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인 내가 2002년 월드컵 때 유럽을 여행한 적이 있다. 성지순례 차 떠난 길목이라 그곳의 성당과 박물관이 주요 대상지였다. 영국의 타워 브릿지와 대영박물관, 파리의 에펠탑과 루브르 박물관, 그리고 이탈리아의 원형경기장과 시스티나 성당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건축물이었다. 모두가 다 훌륭한 건축물 같지만 나름대로 색다르게 다가오는 면이 없지 않았다.
대영박물관은 기둥과 돔 위주로 그야말로 평범한 느낌이었다. 그 안에 전시된 것들도 과거의 존재감에만 치중하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철골과 유리로 균형을 잡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은 훨씬 더 세련된 느낌이었다. 동행자 한 사람이 길을 잃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오밀조밀하게 지었겠는가. 하지만 이탈리아의 시스티나 성당은 그야말로 주눅들 정도였다. 성당 천장의 높이도 그렇거니와 그 안에 그려져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는 탄성 그 자체였다.
목사인 내가 그곳들을 둘러보고 느낀 깨달음과 일반 건축가들이 둘러보고 느낀 생각들은 많이 다를 것이다. 나는 건축물에 대한 모양새와 현대적인 감각에만 치중할 뿐이라면 일반 건축가는 그 건물의 평면 입체에서부터, 추상적인 면과 수학적인 면까지도 고려할 것이요, 그 건물의 껍데기를 무엇으로 어떻게 씌웠는지, 또 그 건축물이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잇고 대화하고 있는지 등, 종합적인 면들을 생각할 것이다.
서른 중턱도 못 다다른 나이에, 독일의 아헨성당에서부터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핀란드 등 유럽의 10개국 40여 곳을 둘러보고, 그 나름대로 건축물이 안겨주는 깨달음과 느낌들을 여러 그림과 글로 옮긴 최우용의 <유럽방랑 건축+畵[화]>는 유럽의 건축물들이 지닌 존재감의 깊이를 맛보게 해 준다. 역사적으로 이름 높은 노트르담 대성당과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은 물론이고, 스페인의 위대한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와 전설적인 건축가로 알려진 알바 알토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건축 거장들과 소통한 내용도 뜻이 깊다.
건축가인 그가 바라보는 유럽의 도시 계획은 주로 광장과 교회를 중심으로 세워져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의 도시 골격은 그것이 더 진하게 배어나 있다고 한다. 이른바 교회의 공간이 내세를 위한 길목을 제시한다면, 교회와 접하고 있는 광장은 다분히 현실적인 통로 역할을 한다는 게 그것이다. 그들의 광장이 공간 장악력과 함께 그 중심성을 드러내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과연 우리나라의 광장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최우용은 중세 유럽의 건축술이 대부분 바실리카(basilica)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른바 네모반듯한 직사각형의 평면에 기둥열과 지붕을 덮인 건축술이 그것이다. 그런 건축물들이 주는 느낌이 무엇일까? 이탈리아의 성 베드로 성당이나 바티칸은 물론이고, 앞서 말한 시스티나 성당의 건축물은 그 자체로 공포심을 유발케 한다는 점이다.
성지 순례차 그 베드로 성당에서 행한 미사에 참여해 사람들을 본 일이 있다. 신부가 부르는 오라토리오 찬송가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속에서 함께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 드러나 있는 엄숙함은 장엄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느끼는 게 두려움과 엄숙함뿐이겠는가? 그 건축물에는 공포심과 함께 한 줄기 빛의 평온함도 선사한다고 한다. 최우용은 그것이 공포심과 더불어 구원자 역할을 하는, 이른바 병 주고 약 주는 일이요, 그들의 건축물에서 그가 버트런트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떠올린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을 걸쳐 한 번 더 걸러져 들어온 서양 건축도 여기서 멀리 있지 않다. 박길룡, 박동진 같은 대한민국 근대 건축 1세대의 노력이 뒤따랐지만 서양 건축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밖으로부터 주어진' 것과 우리의 것 사이에 많은 간극이 발생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135쪽)
이는 건축과 헌법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인용한 내용이다. 헌법이 우리 사회와 유린된 것은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우리사회의 밖으로부터 주어진 이유인 바, 우리나라의 헌법은 그만큼의 역사적 경험과 토대를 쌓지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레 주어진 것이요, 우리나라의 건축물도 실은 안으로부터 쌓아 올리고 발전시킨 것이기보다는 그저 밖으로부터 주어진 것을 차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종묘와 청계천을 초록 화장술로 치장한 '코에터킴'이란 건축가에게도 해당된다고 지적한다. 물론 그를 비판하는 것은 외국 건축가에게 밥벌이를 뺏긴다는 시기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하천 밑에 또 다른 인공 수돗물이 지나가게 하는 데 따른, 치열한 고민도 계획도 반성도 없다는 뜻에서일 것이다. 그것이 서울 사람들을 기만한 일이요, 후대를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아픔을 준 일이라고 꼬집는다. 사람과 자연스레 소통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홀로 존재하는 건축물'을 만들어냈으니, 어찌 그를 후하게 평가하겠는가.
"여행을 하며 참으로 많은 건축물을 보았고, 또 그 건축물과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도시를 보았습니다. 몽생 미셸의 장엄함에 숙연해졌으며, 시에나 캄포 광정의 기능적이면서도 감성이 흘러넘치는 광경도 보았습니다. 천 년이 넘는 시간을 이겨낸 많은 교회들, 루카의 건축이 보여주는 소박하면서도 건강한 모습, 빈약한 햇살을 받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그러면서도 따뜻한 감수성을 동원한 북구의 건축물……. 참 감동적인 모습이었습니다."(409)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고, 여러 인문서적들을 많이 탐독한 탓인지, 이 책에는 건축물에 대한 그의 인문학적 사유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해 준다. 존재론적인 건축물보다는 관계론적인 건축물을 더 앞세우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신영복 선생이 풀어낸 학(學)과 사(思)의 대구를 생각하는 그 지점, 이른바 현실적인 조건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함은 당연하지만 특수한 경험에 매몰되지 않는 이론적인 사고의 필요성을 제고하는 건축가 되어야 한다는 게 그것이다. 그런 사고의 토대 속에서 오늘도 그는 홀로의 모습보다는 전체를 바라보는 건전한 관계를 꿈꾸는 건축인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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