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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悲歌, 디르사에게>의 표지와 이정환 시인의 근래 모습
 시집 <悲歌, 디르사에게>의 표지와 이정환 시인의 근래 모습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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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워쌌으니 아아 그대 나를 에워쌌으니 향기로워라 온 세상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온 누리 향기로워라 나 그대 에워쌌으니

향기롭다. 그대가 나를 에워쌌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나 또한 그대를 에워쌌다. 그러니 온 누리가 다 향기롭다. 아아, 그대가 나를 에워싸고 나 역시 그대를 에워쌌으니, 온 세상은 향기로 가득하도다.

절창 <에워쌌으니>의 시인 이정환의 새 시집 <비가, 디르사에게>가 세상에 나왔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정환 시인의 9번째 시집이다. 등단 이후 30년 동안 <아침 반감>, <서서 천년을 흐를지라도>, <불의 흔적>, <물소리를 꺾어 그대에게 바치다>, <금빛 잉어>, <가구가 운다, 나무가 운다>, <원에 관하여>, <분홍 물갈퀴>이라는 제목으로 8권의 시집을 상재했으니 다작도 과작도 아닌 이정환 시인, 그 동안 꾸준하고 수준높은 창작활동을 보여주었고, 그에 따른 평가로 대구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이호우시조문학상 등을 받았다.

수상 경력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이정환의 시는 '시조'이다. 흔히 '3장'으로 기억하는 우리의 전통시 '시조' 말이다. 그러나 이정환의 시는 단심가나 회고가 같은 구태의연한 내용과 형식을 보여주는 그런 고시조류는 결코 아니다. 이 글 첫머리에 제시한 <에워쌌으니>가 잘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는 우리말을 세련되게 활용한 현대적 어조로 단아하고 절제된 형식과 내용을 보여준다.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 비로소 알았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것 이제야 알았습니다
세상이 조금씩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 비가, 디르사에게 2

<에워쌌으니>의 '그대'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비가, 디르사에게 2>의 '디르사'가 누구인지도 역시 헤아릴 길이 없다. '디르사'가 시조 본문 속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번 시집이 모두 '디르사 연작'으로 채워졌으므로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꽃이 피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세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도 모두 디르사를 만난 덕분이겠는데, 디르사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뛰어넘을 수 없는 잿빛 경계 앞에 아득한 날
어쩌지 못할 저물녘 물결 앞에 아득한 날
한순간 안으로 쳐들어온 적설 앞에 아득한 날
- 비가, 디르사에게 55

 뛰어넘을 수 없는 잿빛 경계 아득한 날
 뛰어넘을 수 없는 잿빛 경계 아득한 날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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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디르사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뒤를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을 만큼 디르사로부터 '아득한' 곳까지 멀리 떠나왔다고 생각해 보지만, 사실 나는 얼마 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고, 꽃이 피었다는 것도 '이제' 알았으며, 세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디르사 덕분에.

한때 디르사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되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되돌아와서 그 자리에 설 것이 너무나 자명하다. 이미 디르사는 나에게 '죽어서/다시금 만나/꽃 꺾어 바칠 당신(비가, 디르사에게 75)'이기 때문이다.

뒤를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을 그곳에

디르사는 있습니다
멀리 가지 못합니다

갔다가 되돌아와서
그 자리에 섭니다
- 비가, 디르사에게 10

디르사가 누구인지 독자는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비록 '감상의 오류'가 되면 어떤가. 김춘수의 <꽃>을 '연인'으로 굳게 믿든, 한용운의 <님>을 '조국'으로 한정하여 생각하든 그것은 오롯이 독자의 권리이다. 이렇게 저렇게 독자마다 다르게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창작된 시야말로 좋은 작품 아니던가. 시인은 적어도 독자에게 그 정도의 '서비스'는 제공해야 마땅하다.

<비가, 디르사에게 6>을 읽어보자.

돌아오지 않는 편지
돌아오지 않는 美笛

누군가 어깨를 툭 치는 그 순간

일시에
허물어져 버린
분홍 저고리, 다홍치마

디르사는 언제나 분홍 저고리와 다홍치마로 단장하고 있다. 그만큼 디르사는 아름답다. 그리고 이상 세계의 존재이다.

당연히 나는 디르사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답장은 없었다. 메아리를 날리듯 불러보기도 했지만 디르사에게서 아름다운 울림이 돌아온 적은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툭' 쳤다. 그는 무심코 쳤겠지만, 그래도 그것은 현실이었다. 분홍 저고리와 다홍치마를 한 디르사의 모습이 언뜻 눈앞에서 사라졌다. 슬픈 일이었다. 비가(悲歌)였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디르사가, 혹은 내가 '멀리 가지는 못'하며 '갔다가 되돌아 와서 그 자리에 선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처음부터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닫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와 '함께' 없어지지만, 만나는 그 자리에서는 '나란한' 소실점이 되기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그가 바로 시인 이정환이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무너져 내린 후에
걸어도 걸어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길

그 길 함께 나란한
소실점이고 싶습니다
- 비가, 디르사에게 20

덧붙이는 글 | 이정환 시집, <비가, 디르사에게>, 2011년, 책 만드는 집, 9천원



비가, 디르사에게

이정환 지음, 책만드는집(2011)


#이정환#비가, 디르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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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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