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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간절한 외침은 메아리로 돌아왔다. 전태일 다리 위에서도, 창신동 봉제공장 골목에서도, 장례식장 앞에서도 애타게 "어머니"를 불러보았지만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난 5일 노동자의 어머니인 고 이소선씨가 걸어온 삶을 200여 명의 시민이 함께 걸었다.

 

어머니 손을 잡은 초등학생부터 주름이 깊게 패인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연령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이소선씨의 애환이 담긴 길 위에서 이들은 어머니의 빈자리를 묻고, 새로운 희망을 품었다. 

 

이소선 여사가 타계한 지 이틀이 지난 5일 오후 7시께 이소선씨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 주최로 '어머니의 길' 걷기 행사가 열렸다. 참석한 이들에게 심경을 묻자 하나같이 "안타깝다" "아직 어머니가 기다리시던 좋은 세상은 오지 않았다" 등 이소선씨의 타계를 안타까워했다.

 

 

"41년 만에 아드님 곁으로 가셨다."

 

전태일 열사와 이소선씨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산다는 이윤(67)씨는 이소선씨의 타계가 "친자식처럼 마음이 아프다. 의식이 있으셨을 때 '뼈'있는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또한 이씨는 "이소선씨는 노동자와 서민의 삶을 대변한 우리 민중의 어머니이자, 겨레의 어머니이다"라며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날 걷기 행사에는 부모님과 함께 참석한 중·고등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문성욱(14)군은 "전태일 평전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자살을 할 수밖에 없던 현실이 안타까웠다"며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가 걷던 길을 보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다.  

 

전태일 열사의 동상 아래 이소선씨 영정이 놓였다. 시민들은 영정 앞에 헌화했고, 눈시울을 붉혔다.

 

40년 동안 창신동에서 산 주민 정동순(56)씨는 "먹고 살기 바빠 고인이 돌아가신 것도 미처 몰랐다. 지금은 그만 뒀지만 나도 20년이 넘도록 봉제일을 했다. 봉제일은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지금 이만큼 개선된 것은 전태일 열사와 이소선씨 덕이다"고 말했다. 

 

이소선 여사가 초대회장을 맡았던 한울삶(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사무실까지 행진하는 동안에도 시민들은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고인이 만든 그늘 아래 우리가 살고 있다."

"어머니와 전태일 열사가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

"어머니는 전태일 열사의 유언을 100% 실천하셨다. 어느 어머니도 그렇게 하실 수 없다."

 

 

"많은 이들 떠나도 이소선은 노동자 곁 지켰다"

 

"어머님! 절대로 보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열사가 바라던 세상 아직 멀었는데 어머님께서 어떻게 천만 아들딸을 버리고 가신단 말입니까? 김진숙씨가 내려와 해맑게 웃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된 다음에 어머님을 하늘나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어머님 절대로 보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윤재학(63)씨가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기자수첩에 손수 적은 말이다. 행사 참가자들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 등 우리 사회 노동문제를 비판했다.

 

트위터를 통해 걷기 행사에 참가하게 됐다는 대학생 허소연(23)씨는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지) 40년이 지났지만, 노동자들의 현실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며 "한진중공업이나 유성기업을 보면 사측은 정리해고가 합법이라는 것을 빌미로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교사이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조합원인 김아무개(32)씨는 "교육현장에서 신자유주의가 아이들과 학부모들 그리고 교사들 삶에까지 전파되었다. 무한경쟁을 강요하니 아이들 삶도 피폐해지고 있다"며 "오늘 어머니 가시는 길을 보며 내가 있는 자리에서 더 마음을 열고 연대해야겠다고 느꼈다. 가난한 아이든 부자인 아이든 차별받지 않고,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30년 넘게 이소선 여사를 알고 지낸 파란 눈의 오기백(60· 본명 도날 오 키프) 신부는 "고인은 한국의 젊은 노동자들을 돌봤고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많은 사람이 노동운동을 그만두고 떠났지만 고인은 끝까지 그들 곁을 지켰다"며 "진심으로 고인을 존경한다"고 밝혔다. 

 

또한 오 신부는 "누구나 죽는다. 이소선 여사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는 것이 아름다운지를 보여줬다. 이제 그녀의 정신을 이어받을 때다"고 말했다. 

 

 

노동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유언을 41년 동안 온몸으로 받들고 비로소 잠들었다. 하지만 창신동 봉제공장의 재봉틀은 밤늦게까지 계속 돌아갔다.  시민들은 전태일 열사가 몸에 불을 붙인 그 자리부터 재봉틀 소리가 들리는 창신동 골목 곳곳을 걸었고,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김성만 가수의 추모 공연이 시작되자 시민들은 고개를 묵묵히 숙였다. 노래가사가 서울대병원 곳곳으로 울려퍼졌다.

 

"사람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 안을 때/ 어머니 해맑은 웃음의 그날 위해..."


태그:#이소선, #전태일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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