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일생의 업으로 삼고 살아왔지만, 얼마 전만 해도 미국은 내게 그다지 매력적인 나라는 아니었다. 하지만, 필연인지 우연인지 몰라도 연수로 인해 올여름 한 달 동안 미국에 머무르게 되었다. 난생처음 밟게 된 미국 땅. 우리나라와 얽히고설킨 역사적, 정치적 고리를 모두 배제하고 그저 평범한 시각으로 나는 미국을 바라보기로 했다. 어쨌든 편견은 사물을 제대로 보는 눈을 흐려 놓기가 일쑤이니까 말이다.
지난달 20일, 일행과 함께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산타모니카 피어(The Santa Monica Pier)를 찾았다. 산타모니카는 로스앤젤레스 중심가에서 남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휴양 도시인데, 바다 쪽으로 나무 교각이 세워져 있는 산타모니카 피어에는 이날 구경 나온 관광객들로 몹시 북적였다.
진정한 낭만과 자유가 느껴지던 산타모니카 피어에는 여기저기 길거리 공연이 펼쳐졌다. 한쪽에서 젊은 흑인 여자가 조그마한 탁자 위에 콤팩트디스크를 몇 장 쌓아 두고 현란한 춤을 추며 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도, 구경꾼도 콤팩트디스크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녀 앞에 놓인 통 하나가 일순간 눈에 들어왔다. "팁 주세요(Tip me)"라는 글이 쓰여 있다. 아마 이 통에 얼마간의 팁을 주저 없이 넣은 사람은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잠시 동안 행복했을 것이다.
산타모니카 피어에서는 그녀처럼 길거리 공연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외로이 바이올린을 켜는 아저씨가 있는가 하면, 감미로운 노랫소리로 감동을 주는 수준급 무명 가수들도 있다. 물론 생계를 위해 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고, 바이올린을 켜기도 하겠지만, 그들에게서 진정 예술을 사랑하는 순수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던 건 단지 산타모니카의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길거리 화가들, 점쟁이 여자, 낚시하는 사람들,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사람, 빙글빙글 놀이기구를 타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며 함께하는 곳. 자신의 시간에 충실한 그들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내 삶도 들여다보게 되는 곳이 산타모니카 피어다. 한 일행이 신청한 빌리 조엘(Billy Joel)의 피아노맨(Piano Man)이 멀리멀리 울려 퍼지는 이곳 나무 계단에 앉아 나는 모처럼 시간의 여유를 맛보며 한껏 낭만에 젖어 있었다.
산타모니카는 시카고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거의 4000km에 이르는 미국의 역사적인 66번 도로(Route 66)가 끝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66번 도로는 제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인들에게 인기 있었던 관광 도로로 모텔, 기념품 가게와 햄버거 가게 등도 이 길 따라 들어서게 되었다.
장거리 자동차 여행(Road Trip)이 붐을 일으키면서 미국인의 꿈과 자유를 상징했던 이 도로는 지금까지도 "어머니의 길(Mother Road)"이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미국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도로들이 건설되어 오늘날 66번 도로는 더 이상 미국의 공식적인 고속도로는 아니다. 그렇지만, 책, TV 쇼, 노래와 영화 속에서 여전히 미국인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추억의 도로이다.
한참 후 우리 일행은 산타모니카 해변으로 내려갔다. 사실 미국이 나를 놀라게 한 것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게 크다는 거다. 땅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광활하고, 하늘도 엄청 넓고, 사람도 무지 크다. 갈매기 역시 덩치가 컸다. 몸집 좋은 갈매기들이 모래 사장을 걸어다니는 모습을 상상조차 못했는데, 사람들 틈새로 자연스럽게 걸어다니는 갈매기들을 보고 처음에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사람, 갈매기, 자연이 어우러진 산타모니카 해변의 풍경은 내게 마음의 평화를 안겨 주었다. 파도가 모래 사장으로 밀려올 때면, 깔끔 떠는 여자처럼 쪼르르 달아나는 어린 갈매기를 가까이서 쳐다보는 즐거움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곳을 다시 찾아갈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어 가는 산타모니카 해변, 그리고 낭만, 자유가 느껴지던 산타모니카 피어의 추억은 내 삶을 더욱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