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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시간은 10시였다. 하지만 9시가 훌쩍 지나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TV를 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시계로 자꾸 눈이 갔지만 가자고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가기 싫다."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먹먹해졌다. 말이 재판이지 결과는 뻔했다. 지난 8월 30일 헌법재판소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고 실형을 선고하는 것이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내 친구 이준규는 5월 2일 입영을 거부하고 헌법재판소 앞에서 대체복무제 도입을 요구하는 1인시위로 공개적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그후로 법원심리가 진행중이었지만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앞두고 있어 공판이 헌재 판결 이후로 미루어졌다. 하지만 헌재판결이 난 바로 이튿날, 대구지법은 선고 공판 날짜를 알리는 법원등기를 송달했다. 그렇게 잡힌 선고 공판일이 9월 14일, 실형 선고가 확실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서면 바로 감옥으로 가는 길이라는 게 불 보듯 뻔하니 걸음이 떨어질 리 만무했다.

8월 30일 병역법 관련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는 이준규(오른쪽)
 8월 30일 병역법 관련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는 이준규(오른쪽)
ⓒ 전쟁없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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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만 통하는 공식 "양심의 자유=1년 6월 징역형"?

준규와 준규의 어머니를 차에 태우고 법정에 도착하니 20여 명의 후원회 회원들이 재판을 방청하러 와 있었다. 판사가 말했다.

"사건번호 ㅇㅇㅇㅇ 이준규씨."

사건번호와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순서가 되어서가 아니었다. 사건번호가 호명되자 법정 내 서있던 경찰이 일어나서 옆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자 밖에서 경찰이 한 명 더 들어왔다. 법정구속이 선고되면 그 두 사람이 그의 양 팔을 잡고 저 문으로 끌고 갈 테지. 이미 결정이 되어 있는 법정구속을 두 사람은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합니다. 실형이 선고되었으므로 법정 구속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하십시오."
"많은 부분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이야기하고 한국이 OECD 회원국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OECD 국가들 중에 병역거부로 이렇게 사람들이 감옥에 가는 나라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말처럼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감옥에 보내는 나라는 아제르바이잔(1명), 투르크메니스탄(1명), 아르메니아(73명) 그리고 한국, 단 4개국에 불과하다. 더구나 최근에 유럽인권재판소가 아르메니아에 대체복무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려 이후에는 3개국으로 줄어들 예정이다. 반면 한국은 1년에 700~800명이 양심적 병역거부로 수감 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 수는 지금까지 1만 6000명을 넘겼다. 별다른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이, 하루에 2~3명씩 평화를 원한다는 양심을 고백하고 감옥으로 가는 것이다. 한국의 병역거부자 처벌은 전 세계적으로도 독보적이다.

"한 시민으로서 총을 들지 않는 방식의 또다른 평화를 이야기하고 그에 따른 의무를 지고 싶다고 지금까지 다른 병역거부자들과 함께 외쳐 왔습니다. 그러나 헌재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판사님께서도 지금 1년 6월형을 선고하셨습니다. 한국의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평화주의가 무엇인지 진지하고 묻고 싶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수감됐다. 하다 못해 학원 숙제를 안해 가도 왜 못했는지 사정을 묻고 참작한다. 그런데 누군가를 감옥에 보내는 일에 이유를 묻지도, 그것이 정말 죄인지 아닌지도 가리지 않고 그저 상위법원의 결정에 따라 더이상의 논의도 심리도 없이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마치 군대 대신 양심의 자유를 외치는 것은 곧 1년6월 징역형이라는, 한국에서만 통하는 공식이 있는 것 같았다.

이미 한국은 대체복무제를 시행하고 있는 국가

그가 수감되고 나서 일주일을 보내고, 면회를 하러 대구구치소로 갔다. 많은 수의  병역거부자들이 그렇듯 교도소로 이감되지 않고 구치소에서 일을 하게 될 거 같다고 그는 전했다. 준규의 어머니께서도 사방팔방 아는 사람을 통해 알아 보니 구치소는 항상 일손이 부족한 곳이라 병역거부자들을 대부분 인력으로 활용한다고 했다. 자주 가볼 수 있는 가까운 곳이라 잘 됐다 싶은 생각과 함께 1년 6개월 동안 일을 시킬 만큼 필요한 인력이라면 왜 대체복무를 시행하지 않는가 하는 갑갑함이 일었다. 그가 구치소 안에서 행정업무로 노역을 한다면 대체복무와의 차이는 그의 신분이 죄수이고 죄수복을 입고 있는 것 말고 뭐가 있는가.

국제적으로 한국은 징집 인원의 1/3이 공익근무요원 등의 비전투인력으로 배치되어 있어 준대체복무제 시행국으로 분류된다. 뿐만 아니라 의대생, 한의대생들은 대부분 군의관제도로 대체복무를 하고 있으며, 과거 교대생들은 교사 수급을 위해 아예 징집되지 않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한국은 굉장히 폭넓은 대체복무제를 시행하는 국가이다.

2007년에 국방부가 대체복무제 도입을 정식으로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체복무제가 도입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의 특수한 안보적 상황을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지만, 중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눌리고 있는 대만도 2000년부터 대체복무제를 시행하고 있고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중에 대체복무제를 도입했다. 아무리 한국의 안보 상황이 특수하더라도 전쟁 중이던 영국보다 더할까.

사람답게 사는 길

대구구치소 전경
 대구구치소 전경
ⓒ 이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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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회를 끝내고 돌아서는 길에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커다란 돌비석에는 "사람답게 사는 길"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고 아래쪽에 화살표가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병역거부자들의 삶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 같아 마음이 시렸다. 전쟁을 준비하는 공간인 군대를 평화라는 이름으로 거부하고, 사람이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비인간성이 지배하는 군대라는 공간에 대해 저항하고, 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군사주의와 폭력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사는 길'을 걷고자 병역거부를 선언한 사람들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제가 꿈꾸는 세상은 여리고 약한 사람들이 서로가 다치지 않게 아끼면서 사는 곳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저처럼 겁많고 여리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군대도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공격할까봐 더 큰 총을 들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여리고 겁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도 저와 같이 더 이상 총드는 일없는 평화로운 것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록 작은 목소리라도, 겁이 나겠지만 평화를 얻으려면 총을 놓아야 하지 않겠냐고, 그것이 함께 바라는 게 아니냐고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준규의 병역거부 선언문 중에서)"


태그:#대체복무, #병역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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