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이른바 권고안을 들은 것은 제5차 희망버스가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환노위 의원들이 한진중공업 조남호 회장을 불러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나 몇 가지 내용의 합의를 담은 권고안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일 년 이내에 94명의 해고자를 '재고용'하고, 해고 기간 동안 2천만 원 이내에서 생계비를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대신 조남호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을 내려와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고 한다. 당연한 것이지만 금속노조와 한진중공업 지회가 동의해야 한다는 것도 덧붙였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수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년이란 기간도 그렇고, 지금부터(?) 일 년 후라면 대통령 선거 직전이니 조남호라 하더라도 약속을 무식하게 안 지킬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상반되는 두 가지 생각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든 것 같다. 하나는 김진숙과 세 명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하루라도 빨리 내려왔으면 하는 마음이다. 다른 하나는 이제 희망버스가 더 이상 한진중공업과 김진숙만의 문제가 아니라 더 많은 문제, 더 본질적인 문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바람이다.
여기에 더해 장기간의 투쟁으로 인한 피로감의 느낌과 우려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도로 가는 희망버스가 이번이 마지막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내려가는 동안에는 권고안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우선 희망버스에 대한 경찰의 강경 대응 기조에 우리의 '가을 소풍'이 어떻게 진행될지가 걱정이었다(결국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게다가 장시간의 여행이라 피곤했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부산에 도착해서는 시작부터 경찰의 무법적인 대응에 맞서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시 권고안을 떠올리고 조금이라도 집중해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난장 때 나온 발언 때문이었다. 남포동 비프(BIFF) 광장에서 집회를 한 후 영도로 가기 위해 광복동 입구에서 경찰과 맞서던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경찰의 폭력적인 대응을 피해 다시 비프 광장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가을 소풍 프로그램의 하나인 난장이 진행되었다. 자유 발언이 이어졌는데, 김진숙의 지킴이 역할을 하는 세 명의 노동자 가운데 한 사람의 부인이 나와 발언을 했다.
"권고안은 절대 받아들이면 안 된다"
전교조 활동으로 인한 5년간의 해직 경험이 있는 50대의 교사는 그 날 오후 자신이 한진중공업 앞에서 당한 경험을 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마지막에 있었다. 권고안을 절대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의 목표는 정리해고 철회라는 것이다. 거기에 부합하지 않는 어떤 합의도 그간의 노력, 싸우는 노동자들의 자존심, 목표 등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한다.
그의 발언 덕분에 정신이 들었다. 잠시 후 다른 회사에서 해고되었고, 희망버스 활동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했던 동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 사이의 대화는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이번 권고안이 나온 배경, 권고안에 대해 있을 수 있는 다양한 입장, 희망버스의 상태 등 적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의 대화가 가장 먼저 문제로 삼은 것은 이번 권고안이 마련된 방식이었다. 그는 환노위 소속 한나라당 간사인 이범관 의원과 민주당 정동영 의원이 조남호 회장과 따로 만나는 과정에서 이번 권고안이 나왔다는 후문을 먼저 전하면서, 이런 식의 밀실 협상은 내용을 떠나 과정 자체가 문제라고 했다.
당연한 비판이었다.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와 이에 맞서는 한진 노동자들의 투쟁, 김진숙의 크레인 농성, 희망버스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볼 때 이번 사건이 전 사회적 문제, 나아가 시대적 과제의 교차점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여기에는 희망버스 참가자라는 말로 상징되는, 무수한 사람들이 연루되었고, 그렇기에 폭발적이었다. 그러니 해결 과정에도 이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지 못한다면 어떤 해결책이든 정당성을 잃을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 오늘날 우리 앞에 놓인 과제 가운데 하나가 민주주의의 확장, 즉 새로운 민주주의라고 할 때 희망버스라는 꿈을 현실로 만들어낸 힘을 그 사태의 해결 과정에서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대화 주제는 당연히 권고안의 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쟁점이 있다. 하나는 일 년 후 '재고용'이라는 형식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대 2천만 원의 생계비 지원이다. 후자를 먼저 말해보자. 재고용 대상인 94명의 노동자들은 명예퇴직을 받아들이지 않고, 명예로운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한진중공업은 이번 정리해고를 단행하면서 명예퇴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2년치 이상의 임금을 퇴직 수당으로 지급했다. 그 돈은 그 자체로 많지 않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정리해고 노동자들에게는 적지 않은 액수이다. 하지만 94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이번 정리해고가 그 자체로 부당할 뿐만 아니라 정리해고라는 경영의 한 형식과 정면으로 싸우지 않는다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자의 쟁점은 곧바로 전자로 이어진다. 이번 정리해고는 철회되어야 할 부당한 일이므로 '재고용'이라는 형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끝으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우선 권고안이 나온 것은 밀실에서 권고안을 만들어낸 세 당사자들의 처지가 곤혹스럽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어찌되었건 재벌 회장인 조남호는 정리해고 사태가 희망버스로 커지면서 국회 청문회에 나올 수밖에 없었고, 이를 통해 그의 파렴치함과 사태의 부당함이 상당한 사회적 공감을 얻게 되었다.
여당은 여당대로 가뜩이나 상황이 좋지 않은데, 부도덕한 재벌을 비호한다는 욕까지 먹는 처지에 빠져 있다. 야당 의원도 이제는 이 사태를 마무리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지지층을 넓히는 게 아니라 얕게 할 위험이 큰 지경이다. 그렇지만 이번 권고안대로 노사가 합의를 한다면 어려운 사회 문제를 풀었다는 훈장이 이들에게 돌아갈 것은 뻔한 일이다. 게다가 그 협상의 노동자 측에 말 많은 지회 현 집행부가 있으니 갑갑한 노릇이긴 하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우리 두 사람은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철회 투쟁위원회, 김진숙, 송경동, 해고노동자들의 가족들, 희망버스 기획단. 무수히 많은 희망버스 참가자들. 이 모두 각자의 처지 속에서, 각자의 생각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 말을 잘못 꺼내면 무수한 분할이 생길 것이고, 누군가 강하게 주장하면 말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대화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야 했다. 늦은 밤 취객들의 소란이 이를 재촉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얽힌 매듭을 단번에 잘라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칼이 없다. 설사 있다 해도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이다. 유일하게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다중의 지성을 작동시키는 일이다. 빠른 시간 내에 마치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모인 것처럼 권고안을 하나의 텍스트로 삼아, 그간 우리가 이루어낸 일을 텍스트로 만들어 가장 적절한 해결 방안, 아니 해결의 원칙을 구성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마친 우리는 다시 난장이 벌어지는 광장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떠들썩한, 자유로운 발언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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