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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은 낙동강의 제1지류로, 경북 봉화와 예천을 거쳐 흐르는 총 길이 100km가 넘는 강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추천될 만큼 보존 가치가 높고,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모래강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영주댐이 건설되고 있습니다. 댐이 완공되면 내성천의 중상류가 수몰돼 사라집니다. 또 하류로 운반되는 물과 모래가 줄어들게 됩니다. 이는 그동안 낙동강의 정화를 담당했던 필터 기능이 사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거대한 삽질에 의해 베이는 버드나무 군락, 파헤쳐지는 흰 모래 사장, 멸종 위기의 수달, 사라져가는 흰수마자…. 이뿐만이 아닙니다. 영주댐의 건설로 운포구곡을 비롯한 비경과 문화재, 농경지도 수몰되고 있습니다.  
 
지난 8월 6~7일 사이 약 20명의 작가들은 낙동강의 젖줄 내성천으로 향했고, 삽질에 의해 찢기고 파괴된 강바닥을 다시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흐르는 내성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지금 내성천으로 가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여러분 스스로 강이 되어, 모래의 강 내성천을 마침내 지켜주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 내성천 살리기 참여 작가 일동
 

영주로 떠나기 며칠 전, 대구에 있는 외삼촌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날 애타게 찾고 있으니 주말엔 대구에 한번 다녀가면 어떻겠냐는 전화였다. 주말이라…, 주말이면 이미 한 달 전에 약속된 내성천 행이 있는 날이다. 그런데 아픈 어머니는 날 찾고 있다. 내성천이냐 어머니냐라는, 어느 한 곳으로 방향을 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잠시 고민을 했다. 그리고 곧 내성천엘 가겠다는 다짐을 굳혔다.

 

어머니의 병은 오래되었다. 그러다 넉 달 전, 정신마저 놓아버린 어머니. 나는 이제 긴 호흡을 해야 한다. 어머니를 찾지 않은 나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 속으로부터 끓어올랐지만 나는 길게 숨 쉬고 싶었다. 

 

'어머니, 저 내성천에 갈게요. 그리고 곧 어머니에게 갈게요.'

 

발밑의 모래가 스멀스멀 빠져 나가고 있었다. 바지를 걷고 나무처럼 뿌리내리고 내성천에 섰다. 누군가는 내성천 모래의 흐름을 느껴보라고 한다. 잠시, 목적도 없이 걷던 물길 위에서 침묵한다. 발바닥 밑으로 슬슬슬 흘러흘러 가는 모래들의 이동이 느껴진다. 이럴 수가, 이렇게 빨리 떠나 버리다니. 모래들의 이동을 느끼고 있던 나의 호흡이 빨라진다. 이럴 수가! 잠깐 사이에 몸이 기우뚱한다.

 

발바닥 아래의 모래가 급하게 이동해가면서 내가 서 있던 자리가 위태로워진 것이다. 잠깐 사이에 강은 나의 균형을 깨뜨렸다. 강의 내면에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평생 간고등어 판 어머니가 정신을 놓았다

 

넉 달 전, 어머니는 간고등어처럼 등을 갈랐다. 어머니는 한평생 간고등어를 파셨다. 겨울이면 동태와 갈치를 팔았다. 뒷목 아래, 검은 버섯처럼 얼룩진 점에서 칼질은 시작되었다. 사십 센티미터나 될까. 죽 그어놓은 칼질을 중심으로 어머니의 등은 이등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안으로 인공뼈가 들어앉았다. 어머니의 등을 꿰맨 바느질은 아름답지가 않다.

 

수십 킬로그램의 '다라이'를 이고 장을 돌며 생선을 팔던 어머니를 아버지는 '장돌뱅이'라고 비웃었다.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던 그 말. 덕분에 한평생 악다구니를 쓰던 싸움도 그치질 않았지만 사실 젊은 날의 어머니는 천에 자수를 놓아 팔던 여인이었다.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는 아름다웠다. 그런 어머니가 정신을 놓았다. 의사는 고통으로 인한 망상이라고 했다. 고통스러운 삶. 고통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나는 지금 내성천 물속에 뿌리를 담그고 있다. 빠른 유속은 나의 기반을 흔든다. 나는 자주 휘청거린다.

 

고통은 본류로부터 올라왔다. 삼백 킬로미터가 넘는 낙동강의 본류는 이제 느리게 숨 쉬며 살던 그 강이 아니다. 끝도 모를 상처. 상처의 깊이를 알 수 있다면 죽을 만큼 아픈 고통이란 과연 몇 미터의 깊이인지 알고 싶다. 상처 주고 상처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고통의 깊이는 얼마인지, 얼만큼을 견디면 고통은 마침내 터져나오고야 마는지 되묻고 싶다.

 

낙동강 본류의 깊이가 수심 6미터까지 파헤쳐져 나갔다. 파낸 토양이 강 주변에 쌓여 있다. 애초 강바닥이었을 저 피, 저 살들.

 

본류가 급격히 깊어졌다. 예전의 길이 아니다. 날벼락이다.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던 지류들도 절벽 같은 깊이로 내몰린다. 재앙이다.

 

"역행 침식이에요."

 

일행 중 누군가가 아주 짧은 말로 이 상황을 정리해 준다. 본류의 수심이 갑자기 깊어지면서 상류에 있던 지류의 흐름이 빨라지는 현상. 물살이 빨라지면서 물이 싣고 가던 퇴적물들도 함께 실려 내려갔다. 예전 모래톱이 수놓았을 내성천은 이제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리고 들어가도 젖기 일쑤다.

 

걸음을 멈추고 서 있노라면 발바닥 아래로 그 짧은 순간에도 수도 없이 끌려가고 있는 모래들의 흐름이 느껴진다. 철거 같고, 구속 같고, 강제 이주 같은 아픈 흐름이다.

 

얼마나 무거웠으면 뼈가 주저앉았을까

 

어머니는 노점상이었다. 수십 년을 쫓기고 빼앗겼다. 어머니의 일터는 자주 철거되었다. 1970~1980년대, 내가 아주 어리거나 젊었던 날에 어머니는 매일 일터를 세우고 매일 일터를 철거당했다. 어린 날 나는 자주 어머니의 일터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서러워서 울고 무서워서 울고 엄마를 돌려 달라고 애원하며 울던 대구 칠성파출소.

 

나는 자주 무언가를 주워 담았다. 짓이겨진 고등어를 주워 담고, 흘린 채 끌려간 어머니의 한쪽 슬리퍼를 주워 담았다. 아직도 나는 재래시장엘 가면 수도 없이 무언가를 주워 담는다. 내 유년을 주워 담고 아직 시장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눈물을 주워 담는다. 생존을 향했던 아픈 몸부림들은 여전히 내가 담아야 할 소중한 생의 가치이다.

 

어머니. 내성천의 모래알같이, 끝이 어딘지도 모르고 내쫓기고 쓸려가고 깊이도 모를 상처 속으로 추락하던 어머니. 얼마나 무거웠으면 뼈가 주저앉았을까, 얼마나 아팠으면 차라리 정신을 놓아 버렸을까. 상처에 무게가 있다면 몇 킬로그램쯤인지 나는 또 묻고 싶다.

 

 

문제는 본류의 개발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초등학교가 보이는 가게 앞에서 나는 영주 지방에서 담근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대낮의 햇볕이 술을 마신 속을 끓이기라도 하는지 막걸리 두 잔에 온몸이 달아오른다. 막걸리 두 병에도 끄떡없던, 힘센 수탉 같던 술 자랑도 낮술엔 다 소용없다.

 

잃을 뻔한 정신을 겨우 차리고 먼 곳을 응시한다. 올해 마지막 동창회를 끝냈다는 초등학교. 이제 더 이상 땅 위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는 초등학교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잠시 낮술에 취할 수 있었던 막걸리를 내온 이 가게도 곧 수몰될 땅 위에 서 있다.

 

남쪽으로는 낙동강 본류의 바닥이 파헤쳐지면서 수심이 깊어진 탓에 지류인 내성천의 모래가 급하게 쓸려갔다면 내성천 상류에서는 영주댐 공사가 한창이다. 내성천으로 흘러가는 모래와 물을 가로막는 공사다.

 

물 확보가 공사의 주된 원인이라지만, 생각해보라. 여름 한철의 집중호우, 물을 보관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재앙으로 흘려보낸 물이 얼마나 더 많은지. 댐 공사의 공자도 모르는 내가 봐도 우리나라는 물 보관이 더 이상 공사의 이유가 될 수 없다. 올 여름, 산사태로 많은 생명과 물을 잃어버리고도 다시 산을 파헤쳐 댐공사를 하고 있다.

 

내성천의 상류를 막아 영주댐을 만들고, 내성천이 진입하는 본류인 낙동강을 파헤쳐 수심을 깊게 한 낙동강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낙동강에는 수많은 보를 만들어 흐름을 막고 있다. 세월이 흘러가듯 계절이 바뀌듯 하는 그런 흐름이 아니다. 급격한 격차를 둔 계단식 흐름이다. 그 사이사이는 수문이 막고 있다. 이제 낙동강 맑은 물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낯설어서 더더욱 안아보고 싶은 어머니

 

어머니의 갈라진 등 사이로는 수많은 인공 뼈가 들어앉았다. 아픔 많은 삶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정신을 놓을 줄 정말 몰랐다. 초등학교 문 앞에도 안 가보고도 간고등어 몇 상자의 값을 척척 계산하던 어머니. 정신을 놓아버린 어머니가 너무 낯설다. 낯설어서 더더욱 안아보고 싶다.

 

내성천 모래밭을 가로질러 간 수달의 발자국이 보인다. 선명하다. 엄마를 좇아 시장바닥을 누비던 내 어린 날의 발자국 같다.

 

영주역에서 내려 시작한 순례길, 어머니에게 찾아 가지 않고 떠나온 길이라 첫걸음은 무거웠다. 일행과 함께 내성천 물길을 많이 걸었다. 아픔 많은 강이지만 그래도 강은 힘이 있다. 내성천을 걷지 않았더라면 나는 더 많이 지치지 않았을까. 어머니로 인해 무거웠던 마음이 어느 순간 내성천과 합쳐졌다. 굴곡 많은 어머니의 삶, 어머니의 삶은 강과 다르지 않다.

 

하류로 걸어 내려온 순례다 보니 집으로 돌아올 때는 점촌역에서 기차를 탔다. 문경여고를 졸업한, 이제는 할머니가 된 한 시인의 시가 역사에 걸려 있다.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추억을 담은 시이다. 추억은 오래될수록 더욱 아름다워지는 법인가 보다. 참, 강물 같은 삶이다.

덧붙이는 글 | * 서분숙 : 르포작가. 15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고 '리얼리스트100' 회원이다. 계간지 <리얼리스트>와 <자음과 모음 R> 등에 르포를 발표했다. '르포'를 통해 세상의 치유를 꿈꾸며 경북대 대학원 문학치료학과에서 수련하고 있다. 

* 내성천 한 평 사기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 공식 홈페이지 : http://www.ntrust.or.kr/nsc 
내성천 지킴이들 카페 <우리가 강이 되어주자> : http://cafe.daum.net/naeseongcheon 
내성천 답사를 원하는 단체는 위 카페를 참조해주세요.


태그:#4대강사업, #사대강, #영주댐, #내성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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