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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콤 해고자 시절
 코스콤 해고자 시절
ⓒ 정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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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이 되도록 나는 낯선 사람에게 7년을 근무한 직장 명함을 건넬 때마다 뒤가 구린 것처럼 떳떳하지 못했다. 일종의 위장명함이었기 때문이다. 명함에는 연봉 9천만 원의 대기업 '(주)코스콤 OOOO부 정인열'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소장만 해둔 명함이 또 하나 있었는데 거기는 '(주)아이티네이드 OOOO팀 정인열'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럼 난 '이중취업자'인가? (훗날 해고된 뒤 복직투쟁 할 때 '위장취업자' 소린 들어봤지만) 아니다. 이 회사의 정체를 알기까지는 7년이 걸렸다(그래, 진짜 무식 바보였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니).

아이티네이드는 월급과 4대 보험을 제공하는 코스콤의 하청업체였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나는 코스콤 명함을 사용하고 코스콤에서 일했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밖에서 누굴 만나 내 소개를 해야 한다. 하지만 '코스콤' 명함을 내놓고 초면에 "저 근데 그 회사에서 일하는 건 맞는데요, 월급은 다른 회사에서 나오구요, 저 고액연봉의 대기업 회사원 아니에요.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달마다 카드값 걱정하는 연봉 1700만 원 IT 종사잡니다. 명함만 코스콤 거예요(그러니까 밥값은 그쪽에서 내 주시면 좋겠어요)"라고 구구절절 사연을 말할 수는 없는 거다.

자칭 '20대 커리어우먼'이 그러는 것은 찌질하고 창피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렇다고 아이티네이드라는 회사는 잘 알지 못하니 설명할 수도 없고. 회사의 '정체'를 모르니 정인열이라는 인간의 '정체성'도 모른 채 살 수밖에 없었다.

2007년에 비정규직보호법이 만들어졌다. 회사에서는 정규직 전환은 못해주겠으니 영원한 하청노동자로 살라며, 옆자리 정규직 동료와 나를 2미터 높이의 파티션으로 '계급 분리'했다.

나와 하청업체 소속 동료들은 진짜로 단 한 가지 이유, "너무 너무 열 받아서" 비정규직 노조에 가입했다. 보기와 다르게 은근히 대중친화적(?)이지 않은 성격을 지닌 나는 노동조합에 가입하면 단체활동을 해야 하는 점이 싫어서 끝까지 안 하려고 했다. 그런데 하다보니 2년이나 파업이 계속되었고 다양한 투쟁들을 하게 되었다. 사무실에서 노조 조끼 입고 일하기부터(이것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로비 점거, 삼보일배, 고공농성 등.

아빠가 물려준 '식탐' 유전자를 이긴 단식투쟁

코스콤 해고자 시절
 코스콤 해고자 시절
ⓒ 정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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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 중 하나는 밥을 굶는 것이었다. 단식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는 동지(비정규직 노조의 동료 조합원들)를 지키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가진 거라곤 몸뚱이뿐인 비정규직 노동자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나. 덩치 큰 용역들처럼 싸움질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돈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한번 회사와 싸움을 시작한 이상 그냥 접을 수는 없다. 시간은 흘러가고, 돈은 없어지고, 조합원 가족들은 생계 파탄으로 피가 말라간다. 그러면 슬며시 회사의 회유를 못 이기고 하청업체로 업무 복귀하는 조합원이 여럿 생기고, 회사한테 무릎이라도 꿇어 빌고 그만두자는 소리도 나온다. 시간은 계속 가는데, 노동조합은 조금씩 흔들리지, 또 언론에는 우리가 잊혀질까 두렵다. 그래서 선택한 단식이었다.

2008년 겨울, 단식을 시작한 뒤 무척 힘들 줄 알았는데 뜻밖에 그다지 배고프지도 않았고 버틸 만했다. 내 식탐은 우리 아빠에게 물려받은 '우월한' 유전자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평생 동안 다이어트한다고 굶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운동을 하라면 운동을 했지 절대 먹는 걸 포기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심심하면 인터넷으로 맛집 정보를 잔뜩 수집해서 찾아다니는 게 내 취미였다.

그때 난 22일 동안 단식을 했는데 아마 더 하라고 했으면 열흘은 더 할 수 있었을 정도로 별로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굉장히 즐겁게 했다. 식탐 유전자까지 거뜬히 이겨낸 원동력이 뭐였을까? 나 혼자만 유독 정의로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바로 조합원 동지들이었다. 그 동지들은 내가 단식을 이어갈 수 있게 열심히 밥을 먹으면서(!) 나를 뒷받침해줬다.

8미터 높이의 망루에 올라가서 단식을 하고 있었는데, 추울까봐 열심히 바람막이 비닐을 쳐주고 심심할까봐 밤새서 노트북에 온갖 영화를 다운로드받아주고 인터넷 선도 깔아줬다. 호화로운 전기 옥장판도 깔아줘서 춥지 않게 지냈다. 밤사이 내 몸에 무슨 이상이 생길까봐 한 명씩 '하루 단식'을 하면서 망루 제일 꼭대기에서 돌아가며 잤다.

그뿐인가. 매일 내가 있는 망루에 올라와서 활짝 웃으며 "힘들지도 않냐? 빨리 시집이나 가라"며 그네들 방식으로 정을 표현해주었다. 안마도 해주고, 책도 선물해주고, 하루씩 함께 단식도 했다. 화장실을 갈 수 없어 마련해둔 요강에 가득 찬 오줌을 매일 비워주고 온갖 뒤처리를 해준 이도 있었다(이 사람들의 존재는 언론에 단 한 번도 알려진 적이 없다).

지금도 '밥줄'을 지키기 위해 밥을 굶는 노동자들...

코스콤 해고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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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우리 모두의 밥줄을 보장받기 위해 굶기 시작한 밥이었다. 하지만 굶고 있어도 밥심보다 내게 더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동지들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22일의 단식은 바깥으로는 연대의 힘을 모으고 안으로는 조직을 다시 정비하는 효과를 낳았다. 그리고 그런 노력들이 모여서 지금은 조합원의 대다수가 결국 코스콤에서 밥 먹으며 일하고 있다.

만약 그때 단식 투쟁을 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난 자존감 없이 그저 '내가 무능해서 못나게 산다'며 책망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외모'라도 꿀리지 말아야겠다며 하루 두 시간씩 런닝머신 위를 뛰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내가 비정규직임을 선언하고 밥을 끊으며 싸움을 시작한 그날부터 행복했다.

지금 한진중공업 해고자 신동순씨가, 김진숙 지도위원이 올라가 있는 85호 크레인에서 단식을 한 지 보름이 넘었다. 보름째 굶으면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하고 부쩍 힘이 들기 시작한다. 누구의 밥줄을 위해 신동순씨는 밥을 굶고 있고 김진숙 지도위원은 고공농성을 하고 있을까.

투쟁은 대안이 아니라며, 공장 안의 노동자들마저 "김진숙 내려오고 희망버스도 그만 하라"고 한다는 언론 기사들을 보면 정말 원망스럽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 밥줄이 지켜지고 있는 건데, 내 가족과 친구가 더 좋은 밥을 먹을 수 있는 건데, 고맙다고 엎드려 절해도 부족할 판인데, 그만 하라니.

어쨌거나 다른 조합원들과는 달리 나는 코스콤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많이 아쉽지만 파업 때 맺은 월간 <작은책> 안건모 편집장님과의 인연 덕분에 지금은 <작은책>에서 일하고 있다. 코스콤을 나오며 꼭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는데 꿈이 현실로 되니 무척 기쁘다. 여기서는 항상 노동계 소식을 접하고 취재할 수도 있고, 집회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별받지 않는 정규직 신분이 되었다. 이제는 떳떳하게 명함을 내밀 수 있고, "밥값 좀 내주세요"라고 끙끙 앓는 소리 하지 않아도 된다. 하하.

덧붙이는 글 | 정인열 기자는 사무금융연맹 증권노조 코스콤비정규지부 전 부지부장입니다.



태그:#비정규직, #김진숙, #작은책, #정인열, #코스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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