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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집안 청소를 마칠 즈음, 1층 바닥에서 귀뚜라미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아마 방충망이 열려 있을 때 집 안으로 들어온 듯싶었습니다.

귀뚜라미
 귀뚜라미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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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최적화된 실내 환경이 이 귀뚜라미에게도 최적일리는 없을 듯싶었습니다. 저는 그 귀뚜라미를 집어서 서재 밖 정원으로 던졌습니다.

주목가지를 향해 던진 그 귀뚜라미는 무궁화나무 잎과 발코니의 벽에 걸쳐 지은 거미줄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귀뚜라미
 귀뚜라미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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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촘하게 처진 거미줄에 걸린 귀뚜라미는 이미 혼비백산한 상태여선지 그 가는 거미줄 한 가닥을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무궁화 잎 아래의 거미는 그 귀뚜라미가 힘이 빠져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귀뚜라미
 귀뚜라미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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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가 거미에 걸리게 된 것은 오직 저의 잘못이었으므로 저는 다시 손으로 그 녀석을 툭 쳐서 거미줄에서의 탈출을 도왔습니다. 귀뚜라미는 저의 도움으로 거미줄을 벗어나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에는 애완견 해모의 물통이 있었습니다. 그 녀석이 떨어진 곳은 바로 그 물 위였습니다. 남은 물이 1cm 깊이도 되지 않았지만 그 얕은 물조차 귀뚜라미가 유일하게 그 물통을 탈출할 희망인 귀뚜라미의 뒷다리가 박찰 수 있는 능력을 무력화시켰습니다. 뒷발길질을 해보았지만 그 물통 속 물 위를 떠돌 뿐이었습니다.

귀뚜라미
 귀뚜라미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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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또 다시 그 귀뚜라미를 구제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에서 건져진 귀뚜라미는 정원의 흙 위에 놓아주어도 한동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귀뚜라미
 귀뚜라미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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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달에 세상 밖으로 나와 10월 말이면 운명을 마감해야 하는, 단 몇 개월의 삶을 사는 귀뚜라미입니다. 지금 앞날개 두 개를 문지르면서 한창 가을을 노래해야 할 때에 그 녀석은 실내에서 굶어죽거나, 거미에게 먹히거나, 물에서 익사할 뻔한 세 번의 죽을 고비를 연거푸 맞은 것입니다.

귀뚜라미가 마침내 기운을 차려 주목 아래로 모습을 감추자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의 안수정등도(岸樹井藤圖)가 생각났습니다. 등나무뿌리에 매달린 채 진퇴양난에 빠진, 사찰의 법당 벽면에 그려진 벽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그네의 모습입니다. 붓다께서는 승광왕(勝光王)에게 설한 내용을 적은 경전의 내용입니다.

부처님의 생애
 부처님의 생애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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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그네가 광야를 거닐다가 코끼리를 만나 도망치고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인 눈빛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고 있다. 마을은 아득하고 나무 위건 돌 틈이건 안전한 곳은 없다. 숨을 곳을 찾아 사방으로 내달리다 겨우 발견한 곳이 바닥이 말라버린 우물이다.

저곳이면 그래도 괜찮겠지, 우물 곁 등나무 뿌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다가 그는 다시 소스라치게 놀랐다. 컴컴한 바닥에 시커먼 독룡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서야 먹잇감을 노리며 사방에서 혀를 널름거리는 네 마리의 독사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위로 올라가야 할까, 그는 하얗게 질려버렸다. 쫓아온 코끼리가 코를 높이 치켜들고 포효하고 있었다. 올라오기만 하면 밟아버릴 태세다.

믿을 것이라고는 가느다란 등나무 뿌리 한 줄기뿐이다. 그러나 그 뿌리마저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 번갈아가며 갉아먹고 있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두려움과 공포에 질린 얼굴 위로 무언가 떨어져 입으로 흘러들었다. 꿀이었다. 등나무 덩굴 위에 벌집이 있었던 것이다. 똑, 똑, 똑, 똑, 똑, 다섯 방울의 달콤함과 감미로움에 취해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

바람에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벌들이 쏟아져 나와 온몸을 쏘아대고, 두 마리 쥐가 쉬지 않고 뿌리를 갉아먹고, 사방에서 독사들이 쉭쉭거리고, 사나운 들불이 일어나 광야를 태우는 데도 그는 눈을 꼭 감고 바람이 다시 불기만 기다렸다. 다섯 방울의 꿀맛만 기억하고, 그 맛을 다시 볼 순간만 기약한 채 그는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잊고 있었다. 나의 삶도 이 나그네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 <부처님의 생애: 진리를 밝힌 위대한 스승>(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부처님의 생애 편찬위원회 저, 조계종출판사 발행) 60쪽

광야란 끝없는 무명(無明)의 긴 밤에 비유한 것이며, 나그네는 중생에 비유한 것이고, 코끼리는 무상(無常)에, 우물은 생사에, 그 험한 언덕의 등나무뿌리는 목숨에 비유한 것이요, 검은 쥐와 흰 쥐 두 마리는 밤과 낮에, 나무뿌리를 갉는 것은 매 시각 목숨이 줄어드는 것을, 네 마리 독사는 4대(大)에 비유한 것이며, 벌꿀은 5욕(欲)에, 벌은 삿된 소견에, 불은 늙음과 병에, 독룡은 죽음에 비유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생ㆍ노ㆍ병ㆍ사는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니, 언제나 그 5욕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 귀뚜라미가 맞은 불운과, 그리고 마침내 살아날 수 있었던 행운을 통해 붓다 손바닥위의 저 자신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운명이라는 거인 앞의 귀뚜라미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밤 정원의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실내 바닥에서 방향을 잃고 단지 사력을 다해 뒷다리를 구르는 일에 급급하여 순종해야할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마땅한 도리를 거슬러고 있지는 않은지가 두려울 뿐입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홈페이지 www.motif.kr 에도 포스팅됩니다.



태그:#인생, #귀뚜라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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