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그는 막 마치고 온 교육의 첫마디가 "재미없으면 다 주무세요"였다고 했다. 일자리 중심의 노인복지관인 부천 시니어클럽의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노동법 강의였다. 그만큼 안 주무시게 할 자신이 있다는 말일 터. 그 비법이 궁금했다.

그와 마주앉은 한국노총 부천지역지부(이하 부천노총) 사무실은 부천시근로자종합복지관 1층에 위치해 있다. 부천노총이 부천시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는 복지관이다. 이 복지관의 관장이자 부천노총의 대표인 김준영(44) 부천노총 의장을 지난 7월 21일 만났다. '전국 최초 노사정협의회 구성', '전국 최초 노사공동직업훈련 진행' 등 부천이 지역의 노사정 공동사업의 모델로 자주 거론되는 비결은 더 알고 싶었다.

김준영 한국노총 부천지역지부 의장. 부천지역지부는 2007년 한국노총 최우수 지역지부로 선정됐다.
 김준영 한국노총 부천지역지부 의장. 부천지역지부는 2007년 한국노총 최우수 지역지부로 선정됐다.
ⓒ 노동세상

관련사진보기


- 노인 대상 교육에 자신감을 내비치는 비법을 전수해 달라.
"옛날 얘기를 하는 거죠. 예를 들어 '어르신들, 예전에 직장 다니실 때 퇴사하면 퇴직금하고 월급을 3개월 있다가 받으셨죠?'라고 물으면 다 맞다고 합니다. 지금도 월급은 3개월 안에만 주면 된다는 생각들이 많고요. 그런데 '14일입니다' 그러면 '아, 그렇구나' 하며 놀라죠. 그런데 노동법 조항에 뭐가 있다는 건 교육 뒤에 짧게만 얘기해요. 다들 직장에 다녔던 경험들이 있으니까 질문이 많죠. 오늘도 중국교포가 질문하는데 들어보니까 월급을 조금 깔고 주고, 갑근세를 매달 크게 뗐더군요. 그걸 국가에 냈는지 어땠는지도 모르고…. 쉬는 시간까지 그런 상담이 이어집니다.

사실 교육 앞에는 주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더 많이 해요. '노동조합 예쁘게 봐주세요. 노동조합이 만날 싸우는 것만 아니고 복지관의 이런 사업들도 합니다' 하면서 노조 얘기를 많이 하죠."

- 노총에서 복지관을 위탁운영하고 있는데 다른 복지관과 차별점이 있다면….
"복지관 실태조사가 된 게 하나도 없어서 4~5년 전에 전국의 복지관을 돌아본 적이 있습니다. 복지관들은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노동단체 사무공간과 임대를 주사업으로 하거나 전액 시비에 의존해서 운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땐 1년 사업계획을 세운 대로만 사업을 해야 돼서 탄력성이 떨어집니다.

반면 우리 복지관은 최소한의 유지비를 시비로 지원 받고 나머지는 여러 방식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초기엔 '문화센터가 노동조합이 시민들과 만나는 길이야' 하면서 다양한 문화강좌들을 했는데 문화센터는 백화점에서도 하잖아요. 그것만 우리 정체성에 맞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뭘까. 고민한 결과가 '직업훈련'이죠. 몇 년 전부터 노동부의 사회적 일자리 등 다양한 외부 프로젝트를 따내서 직업훈련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 복지관 같은 모델이 전무한 건 아니고, 조금 앞서서 이런 고민들을 사업에 반영해왔죠."

- 직업훈련 관련 어떤 사업들을 진행해 왔는지.
"고령자들에게 취업을 알선하는 고령자인재은행, 취업을 원하지만 장기적으로 취업을 못하고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상담과 교육, 직업훈련 등을 통해 취업할 수 있도록 1년 동안 지원하는 취업성공패키지 사업 등을 했습니다. 최근 경찰청에서 위탁받아 경비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보수교육도 하고 있죠."

- 그런 사업들이 가능했던 배경은?
"부천노총이 2004년부터 무료취업센터를 운영해 왔어요. 처음엔 제조업 등 파견 제외 업종에 불법파견이 늘어나는 걸 막아보자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와 함께 인터넷 검색 등으로 구직활동을 못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취업알선을 해보자고 했죠. 그러다보니 고령자인재은행 등이 우리와 맞았고요

처음엔 노총이란 얘기는 다 빼고, 근로자종합복지관도 작게 쓰고 무료취업센터만 크게 해서 홍보물을 뿌렸어요. 이후 교육 개강식이나 수료식에서 제가 인사할 때 '이건 노총이 하는 겁니다'라고 얘기했죠. 그러면서 '여러분들, 여기 와서 교육받고 서비스 받으시는 건 여러분의 권리입니다. 이 복지관은 여러분이 내는 세금으로 지어졌고 운영되는 곳입니다. 여기가 부족하면 더 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십시오'라고 강조합니다. 노총을 앞세우지 않다보니 취업센터 이용자들에게 부담 없이 다가갔던 거죠."

"왜 싸움은 우리가 하면서 우리는 관계기관 대책위의 대상밖에 될 수 없나"

"한국노총에 있으면서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었다"
 "한국노총에 있으면서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었다"
ⓒ 노동세상

관련사진보기


- 부천지역이 노사정 사업의 모범으로 꼽히는 이유가 있다면….
"부천은 노사정 사업이 벌써 12년째인데, 그 전에 이미 1992년에 노사공익협의회를 만들었던 경험이 있어요. 노사문제가 발생하면 관계기관 대책위가 꾸려지죠. 그런데 싸움은 우리가 하는데 우리는 대책위에서 어떤 결정이 나올지 늘 궁금해 하는 관리대상이잖아요. 거기에 준하는 권위를 가진 회의체가 있다면 좋겠다, 싶었죠.

노사공익협의회에서 '이 사업장의 파업은 노동조합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기보다는 사용자의 대응이 조금 무리했다' 정도의 평가만 해주더라도 공권력 투입 등이 상당히 부담스러울 것 아니에요. 내심은 그런 것들을 먼저 제안해서 선점해 보자는 거였죠. 그런데 외부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지역적 권위가 잘 만들어지지 않더군요. 정치인, 변호사 등도 결합시켜봤지만 성공은 못했고 그런 아이디어를 냈다는 데 의미를 둬요.

본격적으로 지역 노사정협의회를 추진한 건 97년입니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 중앙 노사정위원회를 논의하던 때죠. 그때도 '산업평화' 같은 문구가 협약 위쪽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4,5년 지역 노사정협의회를 하면서 산업평화, 분쟁조절의 한계를 절감하죠. 조절이 잘 안돼요. 그렇다고 노사정이 서로가 부담스럽다고 편한 이야기만 하는 공간이 될 거면 할 의미가 없어지죠. 김대중 정부 초기에 민주노총도 '들러리다' 하면서 노사정위에서 떨어져나갔잖아요. 그렇지 않을 수 있는 방안, 공동의 사업거리를 찾다보니 직업훈련 등 고용 관련 사업으로  간 거죠."

- 노사공동직업훈련은 어떤 식으로 진행했나?
"초기에는 노동조합이 있는 회사의 노조 간부들을 끄집어냈죠. 부천노총이 가능했던 이유는 부서장회의라는 좋은 전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위사업장 대표자들은 물론 각 부서장들도 매달 모여서 회의를 해요. 그 중 하루를 빼서 노동조합 간부가 아니라 회사의 훈련위원으로 훈련을 받는 겁니다. 프리젠테이션을 직접 제작하는 훈련, 교육 수요조사를 하기 위해 설문조사 문항을 만드는 기법, 발표 교육 등 간부들이 기존에 받지 않았던 교육을 '빡세게' 했죠. 그 덕에 원성도 자자하고…. 그렇게 훈련받은 분들이 자기 현장에서 직접 설문조사를 해 필요한 교육을 설계하고, 회사랑 교육시간 등을 협의하면 저희가 강사들을 섭외해주는 식으로 하죠.

예를 들면, 신한일전기라는 사업장은 일본 바이어들이 많이 와서 현장에 있는 분들이 일본어로 인사말 정도는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해요. 그러면 교육받는 분들은 아침에 30분 일찍 출근하고 현장투입을 30분 정도 늦춰서 일본어교육을 받는 거죠. 택시 같은 경우는 교통법규 관련한 소양교육과 함께 간단한 정비교육도 했고, 몸을 많이 쓰는 데는 근골격계 예방교육도 했죠. 또, 부천은 공원만 청소하는 미화원이 따로 있는데 그분들이 청소뿐 아니라 나무도 깎고 약도 쳐요. 그래서 수목관리 자격증반을 운영했죠. 평균연령이 50살 이상이었는데 실기까지 합격률이 40%가 넘었어요. 합격한 분들은 자격증 수당도 받게 되고…."

- 노사공동사업의 한계와 성과를 짚어본다면?
"올해가 6년째인데 2년 전부터는 노동조합이 없는 데도 훈련위원을 발굴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쉽지가 않아요. 부천이 8000개가 넘는 사업장 중 50인 미만인 곳이 98.5%입니다. 그런 데서 한 사람을 한 달에 한 번씩 회의에 내보내고 교육받게 하고, 또 그가 잡아온 교육을 수행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훈련위원이 '사장님, 우리도 이런 교육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 사장은 '몇 시간인데?' 물을 테고, '두 시간이요' 하면 바로 '그럼 작업은?'이라고 나오니까요. 훈련위원도 인사이동, 퇴사 등으로 자주 바뀌고요.

그래도 성과라면 이젠 상공회의소를 통해 우리 회사에 이런 교육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들어온다는 겁니다. 처음엔 상공회의소도 노조가 나서서 직업훈련을 하겠다니까 취지에 동의하면서도 노조사업 아닌가 하는 우려를 했을 텐데 그걸 불식시키는 선까진 간 거죠. 지금은 초기만큼 사업을 크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부천에만 직업훈련기관이 150개가 있어요. 노사공동사업으로 그 150개 기관의 모든 교육내용을 모은 홈페이지를 만들어놨어요. 훈련을 받겠다는 사람과 훈련을 계획하는 기관들들 연결시켜주는 중개, 허브역할에 더 집중을 하려고 합니다."

만약 부천에서 쌍용차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 노동조합 현안도 많은데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라는 내부 불만도 있었을 것 같다.
"노조 간부 입장에선 자기 상근시간을 빼서 해야 할 부가적인 일이 늘어나는 거니까 초기엔 '사업이 너무 많다, 힘들다'는 얘기도 있었죠. 그런데 저는 장기적으로 노동조합이 직업훈련의 중심에 서 있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부천에서 쌍용차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하면 어떻게 됐을까. 외국 사례를 보면 지역에서 펀드를 조성하고, 지역의 공적인 자금으로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의 훈련도 시키고, 또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무한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들이 있죠. 그걸 우리가 미리 준비하면 우리 사업이 되는 거잖아요. 그 중심에 노동조합이 설 수 있는 기회고, 장기적인 그림을 그린다면 당연히 노동조합이 그걸 준비해야죠.

명분도 있어요. 부천에 있던 많은 제조업 사업장들이 지방으로 이전했는데 여태 버티는 기업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면 시골로 가면 인력수급이 어렵다는 겁니다. 낮은 수준이지만 부천에 인력풀이 있다는 뜻이죠. 그 관점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뭐냐. 사람을 길러내는 거다. 부천에서 누구도 이에 대해 반대하거나 거부하지 못합니다. 그 이상의 대안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김 의장의 발언 곳곳에 부천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긴다. 그렇다고 그의 고향이 경기도 부천은 아니다. 경북 영주다. 중원에서 일해 보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91년, 부천으로 올라왔다. '부천지역금속노조'가 그의 첫 일터였다.

"처음 목표는 현장에 들어가는 거였는데 당시 정서가 현장에 있던 선배들도 가능성이 있는 곳 빼고는 다 나와서 지역의 단체나 노조에서 상근하면서 자기 역량을 발휘하자는 거였습니다. 저도 현장에 들어갈 때까지 지역노조에서 일을 배우자고 했는데 그냥 눌러앉게 됐죠."

한 현장에 있지는 못했지만 대신 그는 많은 현장을 경험했다. 문화차장이란 직함을 내밀면서 만날 담당 분회로 밥 먹으러 갔다. 그러면서 친한 조합원과 조합 간부가 생겼다. 바로 또래모임도 만들었다.

"어느 분회를 가나 제 친구가 간부나 조합원으로 섞여 있으니까 조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알게 돼요. 여성사업장은 싸움이 잦은데 오늘은 누구랑 누가 싸워서 지금 누가 삐쳐 있다는 얘기까지 듣고 살았죠."

지역노조 조합원 수는 300여 명이었는데 상근자가 열 명이 넘었다. 탁구반, 사이클반, 낚시반, 공부하는 반 등의 각종 동아리에 또래모임도 여러 개를 만들었다. 조합원들이 여러 모임에 엮여 있다 보니 단사의 문제들이 어렵지 않게 풀렸다.

먹고 살기 위해 그는 날일도 나가고, 용접도 하고, 우유배달, 신문배달도 했다.

"여러 일도 하면서 상담 오신 분들과 짧은 시간 내에 신뢰관계를 쌓고 그게 조합이 되도록 하는 훈련을 한 거죠."

노조를 만들고, 싸우고, 깨지는 것을 계속 경험하면서 그는 부천지역에서 20년 동안 노동운동을 해왔다.

- 부천지역 금속노동조합이 이후 부천지역 중소기업노동조합으로 이름을 바꾼 계기는?
"청계피복노조가 전국 최초의 업종별 지역노조였다면, 부천지역 금속노조는 전국 최초의 산별노조였습니다. 초기 선배님들의 헌신과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여파로 제가 들어갔던 91년까지 일정정도 성과들을 내다가 작은 사업장들의 조직률이 떨어지는 것과 궤를 같이하면서 조직이 줄어들죠.

지역노조의 강점이 있어서 저긴 떨어지더라도 우린 살아남았다면 우리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걸 극복할 정도의 조직력은 못 됐죠. 이후 서울지역여성노조가 산별 구분까지 깨뜨린 최초 노조로 신고필증을 받는 것을 보고 저희도 바로 규약을 변경했습니다. 금속을 넘어서 모든 업종을 포괄하는 걸로 바꿔서 부천지역 중소기업노조가 됐습니다. 일반노조의 틀을 제시한 거죠."

고생해서 만든 노조, 위원장이 야반도주할 때 배신감에 힘들어

- 작은 사업장들을 두루 포괄하는 지역노조 활동을 하면서 어려운 점도 많았을 텐데….
"지역노조가 사장 입장에선 굉장히 황당할 수 있습니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노조 사무장이라고 와서 교섭을 하니까요. 그런데 제 입장에서도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과 조직을 만들어서 교섭에 들어가는 게 쉽진 않아요. 교대사업장인 경우엔 조합원들 만나기 위해 새벽, 점심 교대시간마다 가고, 아예 회사에 하루종일 살면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죠. 이렇게 해서 조직을 확대하고 교섭틀을 만들어서 성과를 내기 직전인데 위원장님이 야반도주를 하면…. 처음엔 그 배신감이 엄청났죠. 나중엔 여러 번 겪다보니 나아지더군요. 또 도망간 분이 가면 얼마나 가겠어요. 이후에 만나게 되고, 그때 사정얘기 들으면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이해도 했지만 처음엔 정말 힘들었죠.

사실 더 힘든 건 저를 믿고 사람들이 열심히 싸우는 경우입니다. 생판 모르는 놈이 상담 와서 '조직을 만듭시다' 했다고, 그 말 믿고 정말 노조 만들어서 열심히 싸웠는데 답도 안 나오고 다 해고 되고…. 이런 시간이 더 견디기 힘들죠. 우리 지역노조 역사상 가장 컸던, 200명이 넘는 지회가 있었어요. 투쟁 중에 70여명이 해고되고 기숙사도 폐쇄됐죠. 최대한 친구 집에 갈 사람 추리고 남은 사람이 40여 명이었어요. 지역노조 사무실을 방으로 개조해서 몇 달을 먹고 자고 했죠. 그렇게 되면 저 같은 상근자도 거의 집에 안 들어가고 같이 먹고 자죠. 홍보물 돌리러 가면 그분들이 10장 돌릴 때 저는 100장 돌리기도 하는데 싸움이 너무 힘드니까 조합원들의 불만이 저한테로 오기도 합니다. 맨정신에선 못하고 술 한 잔 들어가면…. 그럴 때도 많이 힘들죠.

그런 과정을 만들면 안 되지만 지금은 그런 의지 있는 사람을 찾아내기도 어렸습니다. 요즘은 조합 상담을 하면 사람들이 '저희가 노동조합을 만들면 의장님이 책임지실래요?'라고 물어요. 그러면 답변을 못하죠. 제가 여태까지 싸우면서 책임졌던 적이 별로 없거든요. 더 열심히 싸우기만 했지. 그래서 똑같이 대답합니다. '여러분보다 제가 더 열심히 싸우겠다. 그건 진짜 약속 드린다'고. 그런데 제 약속 믿고 조합을 하는 사람이 지금은 잘 안 나온다는 어려움이 있죠."

- 20여 년 한국노총에서 일해 온 것에 만족하나.
"예전에는 제가 한국노총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네가 왜 한국노총 같은 어용에서 일을 하냐? 전노협(민주노총)에 가지'라고 묻는 친구들도 있었죠. 그래도 한국노총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거나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할 때까지도 제가 절차적 흠결을 제기하긴 했지만 어쨌든 한국노총 최초로 전 조합원 투표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아쉽지만 넘어갈 수 있었죠. 그런데 지난번 노사정 합의는 정말 아니었던 것 같아요. 창피한 일이지만 장석춘 전 위원장 앞에서 제가 울면서 말리기도 했어요. 한국노총에 4번씩 찾아가 항의하기도 하고…. 그때 제 삶에 대한 위기감이 좀 오긴 했는데 한국노총에 남아서 더 열심히 '이런 목소리도 있다'는 걸 알려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국노총에서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었다"

- '왜 한국노총에서 일하냐'란 질문에 뭐라고 대답했나?
"어떤 때는 '나는 한국노총에 있으면서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는데 너는 네가 있는 자리에서 다 할 수 있어? 아니지?'라고 역질문을 하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로 회원조직을 갖춰놓고 대중조직으로서 의견을 모아내는 과정을 훈련할 수 있는 데가 있으면 손 꼽아봐. 진짜 대중운동을 배우는 데는 한국노총일 걸'이라고 자부심을 내비쳤죠. 저는 한국노총에서 좋은 선배들을 만나서 정말 행복하게 운동했으니까요."

- 지난해 11월 선거를 통해 3선에 성공했다. 다시 부천노총 의장을 결심하면서 했던 고민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조직의 리더십이 가끔 바뀔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논리를 격하게 따지고 시스템을 잘 구축해 놓지 않는 걸 못 견뎌하는 성격이거든요. 처음에 부천노총 의장에 당선되고 처음 한 일이 모든 업무를 전산화한 거였습니다. 복지관 회원현황, 회계관리, 공문 발송·수신 등을 모두 온라인결재가 가능하도록 했죠. 지방 출장 가서도 결재를 하니까 업무 펑크가 덜 나요. 그런 리더십으로 계속 가면 같이 일하는 분들이 힘들죠. 그럼에도 지금까지 해왔던 사업들이 안착하는 과정엔 제안한 사람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다시 의장을 결심했습니다."

- 마지막으로 앞으로 어떤 노동운동을 하고 싶나?
"꿈일 수도 있겠지만 지역내에서 지역적 교섭이 가능한가를 끊임없이 타진해보려고 합니다. 한국노총이 지역에 있는 국회의원을 압박하라는 지침을 내리면 그걸 누가 하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산별 위원장이 와서 만나달라고 해도 안 만나줄 수도 있죠. 만날 필요성을 못 느끼니까요. 그런데 지역지부 의장들은 조금 달라요. 그런 영향력이 지역에서 공식적 교섭의 틀로 나타나는 게 바로 노사정협의회고, 그게 제도적으로 뒷받침되면 지역적 교섭이 되는 거죠.

지금 부천시 노사민정협의회 조례에서 노사민정협의회 역할의 1번이 '지역의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단위'라고 돼 있습니다. 조례에서 규정한 부천시 경제정책을 정해야 하는데 우리는 준비가 돼 있나, 상공회의소는 어떤지, 시 정부는 우리와 같이 논의할 마음은 있는지…. 사실은 아직 다 준비가 안 되어 있죠. 그걸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부천 노사민정이 합의한 건 공익적 결정이다, 충분히 토론하고 미래를 생각해서 논의한 거니까 특별한 문제만 없다면 의회도 그 부분은 존중하자'는 정서를 만든다면 좋겠죠.

조금 더 욕심을 내면 부천 상공회의소와 부천노총이 연구진을 갖는 겁니다. 그런 연구집단이 있어서 상공회의소 회장과 제가 논의하기 전에 상공회의소 연구소와 부천노총 연구소가 엄청난 논쟁을 하고, 최종적인 결정은 당시 여건에 맞게 시정부랑 협의하는 거죠.
큰 꿈이죠. 노총 조합원이나 상공회의소 소속 기업들뿐 아니라 부천 지역에 있는 모든 사용자와 노동자에게 미치는 결정을 내리는 지역적 교섭을 하는 꿈.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김준영 의장은 또 다른 교육 비법을 알려줬다. 예전엔 말을 많이 했는데 요즘은 동영상을 많이 본단다. 동영상도 진화됐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전태일 열사의 삶을 다룬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장면들을 잘라서 보여주다가 요즘은 드라마를 본다.

"누구 때문에 가난한 거 아니잖아요? 지가 모자라서 궁상떨고 살면서…. 평생 남탓만 하면서 징징대는 거… 수치스럽지 않나?" 그가 드라마로 교육해야 겠다고 마음먹게 한 드라마 <남자이야기>의 대사다. 이 장면을 보여주고 "가난이 개인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분 손 들어 보세요" 하면 어떤 곳에서는 절반이 넘게 손을 들기도 한다고. 처음엔 그렇게 손을 들었던 사람들도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이 했던 "(사장 김주원의 엄마인) 문분홍 여사도 노조는 무시 못해" 정도까지 가면 노동조합이 하는 일을 조금씩 이해한다고.

요즘은 강의 끝부분에 꼭 보편적 복지를 꺼낸단다. 노동조합의 결정이 소속 조합원을 넘어 모든 노동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길엔 복지를 통한 사회적 임금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공장 담벼락을 넘어 전체 국민으로 향하는 노동운동을 꿈꾸는 김준영 의장은 복지관이 문을 닫는 밤 11시까지 일하는 날이 많다면서 저녁밥을 먹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덧붙이는 글 | 월간 <노동세상> 8월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김준영, #한국노총 부천지역지부
댓글

노동자의 눈으로 본 세상, 그 속엔 새로운 미래가 담깁니다. 월간 <노동세상>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