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러시아 집은 대부분 창문과 벽을 예쁘게 문양을 넣어 장식한다.
▲ 예쁜 러시아집 러시아 집은 대부분 창문과 벽을 예쁘게 문양을 넣어 장식한다.
ⓒ 한성희

관련사진보기


울란바토르 역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몽골 국경지대 수흐바타르 역에 도착한 것은 새벽 5시 30분이었지만 최소한 4시간을 정차한다고 한다. 세관과 출국 허가를 받으려면 출근 시간까지는 기다려야 하리라.

기차는 침대 차량 2개만 남기고 전부 어디로 가버렸다. 휭 하니 썰렁한 역에서 새벽부터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열차 화장실도 문이 잠겼다. 이 국제열차 화장실은 정차 15분 전부터 문이 잠기고 출발 15분 후부터 열리는 이상한 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담장도 없어 아무나 들락거릴 수 있는 수흐바타르 역의 화장실은 유료다. 똑순이와 함께 화장실에 갔다가 문을 열어보고는 도무지 일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 난감해 도로 나왔다. 우리나라 화장실을 빗대어 설명하자면, 변기뚜껑과 그 아래 좌변뚜껑이 고스란히 사라진 형태다. 엉덩이를 쳐들고 일을 보라는 건지…. 돈까지 받으면서 말이다.

  브리야트 공화국 울란우데로 가는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몽골 국경 수흐바타르 역에 정차했다.
▲ 시베리아 횡단열차 브리야트 공화국 울란우데로 가는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몽골 국경 수흐바타르 역에 정차했다.
ⓒ 한성희

관련사진보기


세면대에서 이를 닦고 고양이 세수를 하고 있자니 똑순이가 키들키들 웃으며 나온다.

"언니가 왜 들어가자마자 나오는지 이상했어."
"이런 화장실에 왜 돈까지 받냐고."

씩씩한 똑순이는 컵라면과 어제 저녁 초이질 국장이 싸준 양고기 만두를 챙겨 일행에게 아침식사 하라고 역 마당으로 불러 모았다. 나는 거의 입에 대지 않았지만 아침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 모여 간단하게 컵라면과 만두로 식사를 끝냈다.

몽골 국경역이다.
▲ 수흐바타르 역 몽골 국경역이다.
ⓒ 한성희

관련사진보기


몽골 국경의 아침은 그렇게 평화로웠는데…. 세관을 통과하고 국경심사가 남은 마당에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 국경을 넘지 못할지도 모른다.

"몽골 출국 못 해!"

한·몽사회정책학회가 울란바토르에서 세미나를 열 때 러시아 브리야트 공화국 참가와 방문은 몽골 정부가 주선해서 추가한 일정이었다. 몽골은 러시아와 가까운 우방국이다. 따라서 몽골 노동복지청은 브리야트 공화국이 한국과 몽골의 세미나에 함께 참석할 것을 협의했고 이후의 일정도 몽골 정부와 브리야트 정부가 조정해서 한국에 알려주는 식으로 진행된 걸로 안다. 더욱이 가장 중요한 러시아 초청장을 몽골 측에서 건네받지 못했단다.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 미처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브리야트 공화국 울란우데 시외에 있는 주택
▲ 러시아 주택 브리야트 공화국 울란우데 시외에 있는 주택
ⓒ 한성희

관련사진보기


브리야트 공화국, 몽골, 한국 순으로 거쳐 오는 복잡한 일정을 몇 번이나 조율하다보니 우리가 러시아로 들어갈 입국 일자가 내일인데 오늘 입국해야할 형편에 놓인 것이다. 더구나 출국허가를 못해주겠다고 몽골 국경 부서가 강경하게 나왔다.

빨리 몽골 노동복지청에 전화하라는 내 말에 나라 교수가 부지런히 이곳저곳으로 전화했지만 결론은, 오늘 이곳에서 묵고 내일 이 시간에 기차를 다시 타라는 답변이었다. 어쨌든 일행은 우선 러시아 국경으로 가기로 결론을 내렸지만 나라 교수는 "그곳은 숙소도 없는 곳이고 가서는 안 된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우리가 러시아 입국을 하고 안 하고는 러시아에서 결정할 문제지 왜 몽골에서 출국을 막는 건지.

"내일 오전 11시에 러시아 인구사회복지 장관을 만날 약속을 어기는 건 큰 결례라고."

윤조덕 한·몽사회정책학회 수석부회장과 박순일 부회장은 급하게 브리야트 측과 전화를 걸어보며 러시아 대사관으로 연락을 시도했다. 현지 시간 새벽 2시라는 러시아 대사관의 답변은 일단 가서 부딪치고 안 되면 다시 연락하라는 것. 러시아 대사관의 답변으로 추측컨대 장관 만날 약속이 있는데 국경에서 통과시킬 거라는 짐작을 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라 말대로 내일 기차를 타면 밤 10시에 울란우데에 도착하게 된다. 따라서 장관을 만날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몽골 정부의 도움은 오직 나라 교수에게 달려있었는데 나라 교수는 겨우 32살의 젊은 아가씨일 뿐이다. 어디에 전화해서 알아봤는지도 의문이었다. 몽골 정부 관계자의 전화 한 통화면 출국허가는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닌가.

오전 9시부터 시작한 이 씨름은 결국 11시 30분이 넘어서 겨우 출국허가를 내줘 출발하게 됐다. 브리야트 공화국 입국 문제는 장관 미팅이 있다는데 막을 이유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라 교수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게 러시아 국경 관리를 맘씨 좋은 사람으로 잘 만나야 한다고 걱정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잔재, 관료주의가 아직도 남아있는가.

 철로 주변의 농촌 마을 풍경. 채소를 가꾸는 밭에 나무 울타리를 둘러놓은 것이 정겹고 이색적이다.
▲ 러시아 텃밭 철로 주변의 농촌 마을 풍경. 채소를 가꾸는 밭에 나무 울타리를 둘러놓은 것이 정겹고 이색적이다.
ⓒ 한성희

관련사진보기


기차는 러시아 국경을 향해 떠났다. 우리 때문에 열차가 2시간 이상 지체됐겠지만 이 나라에서는 이것이 그리 드문 현상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입국 못 해도 괜찮아요. 러시아 국경에서 하룻밤 지새우죠 뭐. '국경의 밤' 같은."
"한 기자야 그래도 신나겠지."
"언제 국경에서 밤을 새겠어요? 이럴 때나 경험해보지."

러시아로 가는 열차 안에서 박 부회장에게 킬킬거리자, 여유가 생긴 듯 피식 웃었다. 사실 그리 걱정은 되지 않았다. 이곳에선 통화가 안 됐지만 국경에서 브리야트 담당자에게 전화 통화를 한다면 허가해주지 않을 이유가 없을 듯했다.

15분가량 열차가 달려 20km 떨어진 러시아 국경에 도착하자 국경수비대 군인과 입국 허가 관리가 차례로 열차에 올랐다. 나라 교수의 설득에 열차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 관리에게 보여주라고 준비해뒀던 한·몽·브리야트 세미나 자료집을 나라 교수에게 건네줬다. 한국, 몽골, 러시아 말로 된 자료집이다. 그리고 영어로 된 일정표를 보여주니 별다른 이의 없이 순순히 통과시켜 준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가던 중 어느 철도 역에 서 있던 화물기관차. 낡고 녹슨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 화물기관차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가던 중 어느 철도 역에 서 있던 화물기관차. 낡고 녹슨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 한성희

관련사진보기



러시아 시골 역에서 4시간

열차는 이제 러시아에 들어섰다. 10분 정도 더 달려 세관 검사를 하는 역에서 정차했다. 정복을 한 러시아 관리가 들어서자 마주 앉은 나라가 "어머, 개!"하면서 놀란다. 개가 열차에 들어와? 커다란 세관 세퍼트를 상상하며 고개를 돌려봤다.

팔뚝보다 좀 큰 검정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들어온 러시아 세관원이 의자를 열어보라 하더니 한번 쳐다본 후, 짐 조사도 않고 그냥 다른 칸으로 건너가 버린다. 러시아를 다니며 보따리 장사를 하는 몽골인들이 많고 몽골인에게는 철저하게 까뒤집어가며 짐 조사를 한다 들었다. 

"개가 큰 줄 알았는데 겨우 팔뚝만한 개네? 좀 우습다. 세관 개는 세퍼트만 할 거라는 생각했거든."
"저도 한국 들어 갈 때마다 저만한 개가 있는 세관통관 받았어요. 한국 공항에도 개 저렇게 작아요."
"그래? 공항 다녀도 개는 구경도 못해봤는데."
"몽골사람들에게는 음식물부터 짐 조사 철저하게 해요."

교수 신분인 나라조차 그런 절차를 밟는다는 건 몰랐다. 몽골인에게 우월감을 뽐내는 듯한 러시아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세관 통관역인 이곳에서 4시간 정차한단다. 그러니까 울란우데까지 24시간 걸리는 기차가  몽골과 러시아 국경역에서 정차하는 시간만 무려 10시간이다. 정거장에서 모두 기지개를 켜며 역으로 슬슬 내려가 러시아 시골역 풍경을 감상한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지났다. 이곳 역에도 화장실은 유료였지만 시설과 청결 관리는 몽골보다 훨씬 낫다. 한숨을 돌린 일행은 역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밖으로 구경을 나갔지만 동네가 크지 않은 한적한 시골이다.

  낡은 목재집에 정성껏 색칠한 창문. 브리야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란 창이지만 집집마다 문양은 다르다.
▲ 파란 창문 낡은 목재집에 정성껏 색칠한 창문. 브리야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란 창이지만 집집마다 문양은 다르다.
ⓒ 한성희

관련사진보기


누군가 근처에 시장에 있다고 구경 간다고 했다. 귀가 번쩍 뛰어 따라나서려고 하는데 시장 가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러시아 돈은 윤 박사가 다 관리하고 있다.

"윤 박사님, 저 러시아 돈 좀 주세요. 시장 가게요."
"살 것도 없어."

그러더니 10루불 지폐를 준다. 지폐라서 큰돈인 거 같아 얼른 받아들고 계산해 본다. 가만 있자, 10루불이면 우리 돈으로 40을 곱해도 400원이다.

"이거 400원이잖아요? 요걸로 뭘 사라고요? 아니 애들도 500원 주면 안 받는데 겨우 400원을 줘요?"
"잔돈이 없다니까."

역사 앞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쉬고 있던 윤 박사와 다른 일행들은 여유롭게 웃기만 했다. 

"화장실에 가도 5루불은 줘야 하는데 겨우 10루블을 줘요?"

투덜거리며 시장으로 갔다. 목재로 짠 부스가 늘어선 된 러시아 시골 시장은 부스의 절반도 못 채우고 장판을 펴놓았다. 촌스런 옷과 신발, 과자, 과일 몇 개 뿐, 사실 살 것은 없다. 그래도 10루블 가지고 살 물건은 더더욱 없었다. 러시아 과자가 맛있다던데. 갖가지 과자를 펴놓고 있던 부스가 눈에서 떠나지 않았다.

 울란우데 시내에 핀 도라지꽃이 북국의 여름을 더욱 화사하게 해준다.
▲ 도라지꽃 울란우데 시내에 핀 도라지꽃이 북국의 여름을 더욱 화사하게 해준다.
ⓒ 한성희

관련사진보기


한낮의 더위가 러시아 시골 역에 사정없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웃통을 벗어버린 배불뚝이 러시아 남자가 벌건 상체를 드러내고 여유롭게 기차역을 슬슬 돌아다니는 한가로운 오후였다. 나무그늘에 모인 우리에게 H교수가 사온 러시아 살구를 풀어놓자 다들 한 개씩 집어들었고 내가 먹어본 살구 중 가장 달고 맛있었다. 기차는 다시 출발 준비를 했다. 이 나라는 기차 시간에 지나치게 관대하다.

국산 고탄력 스타킹의 위력

다시 기차가 움직이자 몽골의 풍경과 그다지 다를 것 없던 소와 양, 말이 어슬렁거리는 들판이 계속되더니 푸른 들판, 꽃이 핀 늪, 호수가 나타났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러시아의 풍경이 시작되는가. 멀리서 나무판자로 지은 나지막한 집들이 보였다. 녹이 슨 낡은 화물열차와 텅 빈 공장들이, 소련 붕괴 이후 무너진 공업의 현주소인양 옛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끝없이 일직선으로 기찻길과  나무 전봇대가 따라왔다.
▲ 시베리아 철도 끝없이 일직선으로 기찻길과 나무 전봇대가 따라왔다.
ⓒ 한성희

관련사진보기



동시베리아 러시아를 달리는 기차에서 본 아름다운 풍광은 창문에 카메라와 코를 박고 들여다보던 내 기대에 부응하듯 계속 나타났다. 몽골인, 태국인, 러시아인, 동유럽인 등 열차 승무원도 국제열차답게 다국적이었지만 열차 속도는 완행열차와 다를 것 없이 느리고 정거장마다 쉬고 가기를 반복했다. 단선 철도이기 때문이리라.

15분 달리고 천천히 쉬는 역을 계속 거쳐 달려간다. 넓은 대지, 푸른 숲, 연초록 늪에 핀 노란 난초꽃들이 시선을 붙잡았다. 기차 레일을 따라 나무 전봇대가 끝없이 줄지어 따라오며 마치 그리운 흑백영화의 추억 한 토막을 보여주는 듯했다.

3칸을 자리 잡은 우리일행은 비어있는 옆 칸에 옮겨 앉아 테이블에 커피, 소주, 땅콩, 짜디짠 프리첼 과자, 러시아 시장에서 산 요거트와 과자를 펼쳐놓고 먹으며 러시아 역사, 우리나라 정치, 앞으로 보게 될 바이칼 호수, 우리민족의 시원 등 편안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창문을 열면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 이마와 머리칼을 말려주었지만 단정한 제복을 입고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러시아 여성승무원은 정차할 때마다 우리에게 "에어컨" 어쩌구 하며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그러고 보니 미지근한 에어컨이 나오는 열차다. 비어있는 옆 칸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은근히 눈총도 주었다.

여성 승무원이 왔다가기를 서너 번 반복하자 똑순이가 드디어 고탄력 팬티스타킹 한 켤레를 꺼냈다. 그리고 울란우데에 도착할 때까지 스타킹을 받아든 승무원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었다. 대한민국 제품 짱이다. 창밖에 해가 지지 않고 있어 저녁시간이 된 것도 몰랐다. 말로만 듣던 백야다.

 울란우데 역 앞.
▲ 울란우데 역 울란우데 역 앞.
ⓒ 한성희

관련사진보기


울란바토르 역에서 출발한지 25시간이 지나, 밤 11시에 울란우데역에 도착했을 때, 아직 초저녁 같은 백야에 익숙하지 않아 어리둥절했다. 마중 나온 통역 사예나와, 나타샤, 타니아니, 세르게이가 환하게 웃었다. 세르게이는 내 가방을 집어들고 차로 안내했다.

"웰컴!"

브리야트와 러시아 합병 350주년을 기념한다는 축포가 울란우데 밤하늘에 화려하게 수를 놓고 있었다.


태그:#울란우데, #러시아 브리야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