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뉴스에 그리스의 국가채무에 관한 기사가 있더군요. 빚이 국내총생산의 157%에 이를 만큼 경제가 어려워진 그리스는 앞으로 주변국의 지원을 받는 데 실패해서, 그 결과로 채무불이행을 선언한다는 게 세계적 중론입니다. 약 10 여 년 전에 아르헨티나가 그러했듯이 그리스 역시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 두 나라가 가진 문화적 우수성이나 풍부한 자원과 별개로 국가의 운명이 흘러가고 있는 듯해 만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리스. 지중해의 안쪽 발칸반도에 위치한 반도국. 화려한 고대 문명을 자랑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신들의 나라인 그곳. 오늘날의 철학·문학·정치의 모태가 되는 나라이며 영어 어원 중 상당 부분이 그리스어에서 온 것만 봐도 그 깊은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아름다운 목소리의 가수 나나 무스크리의 고국이자, 몽환적 영상미의 영화 '안개 속의 풍경'이 제작된 나라라는 것 외에, 화려한 음식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 중 하나입니다.
최근 웰빙의 대중화와 함께 각광받고 있는 그리스 음식은 대체로 즉석에서 만들어 먹는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신선한 야채와 고기가 잘 조화를 이루는 메뉴들이 많은데, 그 중 기로스(Gyros)는 그리스의 대표 음식입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멕시코 케밥과도 비슷한 맛을 가진 기로스는 세계화에 성공한 대다수의 음식이 그러하듯 싸먹는 스타일의 음식입니다.
'싸 먹는 음식' 흔히 래핑 푸드(wrapping food)'라고 불리는 이 음식들은 햄버거 같은 전통의 패스트푸드가 차지하던 자리를 가뿐히 뺏고 이제는 백화점 푸드 코트나 캐주얼 레스토랑의 주요 메뉴가 되었습니다. 고기나 채소 등의 내용물과 이를 감싸는 빵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입에 착착 붙는 소스 덕분에 이색적인 맛을 자랑하는 것도 특징이죠.
비단 기로스 뿐만 아니라 재료와 모양만 약간씩 다를 뿐, 세계 어디에서든 그들만의 래핑 푸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얇게 잘 구운 핫케이크에 과일이나 생크림을 싸서 먹는 프랑스의 크레페(crepe), 물에 불린 옥수수를 얇게 늘여 구운 얇은 빵에다 야채나 고기를 싸먹는 멕시코의 타코(Taco), 화덕에 구운 빵에 내용물을 싸먹는 인도의 난(naan), 종류가 2백여 가지가 넘는 터키의 케밥(Kebab)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모두들 빵에 각종 야채나 고기를 넣는단 공통점도 있군요.
가만 생각해 보면 한국에도 전통의 래핑 푸드가 있네요. 조그맣게 밀전병을 구워서 아홉 가지 재료를 그 위에 얹고, 도르르 말아 먹는 구절판이 그 좋은 예가 되겠지요. 더 가까이는 상추쌈, 보쌈김치, 깻잎·콩잎 장아찌 등등 하여간 래핑 푸드는 나라를 불문하고 깊은 역사와 인기를 가진 음식 장르군요.
래핑 푸드는 창작성을 최고로 발휘할 수 있는 음식입니다. 안에 들어가는 내용물은 만드는 사람의 기호와 의욕에 따라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모는 재료를 차별하지 않고 감싸 안는다는 의미도 덧붙여 볼 수 있습니다. 세상 모두가 한데 어울리고 각자의 장점이 함께 어울려질 때에야 더 상승되는 행복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음식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그리스가 국민들의 고난을 감싸안으며 의연히 존립을 확인할 날도 오리라 생각해 봅니다.
그리스 전통 래핑 푸드 기로스. 이처럼 인기있는 이유는 소스에 있습니다. 차지키 (tzatziki)라고 하는 이 소스는 한국의 김치나 된장처럼 대부분의 요리에 곁들이는데, 양이나 염소의 젖으로 만든 그리스 요구르트에 오이·마늘·허브·식초 등을 넣어 만듭니다.
껍질을 벗기고 씨를 발라 낸 후 살만 곱게 다진 오이와 다량의 다진 마늘을 넣기 때문에 약간 쏴한 맛이 납니다. 밀가루,이스트, 우유로 반죽해 만든 피타빵 위에다 양념한 고기와 채소를 얹고 돌돌만 후 차지키를 끼 얹어가며 먹는 기로스. 참 담백하고 맛있습니다.
기로스가 맛있는 이유는 그리스의 자연환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중해성 기후는 일년내내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가득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고, 척박한 땅은 오히려 당도 높은 포도가 더 잘 자라게 해서 그 유명한 그리스 와인을 탄생시켰습니다. 그 신선한 자연 속에 방목된 염소와 양은 고품질의 젖을 만들어냈으며,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이용해서 진한 크림 형태의 수제 요구르트를 3천 년 전 부터 만들어 먹었습니다.
이 요구르트는 면역체계를 향상시키고 뼈 조직을 강화시키며, 항암 및 체중조절 효과도 가진 웰빙식품으로 이제 전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에선 만나기가 힘들어서 더욱 아쉽기만 한 그리스 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