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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산 책문을 지나 요동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산.
▲ 봉황산 책문을 지나 요동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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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명나라로 가는 사신의 신분은 조선 사회에서 정승급 이상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지만 연도의 백성들은 조선 사신을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 정도로 보았다. 더구나 여자를 태운 가마라도 있으면 눈 꼬리를 치켜 올리며 벌레 보듯 했다. 여자를 공녀로 바치는 쓸개 없는 나라의 주구들이라는 것이다.

실 예로 한확의 누이는 명나라에 공녀(貢女)로 바쳐졌다. 건국 초기, 개국공신 정도전이 '요동정벌론'을 내세웠다. 원나라의 패잔병과 북방에서 통일전쟁에 여념이 없는 명나라의 허점을 노려 우리 민족의 고토 요동을 점령하자는 것이었다. 명분은 좋았으나 신생국 조선으로서는 힘에 부치는 방안이었고 '대국을 거스를 수 없어 회군한다'고 천명한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의 변(辯)과도 배치되는 정책이었다.

압록강 너머 요동을 침공하려면 군사를 모아야 하니 왕자들은 솔선해서 사병(私兵)을 혁파하라고 요구했다. 막강 사병을 양성하여 위협세력으로 부상한 이방원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발언이었으나, 명나라는 발끈했다. '감히 대국을?' 괘씸죄를 걸었다.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것이다.

봉황산 사신이 노숙했던 곳이다
▲ 봉황산 사신이 노숙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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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씸죄에 걸린 정도전-진퇴양난에 빠진 이성계...횡재한 한확

자신의 오른팔 정도전을 내줄 수 없는 이성계는 곤경에 처했다.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공물을 보내 환심을 사보려 했으나 명나라는 냉담했다. 조선의 약점을 거머쥔 명나라는 조선이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를 내걸었다. '군량미를 보내라.' '전쟁 물자를 보내라.' '말을 보내라' 등 자꾸만 그 물목이 늘어났다. 그 중 제주에서 개량한 몽고산 말은 명나라가 가장 탐내는 군수물자였다.

조선은 성의를 다하여 보내주었다. 헌데, 물자에 맛을 들인 명나라가 이제는 사람을 보내라는 것이다. 환관과 공녀다. 어린 사내아이를 거세해서 보내주고 처첩 소생 여자를 보내주었다. 처음에는 인물만 좋으면 아무 여자나 받아주었으나 점차 '천한 계집이 아니라 사대부가의 규수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조정의 정승판서들은 모두 꽁무니를 뺐다. 종친부의 세력가들도 강 건너 불 보듯 했다. 곱게 기른 딸을 황제의 색(色)받이로 보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명나라의 엄포에 별볼일 없는 선비 한확의 누이가 선발되었다. 집안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형제자매는 대성통곡했다. 죽음의 길로 보내는 것처럼 슬퍼했다.

여자의 미모는 자산이라 했던가? 한 미모 하는 누이는 북경에 도착하여 영락제의 눈에 꽂혔다. 주체의 총애를 받은 누이는 후궁이 되었다. 여비(麗妃)다. 그 누이 덕에 한확은 명나라로부터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한확은 그 위세로 승승장구 했다. 세종 때는 승습사가 되어 조선의 대명(對明) 창구가 되었다. 가문의 재앙이 횡재가 된 것이다.

영락제가 죽고 그의 아들 주고치가 황위에 올랐으나 1년 만에 단명했다. 주첨기가 황위에 올라 조선 산(産) 처자를 요구했다. 물이 좋다는 것이다. 이에 한확은 또 누이를 바쳐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다. 자매의 빼어난 용모는 가문의 영광이었다.

사하보 사신을 위한 객사 사하관이 있던 곳이다. 심양 남쪽에 있다.
▲ 사하보 사신을 위한 객사 사하관이 있던 곳이다. 심양 남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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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산을 지났으나 사신 숙소가 있는 요동성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숙영지를 찾아야 한다. 50여 명이 밥을 지어먹고 잠을 자야 하니 물은 필수다. 자리 잡는 것이 급선무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사신단에는 경험자가 많다. 수시로 떠나는 사신단의 요동까지 호송은 조선 군관이 맡았다. 그들은 길목의 숙영지를 훤히 알고 있었다. 자리를 잡은 노복들이 짐 보따리를 풀고 장막을 쳤다. 찬바람을 막아 숙소로 쓰기 위함이다.

낫과 도끼를 들고 산에 들어간 노복들이 나무를 찍어와 모닥불을 피웠다. 한번 지핀 모닥불은 일행이 떠날 때까지 꺼뜨려서는 안 된다. 일몰과 함께 스며드는 냉기를 차단하기 위한 보온 효과도 있지만 불빛을 밝혀 맹수들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가마솥을 걸고 밥 짓기에 분주하다. 식사를 마친 일행은 노독에 빠져 깊은 잠에 떨어졌다.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인들은 어디 갔나?

수양도 자리에 누웠다. 허나, 잠이 오지 않는다. 밖으로 나왔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고국에서 보던 하늘과 다르지 않았으나 더 넓어 보였다. 이 때였다. 동쪽에서 나타난 유성이 서쪽으로 사라졌다. 별똥별이 사라진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던 수양이 입을 열었다.

"신집의! 이곳이 우리 선조들의 땅 요동이지?"
"네 그렇습니다."

"요동 벌판에 말달리던 선조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지 않은가?"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인들이 말발굽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고국을 떠나면 애국자가 된다 했던가? 광활한 대지에 두 발을 딛고 하늘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가슴이 뛰며 등줄기에 전율이 흘렀다.

"안시성의 영웅들은 어디 갔나?"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습니다."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의 수십 만 군사들을 맞아 당당하게 한판 붙었던 그들은 적어도 '임금이 등극했으니 승인 해달라.'고 북경을 찾아가는 자신의 몰골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압록강에서 봉황성, 연산, 요동, 심양, 산해관을 거치는 동안 명나라에서 제공한 사신 객사에서 잠을 자는 것은 요동을 비롯한 몇 군데에 불과했다. 대부분 차가운 대지에 등을 붙이고 별을 보며 노숙했다. 식사 역시 떠날 때 준비한 식량으로 스스로 해결했다. 사신 길이 국내적으로는 영광의 길이고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당사자들에겐 고행 길이었다. 특히 황제가 북녘 열하에 휴양이라도 나가있으면 왕복 만리의 혹독한 길이었다.


#수양대군#신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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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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