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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제일중 학생 9명이 글을 쓰고 사진도 찍어서 펴낸 <PM 1:00 꿈을 적는 시간>의 표지
대구 제일중 학생 9명이 글을 쓰고 사진도 찍어서 펴낸 의 표지 ⓒ 제일중

1970년, 지금으로부터 40년도 더 지난 정말 '옛날' 이야기를 해야겠다. 대구 제일중학교 학생 9명이 소설도 쓰고, 수필, 일기, 인터뷰 기사도 쓰고, 사진도 찍고 하여 펴낸 <꿈을 적는 시간>(김민정 외 저, 한티재 펴냄)을 읽은 탓이다.

 

<꿈을 적는 시간>에는 김민정 학생이 쓴 단편소설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 소설은 장편소설이었다. 등장인물이 많고, 갈등이 얽혀있고, 주제가 무겁고, 구성이 복잡하여 단편소설로 보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다. 필자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김민정의 단편소설이 200자 원고지로 무려 120장 안팎이나 되는 분량이었기 때문이다. 중학생이 그만한 소설을 썼으면 그게 바로 장편(!)소설이 아니고 무엇이랴.

 

필자가 중3 때, 국어 교과서에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단원 끝에는 '구성의 5단계에 따라 소설을 한번 써봅시다' 라는 '단원의 마무리'가 실려 있었다. 국어 선생님은 다음 주 월요일까지 200자 원고지 50장짜리 소설을 한 편씩 써올 것을 숙제로 부과했다.

 

"원고지 50장을 써오란다!"

"50장!"

 

학생들은 욕(!)을 하고 투덜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원고지 50장! 사실 엄청난 분량이었다. 간혹 200자 원고지 10장까지는 써본 학생들이 있어도, 전교생 중 그 누구도 50장이나 되는 장문을 써본 학생은 없었다. 중학생에게 원고지 50장은 책 한 권처럼 느껴지는 길이인 까닭이다.

 

그나저나 모범생(!)이었던 필자는 수업 중에 배운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이론에 맞춰 한 편의 단편소설을 썼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교에서 그 숙제를 한 학생은 필자 한 명뿐이었다. 그런데 국어 선생님이 며칠 뒤 필자에게 말씀하셨다. '학원 문학상'이 있는데 거기에 한번 내보자는 것이었다. 필자도 그 당시 전국 단위의 월간 학생 잡지인 <학원>을 보고 있었으므로 그런 상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른바 문학소년 즉 문예반 소속원도 아니었으니 그런 마음은 감히 먹은 바가 없었다. 결과를 말하면, 필자의 그 소설은 학원문학상에 뽑혀 상을 받았고, 그 이후로 필자는 글 잘 쓰는 학생으로 인정되었다.

 

김민정의 소설을 보니 그 때 일이 생각났다. 그런데 김민정의 소설은 50장도 아닌 120장 분량이다. 필자가 옛날에 썼던 길이의 두 배 반이나 되는, 정말 장편(!)소설이다. 그만한 분량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이야기를 끌고 간 지구력이 '대단하다'는 칭찬부터 해야겠다.

 

게다가 인물의 배치, 사건 전개의 흐름, 공간적·시간적 배경 설정, 문체의 채택 등에서 중학생의 수준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실력을 발휘한다. 결말을 간결하게 처리하고, 남자 주인공이 처음 보는 여자 주인공에게 과도한 호의를 베푼 전말에 우연성이 짙은 점 등 약간의 만화적 분위기만 해소한다면 기성작가가 쓴 훌륭한 청소년소설로 오해할 만하다.

 

피아노 김민정의 소설에서 피아노는 중요한 소품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여 주인공이 5년째 치지 않던 피아노를 갑자기 쳤는데도 놀랍게 잘 연주한다는 설정은 소설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피아노김민정의 소설에서 피아노는 중요한 소품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여 주인공이 5년째 치지 않던 피아노를 갑자기 쳤는데도 놀랍게 잘 연주한다는 설정은 소설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 정만진

그런가 하면, 박정은의 <나? 나!>도 아주 읽을 만하다. 특히 엄마, 아빠, 동생, 초등학교 동창, 현재의 친구들,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두루 인터뷰하여 자기 자신의 장단점, 인상 등에 대해 알아보고 그것을 글로 쓴 착상이  뛰어났다. 문장도 술술 읽히는 매끄러움을 지녔다. 본인은 짜증을 잘 내는 모양이나, 글을 읽는 독자들이 짜증을 낼 일은 결코 없는 문장력을 보여주고 있다.

 

글 쓰고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는 홍지연의 <나의 사진 일기>도 깔끔한 사진과 감칠맛 나는 내용으로 독자를 만족시켜 준다. 박신영, 서세이, 한영욱이 함께 쓰고 찍은 <제일인의 하루>도 사진과 글이 잘 어울려 책의 말미를 멋지게 장식하고 있다.

 

이수정의 <되돌아보다>와 이유진의 <추억의 일기장>, 그리고 이선주의 <소녀, 세상을 말하다>는 살아온 이력과 생각의 편린을 보여주는 글들이다. 이수정은 회고록 갈래, 이유진은 일기의 발췌, 이선주는 상당한 중수필 문체로 서로 형식은 다르지만, 이사, 친구, 꿈, 가족, 생일, 흉터, 휴대폰, 빼빼로데이, 명품, 담배, 독서 등 일상의 사건들을 통해 삶을 반추하고 인식을 정리하는 점에서는 모범적인 글쓰기 공부를 보여준다. 문장들도 지나치게 가볍거나 거칠지 않고 수준급이어서 1년 동안 함께 책쓰기 동아리를 하며 서로 고쳐주고 도와준 효과가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제일중 학생들의 하교 모습 책 속의 <제일인의 하루> 중 한 컷을 재촬영한 까닭에 사진이 흐리다.
제일중 학생들의 하교 모습책 속의 <제일인의 하루> 중 한 컷을 재촬영한 까닭에 사진이 흐리다. ⓒ 제일중

글 첫머리에서 필자는 이 책의 제목을 <꿈을 적는 시간>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PM 1:00 꿈을 적는 시간>이 맞다. 'PM 1:00'이 얹혀 있는 것은 매주 두 번씩 그 시간에 학교 컴퓨터실에 모여서 글을 썼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깜빡이는 커서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선생님이 무언가를 말해주기를 기다리던 아이들이었지만, 점차 자신있게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좋은 음악 소리' 같게 내었다는 중학생 9명의 1년에 걸친 동아리 활동이 마침내 책 한 권을 빚어낸 것이다. 이 책은 대구시교육청의 학생 저자 양성 프로젝트에 뽑혀 출간되었다. 같은 또래의 다른 중학생들에게 두루 읽힌다면 여러모로 좋은 교육적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덧붙이는 글 | <꿈을 적는 시간>(대구 제일중 김민정 등 9명 지음, 한티재, 2011년), 1만원


PM 1:00 꿈을 적는 시간

김민정.박정은.이선주.이수정.이유진.홍지연.박신영.서세이.한영욱 지음, 한티재(2011)


#제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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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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