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없는 형편에 정장 사주면서 꼭 취업하라고 했는데... 엄마 목소리 들으니까 눈물이 나." 13일 저녁 중곡동의 한 포장마차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김선희(가명․24)씨는 전화기를 부여잡고 울고 있었다. 포장마차 테이블 넘어로 들려오는 그녀의 울음 섞인 대화에 가슴이 저릿해 몰래 엿들었다.
김해에서 서울로 상경해 수도권에 있는 사범대를 다니는 김씨는 대학졸업반이다. 그녀의 서울 생활만큼 취업은 녹록지 않았다. 전화 통화를 끝낸 그녀에게 말을 붙여 혼자 술을 마시게 된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좀 청승맞죠? 근처에 사는데 오늘은 정말 너무 힘들어서 술이라도 안 마시면 화병 날 것 같았어요. 오늘 면접을 5군데 봤어요. 서울 남쪽, 북쪽 할 것 없이 면접보러 다녔어요. 긴장을 풀었다 놓으니까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나중에는 (면접보면서) 헛소리까지 했어요. 제가 너무 긴장을 해서 눈을 못 마주치니까. 면접관이 사시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아마 떨어지겠죠."
취업하기 위해 춤과 노래를 권유하는 사회대기업 인턴, 자격증, 교생실습, 알바까지 그녀의 대학 생활은 '낭만'이 아닌 '알바와 스펙쌓기'로 채워졌다. 1년의 휴학 기간 조차 그녀에겐 휴식이 아닌 이력서에 채울 경험을 쌓으면서 보냈다. 그렇게 열심히 대학 생활을 한 그녀였지만, 면접에서 쏟아지는 질문들은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오늘 면접 본 회사에서는 대놓고 이런 말을 했어요. 회사는 일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을 뽑는 곳이 아니고, 일을 잘 해서 성과를 낼 수 있는 사람을 뽑는다. 당신 같은 사람보다는 잘하는 사람 뽑고 싶다고... 기업은 이윤을 창출하는 곳이니까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죠." 그녀가 면접을 본 외국계 회사 중 한 곳은 면접에 들어가자마자 영어로 질문을 했다고 한다. 자기 소개를 하기 전부터 쏟아지는 영어 질문에 그녀는 적잖게 당황했다고 한다. 심지어 취업상담센터에서는 그녀가 쓴 이력서의 취미란을 '춤추기와 노래하기'로 고치라고 권유했다.
"지루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제 취미는 진짜 독서랑 요리예요. 그런데 취업상담센터에서는 회사 레크리에이션과 회식자리에서 잘 놀 수 있는 사람을 뽑을 수 있으니까 춤추기, 노래하기로 취미를 바꾸래요. 취업하는데 춤추고 노래까지 불러야 해요?"취업준비생들에게 이력서 취미란은 고민되는 항목이다. 평범하게 적으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고, 막상 돋보이게 적으려고 해도 '색다른 취미'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 취업준비생들 가운데 대부분은 취미란에는 축구와 등산을 적는 이들이 많다.
대놓고 신입사원에 대한 험담을 하는 회사도 있었다.
"한 회사는 '요즘 여자 신입사원들은 뽑아 놓으면 지들이 공주인줄 알아. 밑바닥부터 시작할 생각을 해야지. 어디서 공주 행세야'라고 말하는 회사도 있었어요. 전 공주 소리 들어본 적도 없는데... 그래서 저는 (사장님께) 30분 먼저 출근해서 책상을 닦아 드린다고 말했어요. 책상이 깨끗하면 그 날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은근히 그런 거 바란다니까요. 기업 문화도 문제지만, 이 정도는 각오해야죠."눈물을 훔치는 그녀의 말 끝에서 안타까운 한숨이 흘러 나왔다. 기자와 김씨의 대화를 듣고 있던 4년차 직장인인 기자의 지인은 "회사는 외국계인데, 사장은 한국 사람이구나"라고 말했다.
화제 전환을 위해 그녀에게 선생님이 될 생각은 없냐고 물었다. 그녀는 실제로 교생실습을 하기도 했으며, 이번 학기를 마치면 교원자격증을 취득한다. 하지만 그녀가 선생님이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선생님 되고 싶죠. 과정이 힘든 것은 견딜 수 있어요. 하지만 대학 졸업 후에도 임용시험 준비한다고 부모님께 손 벌릴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사립학교 교사라도 되려면 몇 천만원을 내야 돼요. 저희 집에는 그렇게 큰 돈 없어요. 공립 학교는 준비하는데 몇 년 걸리고, 합격하기 어려워요. 만약 임용 시험에 실패하면 나이 27살에 이력서에 '임용 준비' 이렇게 쓸 수 없잖아요. 그래서 선생님이 되는 것 포기하고, 일반 기업에 취업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되네요." 그녀의 유일한 소망은 '직장인'"정치권에서 청년들이 취업을 못하는 이유는 열정과 창의력이 없기 때문이래요. 저는 한 직장에서 뼈를 묻을 만큼 열심히 할 자신 있어요. 열정도 있고, 창의력도 있어요. 그런데 취업을 못해요. 돈도 없어요. 이명박 대통령, 나경원 서울시장 후보가 청년들 일자리 만들어 준다고 하잖아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청년들 현실을 알아요. 돈 많고, 배부른 사람들인데...(이번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도)말이 아닌 진심으로 청년실업 문제 해결한다고 하면 청년들이 뽑아주겠죠. "그녀는 소위 말하는 '개념 찬 대학생'이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집회에 참여하기도 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식 때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다. 정치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그녀는 한층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번 선거는) 꼭 투표할 거예요. 대학생들 중에서 투표 안 하고,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쿨한 줄 착각하는 학생들이 있어요. 사실 정치는 우리 삶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에 무관심하면 나중에 자신한테 돌아와요. 부메랑처럼.""서울에서 살기 너무 힘들어요. 전세금, 물가 비싸잖아요. 전 학교 다니면서 생활비를 다 벌어서 썼어요. 아르바이트를 쉰 적이 없었어요. 뭘 하려고 하면 돈이 필요하니까요. 정말 닥치는 대로 일했어요. 사실 대기업 가려는 이유도 돈 때문이잖아요. 연봉은 물론이고, 퇴직금도 두둑하잖아요. 대기업다니는 직장인들은 월급이 스쳐지나간다고 하잖아요. 통장에 찍힌 월급 명세서를 볼 때 유일하게 행복하대요. 제 희망연봉은 2200만 원이에요. 이 정도 (연봉) 못 받으면 서울에서 살기 힘들어요. 근데 대기업은 매번 떨어지니까, 눈을 낮춰서 일반 중소기업이라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들어가려고 해요"
그녀는 면접관에게 "이 회사에서 뼈를 묻겠다고 말했다"고 했다. 한 직장에서 뼈를 묻을 정도로 오래 일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지만, 안타까운 것은 '뼈를 묻는다'는 절박한 표현을 써야하는 우리 사회의 암울한 취업 현실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그녀에게 '꿈'에 대해서 물었다.
"취직해서 시집갈 수 있을 정도로 적금 들고, 집에 많지는 않지만 생활비 보내드릴 수 있을 정도로 사는 거예요. 소박하죠. 근데 이 꿈조차 이룰 수 없게 우리 사회가 막막해요. 취업을 하는 것도, 직장에서 안 잘리고 버티는 것도 어렵잖아요. 원래는 꿈이 거창했는데, 사회의 쓴 맛을 보니 소박한 꿈도 쉽지 않은 것을 알게 됐어요."그녀는 1%가 아닌 99%다. 소위 'SKY'라는 일류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고, 자녀에게 수십억의 자산을 물려줄 수 있는 부유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지도 않았다. 또한 취업을 통해 '신분상승'이 이루어질 것이란 꿈도 꾸지 않는다. 그녀가 유일하게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직장인'이 되는 것이다.
4년의 서울 생활이 그녀에게 안겨준 것은 학자금의 빚과 사회의 높은 문턱이었다. 한 시간이 조금 넘도록 얘기하면서 그녀는 틈틈이 눈물을 닦았고, 틈틈이 소주 반 잔을 입속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혼자 술을 마시던 그녀를 걱정해 한 걸음에 달려온 그녀의 친구 앞에 다시 눈물을 흘렸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있다. 기왕이면 안 아픈 청춘이면 좋으련만, 우리 시대의 청춘 가운데 99%는 현실의 높은 벽에 부딪혀 아프고 절망한다. 20대라면 누구나 잠시 거쳐가는 성장통일까? 아니면 경쟁을 강권하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어쩔 수 없는 아픔일까? 후자라면 '어디'를 점령해야 해결될 문제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녀는
"다음에 여기서 검은 정장을 입고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으면 또 면접 떨어진 줄 아세요"라고 말하며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