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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2011년 5월 20일 발간한 "OECD 국가의 복지수준 비교" 논문을 보면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지출 수준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권이다. 우리나라의 공공복지 지출수준은 국내총생산 대비 8.3%로 OECD 평균(20.6%) 절반도 안 된다. OECD 국민들의 행복도를 보면 1위 노르웨이, 2위 네덜란드, 3위 덴마크이며, 한국은 29위로 복지충족지표와 더불어 최하위권이다.

 

복지수요 충족을 위한 시스템 구비도 역시 1위 룩셈부르크, 2위 프랑스 3위 스웨덴이고 한국은 28위로 최하위권이다. 종합복지지수 평가에서도 한국의 종합점수는 26위로 하위수준이다. 그런데 최근 한나라당 홍준표씨는 우리나라의 "무차별복지는 사회적 약탈행위"라고 언성을 높였다. 더 무서운 현실은 그런 홍씨의 무책임하고 근거 없는 발언에 대한 사회적 반향이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흔히 사회복지가 좋으면 국가경쟁력이 떨어지고 결국 부도국가로 전락한다는 것이 수구기득권 세력들의 논리다. 그러나 위의 자료만 검토해 봐도, OECD 국가 중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들이 가장 높은 복지지수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들 국가는 단순히 복지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을 뿐 아니라 경제적·재정적 성과도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복지가 좋으면 국가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논리는 순전한 허구에 불과하고 오히려 좋은 복지제도와 경제적·재정적 성과는 병행관계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맑스, 탈현대적 지평을 걷다>의 저자 박영균 교수는 "평등 없이 자유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자유주의가 고전적 자유주의의 현대판이지만 고전적 자유주의에 비해 훨씬 반동적인 사상이라고 평가한다. 왜냐 하면 신자유주의는 복지라는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파괴하고 시장의 자유를 주창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자유와 평등, 또 사회복지 논쟁이 한참인 요즘 21세기의 맑스사상가 박영균 교수를 만났다. 다음은 지난 8월 29일 박영균교수와 건국대 연구실에서 나눈 일문일답이다.

 

 

- 지난 세기 말 소련의 붕괴와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으로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을 주장하기도 했다. 자유보다는 평등의 가치를 강조하던 맑스의 사상이 21세기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나?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역사적으로 대격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전면화와 고삐 풀린 자본의 탐욕이 전세계를 홀로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현대판이지만 고전적 자유주의에 비해 훨씬 반동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신자유주의는 복지라는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파괴하고 시장의 자유를 주창하기 때문이다. 사실, 신자유주의에서 최소국가란 구호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국가가 나서서 자본의 탐욕을 보장하라는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낳은 결과는 '빈부격차의 확대' 뿐만 아니라 '절대적 빈곤화'를 낳고 있다. 세계 전체의 식량생산량은 120억, 정확히 현재 인구의 두 배를 먹여 살릴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은 하루 2달러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 중에서 12억 명은 하루 1달러 이하로 살아가고 있다. 반면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의 신흥부자들은 엄청나게 급증했다. 예전에는 돈이 많은 사람들을 백만장자라고 했지만, 지금은 억만장자가 아니면 부자 축에 끼지도 못한다. 그들은 수십-수백만 평에 달하는 호화저택을 짓고 보잉747기를 자가용 비행기로 가지고 있으며 300-400명에 해당하는 집사들을 고용하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는 '당신이 일한 만큼 가져갈 것이다'고 했다. 그래서 '근면하게 일하라'고 했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는 일한 만큼 가져가는 사회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주의적 가치인 평등이 일할 의욕을 떨어뜨려 생산성의 저하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신자유주의가 한 것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인류 공동의 부를 몰아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로또와 투기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이런 현대자본주의가 낳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통해서 이를 비판했던 맑스의 사상은 오늘날 다시 그의 분석과 비판이 옳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 앞서 '자유보다는 평등의 가치를 강조하던 맑스사상이 21세기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하고 물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시장=자본주의=자유라고 생각하고 계획=사회주의=평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박 교수는 오늘날 평등의 가치를 강조한 맑스사상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하나?

"나는 이런 식으로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분법적 틀로 맑스를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낳은 결과는 자유냐 평등이냐의 문제를 넘어서 존재의 생존뿐만 아니라 존재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의미 자체를 파괴하고 있다.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는 극단적인 테러와 자살,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다툼의 극단화 등 그것은 존재의 상실을 나타나는 현대의 병이다. 하지만 이 병은 그들이 정신적으로 미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그렇게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장의 자유냐 분배의 평등이냐'는 식의 선택은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만들며 오직 먹고 살기 위해 사는 존재, 생존을 위해 사는 동물로 전락시킬 뿐이다. 물론 예전에는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정한 생산능력을 가지게 되면 '생존'이 아니라 '생활'을 위해 사는 것이 인간이다. 인류는 현재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노동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즐기며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자유냐 평등이냐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진정한 자유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자유가 우리에게 오지 않는가'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자본'이다. 왜 모든 개인들이 그것을 누리지 못할까? 그것은 현재의 생산시스템이 특정한 누군가에게 사회적 협력을 통해서 생산한 부를 몰아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부를 인류전체의 자산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겠디. 맑스가 평등을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맑스가 평등에 대해서 특별히 선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부 자체가 사회적 협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맑스는 그런 부가 모든 사람의 협력이 낳은 산물이라면 그 몫을 어느 한 사람이 전유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나누어 가지는 것이 '자기 노동에 대한 몫'이라는 자본주의적 정의 원칙에도 맞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맑스는 평등의 가치 때문에 사회적 소유를 주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맑스가 생각하는 자유와 평등은 이런 소유형태나 분배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의미, 가치와 관련되어 있다. 맑스에게서 자유와 평등은 둘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평등이 없다면 누군가는 더 많은 자유를 가지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유 없는 평등 또한 마찬가지다. 왜냐 하면 자유가 없다면 평등은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차이들과 능력들, 즉 내용과 독특한 질은 사라지고 순전히 추상적인 형식에 맞추어진 양적 평등만이 남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자신이 전공하고 싶은 학문을 선택하나? 그렇지 않다. 그들이 선택하는 기준은 철저하게 돈에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그것은 진정한 평등도 자유도 아니다. 그러나 각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들이 있는 그대로 실현될 수 있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상호 교환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유롭고도 평등한 관계가 될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맑스에게 자유와 평등은 각 개인의 잠재적 가치와 능력을 실현할 수 있는 기본적인 가치이다. 여기서 평등은 각 개인의 독특한 잠재성이 동일하게 평가받는 것이며 자유는 그런 독특한 잠재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 맑스의 생각은 매우 이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맑스의 그런 이상적인 생각이 과연 현실사회에 실현가능한 것으로 보나?

"물론 이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맑스는 과학기술혁명과 사회적 노동의 확장에 의한 생산력 발전을 매우 중요시했으며 자본주의에서 이루어진 생산력 발전에 기대를 걸었다. 그렇다면 현재 인류가 가지고 있는 생산력은 이런 생각을 가능하게 하지 못할 수준일까? 문제는 생산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진 마음이 아닐까? 앞에서 말했듯이 현재 인류는 이미 120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생산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잘 살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결핍'되어 있다. 이전에는 아무 자동차만 있으면 되었지만 지금은 비싸고 고급스러운 자동차를 가지고 싶어 한다. 자동차의 수명은 최소 10년이 넘는다. 하지만 누구 10년 넘게 타나? 거의 없다. 사람들은 그 쓸모 때문에 자동차를 사지 않는다. 자동차는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며 부의 상징이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상품'이 인격을 대체한다. 내가 소유한 것이 곧 나를 표현한다. 사람들은 더 비싸고 귀하고 고급스러운 어떤 것을 추구한다. 그래서 명품 열풍이 일어나고 또 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한다. 가져도 가져도 무언가 항상 부족하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 자원을 무한정하게 소비하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자본주의의 생산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만일 더 이상 그가 가지고 있는 상품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사람들은 과연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기를 쓰면서 일중독에 빠져들까? 물론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노동이 있다. 맑스는 사람들이 노동을 찬양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노동을 자기 실현행위로 보거나 찬양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맑스는 우리가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노동이 있으며 이런 노동을 사회적 필요노동이라고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맑스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찬양한다. 왜냐 하면 기계화-자동화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을 단축시킴으로써 더 많은 시간을 자기 가치 실현과 문화적 향유에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일반적인 통념과 반대로 맑스는 인간의 자기 가치를 실현하면서 삶을 즐길 수 있는 문화적인 사회를 원했다.

 

하지만 현대문명의 거대한 발전은 사회구성원들의 자기 발전과 향유를 위한 것으로 전유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일부 소수가 이런 부를 모두 다 전유하기 때문이다. 현재 실업률이 높고 비정규직을 비롯한 불안정노동이 확산되는 것은 현재의 과학기술혁명이 엄청난 생산력의 발전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과 같은 노동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정리해고를 하고 더 이상의 고용을 하지 않으며 비정규직과 실업을 양산한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만일 노동시간을 단축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고 그 사람들이 더 많은 여가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이런 생산력의 발전을 노동유연화이니 하면서 자본축적의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맑스가 오늘날 더욱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면 바로 이와 같은 과잉인구의 출현과 존재의 상실이 고삐 풀린 자본의 엄청난 증식욕구에 있다는 점이다."

 

-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동구권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는 결국 인간의 수준이나 본성이 아직까지는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사회주의보다는 상호경쟁과 개인의 '각개전투'를 높이 사는 자본주의 체제에 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내가 보기에 동구권 사회주의체제의 붕괴가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실 사회주의권이 몰락한 이후 세계자본주의체제는 그 반대에서 자신을 지탱하는 한 축을 잃어버렸다. 오늘날 세계자본주의체제가 겪고 있는 동요와 위기는 이를 보여준다. 적어도 이전까지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현실사회주의권과의 대립 속에서 자신의 내부적 모순을 봉합해왔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권이 무너지면서 세계자본주의체제는 완전히 자본의 탐욕에 노출되어버렸다. 또한, 현실사회주의권이 무너지면서 전 세계는 이런 자본의 망 속으로 급속히 편입되면서 자신들의 이기와 문화적 충돌, 억눌러왔던 욕망을 분출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어쩌면 임마누엘 월러스틴이 말하고 있듯이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체제의 이행'을 수반하는 근본적인 위기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위기는 역설적이게도 현실사회주의권 몰락이후 급속히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과거 동/서 냉전, 구소련식으로 진영 간의 모순은 동일한 하나의 모델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위기를 관리하는 민족국가 또는 국민국가체제다. 내가 보기에 현실사회주의권이 몰락했던 것은 그런 국민국가체제, 또는 민족국가체제의 대립 시스템에서 현실사회주의권의 국가가 위기관리능력에서 훨씬 뒤쳐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체제가 국가 권력을 형성하고 운영하는 데 있어서 자본이라는 배후의 권력을 근거로 했기 때문에 사회적 위기가 발생했을 때, 국가권력을 대체하는 다양한 방식들, 예를 들어 정권을 교체하거나 국가권력자들을 교체함으로써 직접적으로 국가권력 자체로 향하는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다. 반면 사회주의체제에서는 국가권력만이 유일한 권력이었기 때문에 위기와 갈등이 발생하면 곧바로 국가권력 자체가 공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대의제적 정치권력 시스템이 인류에게 보다 좋은 시스템을 의미하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것은 오늘날 국가권력이 더 이상 주권을 대리하거나 사회전체를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세계화와 정보화는 국민국가의 위기대처능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리고 있다. 지방정부, 사회단체의 역할이 커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카스텔은 이런 국가를 네트워크국가라고 한다. 이제, 그 누구도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환경들을 예측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독점하지 못한다. 이것은 곧 국가권력이라는 총체화된 시스템보다 자발적이고 자기-통치적인 인민들의 권력이 훨씬 더 유연하게 자신을 작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맑스는 자기 통치적인 공동체, 코뮌을 새로운 정치공동체로 생각했다. 그것은 곧 생산-소비의 자율적인 공동체들이 사회전체를 직접적으로 통치하는 권력체다. 맑스는 생산의 사회화를 국유화나 국가의 계획성에 맡겨 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맑스가 문제 삼은 것은 생산의 사회화를 직접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코뮌들의 연합체이자 직접민주주의적 통치체로서 국가를 상정한 것이다. 여기서 계획의 주체도, 사회적 통제의 주체도 각기의 다양한 공동체에 소속된 각 개인이다. 그런데 현실사회주의에서는 이런 계획의 주체가 국가가 되었으며 생산의 소유주체도 국가가 되었다. 예를 들어 구소련에서 인민들의 자율적 통치체이자 연합체인 소비에트는 집행체가 되고 오히려 당이 기획과 통제의 주체가 되었다. 따라서 현실사회주의권은 자본주의에서의 국가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이것은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 관료들이 국가장치를 장악하고 이 속에서 하나의 권력체를 형성하듯이 현실사회주의에서도 기존의 국가장치와 동일한 형태를 반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회와 집행의 통일이라는 맑스의 테제는 현실사회주의에서는 자본주의에서의 국가권력과 정반대의 형태로 재현되었다. 즉, 현실사회주의에서는 당이 의회의 기능을 수행하고 소비에트는 단순히 이것을 집행하는 단위로 전락했다. 따라서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는 맑스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국가장치라는 암초에 부딪혀 무너졌던 것이다.

 

물론 이것에 대해 맑스가 정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맑스 또한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미래사회의 전망을 파리코뮌을 보고나서 정리했다. 맑스가 본 코뮌은 진정한 미래적 형태였다. 여기서 그가 정정한 가장 중요한 생각은 '기존국가의 장악'이 아니라 '기존국가의 파괴와 대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바로 기존의 국가장치가 그 장치에 근거한 지배체제를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인민권력으로서의 자기통치체인 '코뮌'으로 이를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실사회주의는 이것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국가장치에 의한 관료적 통치, 의회와 행정의 분리, 자기통치권력의 해체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자본주의 시장 시스템의 우월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기존 국가장치의 파괴와 대체, 진정한 자기통치권력체로서의 '코뮌'의 건설이다."

덧붙이는 글 | 박영균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교수). 저서: 노동가치(2009), 맑스, 탈현대적 지평을 걷다(2007), 칼 마르크스(2005) 등. 역서: 이데올로기와 문화정체성(2009), 초국적 도시이론(2010) 등. 수상경력: 2008년 일곡유인호학술상 수상


태그:#박영균, #김성수, #복지, #홍준표, #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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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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