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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경남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표충사 입구에서 한글로 새긴 철비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는 1877년(고종 14년) 거창 군수로 부임하여 청렴한 공적을 세운 김계진(1823~1881)군수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대부분의 철비처럼 글씨는 음각으로 주조했고 뒷면에는 건립연대를 양각으로 주조하였다. 특이한 점은 뒷면에 한글로 새겨진 '긔뫼동지달일립'이 거꾸로 새겨졌다는 점이다. 그 내용은 기묘년(1879년) 동지달에 건립했다는 의미이다

이 철비는 고려금석원의 전국 철비조사과정에서 발견됐다. 2007년 포스코 역사관에서 개최된 '철비 사진·탁본 특별전'에서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17~20세기초까지 남한에 세워진 철비는 300여 기에 달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47여 기에 그치고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하기 위해 군수물자로 빼돌리면서 사라져갔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철비-1 포스코역사관에서 조사한 철비
▲ 철비-1 포스코역사관에서 조사한 철비
ⓒ 포스코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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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비-2 포스코 역사관에서 조사한 철비
▲ 철비-2 포스코 역사관에서 조사한 철비
ⓒ 포스코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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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비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중국 진나라 학자인 진수(陳壽, 233~397)에 의해 편찬된 <정사삼국지>에 유비의 묘 앞에 철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처음이며, 우리나라의 문헌에서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이 지은 <동악집(東岳集)>(1640)에서 회양(현 강원도 고성 부근)의 길가에 높이 삼 척(현재 길이로 약 90cm)의 철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존하는 철비 중 가장 오래된 철비로는 1631년 현감 이원명정거사비(충북 진천군), 영장유공춘호영세불망비(경북 경주시)를 꼽고 있다.

철비는 18세기에 들어 제작이 급격하게 증가하는데 이를 철 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국가에서 철의 사용을 엄격히 통제하던 제도가 붕괴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그럼 조선시대 사람들은 왜 철비를 만들어 세웠을까? 여러 가지 목적이 있었겠지만 나무나 돌에 비해 강하고 영원하다는 믿음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공덕비의 건립이나. 맹세의 상징으로 건립했다. 철은 동양사상에서는 악한 것을 물리치고 지기가 강한 곳을 누른다는 비보풍수의 목적으로 이용돼왔다(일제강점기 때 국토 곳곳에 박은 쇠말뚝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겠다).

철비가 세워진 가문은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는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철비는 선정을 베푼 관리를 잊지 않기 위해 마을 주민이 세운다고 기록돼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철비#문화재#거창철비#청백리에대한최고의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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