글라스를 좋아할까? 그 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다른 선수들에게 스스로 지쳤다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서다. 다른 하나는 밤에 달리는 듯한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낮보다 밤에 달리는 것이 기록이 빨라진다는 것.
육상, 그 몸짓과 움직임 하나하나는 너무 아름답고 깊다"현대 스포츠의 생명은 뭐니 뭐니 해도 '스피드'이다. 어느 종목이든 이제 스피드가 없는 선수는 설 땅이 없다... 스피드는 대부분 선천적으로 타고난다. 기술은 후천적으로 가르칠 수 있지만 스피드는 훈련으로 향상되는 데 한계가 있다. 빠른 선수는 태어날 때부터 보통사람보다 유난히 속근이 발달해 있다. 스포츠 꿈나무를 조기에 발굴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3쪽 국가대표 마라톤경보위원장 황영조는 김화성 기자에 대해 "현역시절부터 감독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 나를 지켜보고 있는 '육상 왕초 기자'"라고 손꼽는다. 그는 "돌아가신 정봉수 감독님과 손기정 선생님을 가장 오랫동안 스킨십하며 취재한 기자도 바로 그"라며 "2006년 손기정 선생님이 달렸던 베를린 코스를 김 기자와 함께 더듬었던 일이 떠오른다"고 되짚었다.
전 마라토너 이봉주는 "코오롱 팀을 떠나 후배들과 여관밥을 먹으며 훈련할 때"를 떠올린다. 그는 "여론은 '이봉주는 이제 끝났다'고 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은 다가오는데 하루하루가 막막하기만 했다"라며 "그때 김 기자가 배시시 웃으며 나타났다. '지구가 무너지기라도 했느냐'며 등을 두드려줬다. 난 다시 신발 끈을 질끈 조여 맸다. 2001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후 김 기자와 거나하게 마셨다. 나도 취했고, 그도 취했다"고 적었다.
황규훈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은 "김 기자는 한국 육상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나타나는 기자"라고 말한다. 그는 "그의 글은 쉽고 재밌다. 나 같은 장거리 선수 출신도 몸으로는 알지만 그것을 표현하려면 힘들다. 그럴 때는 김 기자를 찾으면 된다"라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스르르 문제가 풀린다. 어디서 그렇게 '간결하면서도 쉽고 재밌는 말'을 꼭 집어내는지. 그가 말하면 아무리 까다로운 종목도 '흥미진진한 드라마'가 된다"고 썼다.
김화성 기자가 펴낸 <자유와 황홀 육상>은 육상이 얼마나 재미있고, 얼마나 고소한 깨소금 맛이 나는 운동이라는 것을 절로 깨치게 이끈다. 글쓴이도 사실 육상을 잘 몰랐다. 초등학교 때 운동회나 중학교 때를 지나선 달리기조차 제대로 한 때도 없다. 이 책을 보고서야 육상에서 그 몸짓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 얼마나 깊은 뜻이 담겨 있는지 비로소 꿰뚫게 되었다.
김화성 기자는 1956년 전북 김제평야에서 태어나 1982년 <매일경제>에 입사한 뒤 1988년 <동아일보>로 옮겨 편집부, 생활부, 주간동아(뉴스플러스), 스포츠레저부, 여행기자 등을 거쳤다. 그는 기자협회가 주는 '이 달의 기자상'을 두 번 받았고, 한국편집기자대상도 받았다. 지금은 <동아일보> 스포츠 전문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KBS 'TV 책을 말하다' 자문위원, 손기정 기념재단 이사, '육상월드' 편집위원 등을 맡았다.
펴낸 스포츠 책으로는 <한국은 축구다> <CEO히딩크 게임의 지배>(공저) <박지성 휘젓고 박주영 쏜다>가 있다. 그밖에 <문득 고개 들어 세상 보니> <책에 취해 놀다> <전주에서 놀다> <길 위에서 놀다> <걷고 싶고 머물고 싶은 우리 길 21> <김화성 기자의 음식 인문학 '꽃밥'> 등이 있다.
그린이 손문상은 수원문화운동연합, 노동미술연구소 등에서 사회를 바꾸는 데 미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20대를 보냈다. 지은 책으로 <바그다드를 흐르다> <얼굴> <브라보 내 인생> 등이 있다. 다른 이들과 함께 만든 책으로 <십시일反> <사이시옷> <악! 법이라고?> <이어달리기> 등이 있다. 2003년 민주언론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