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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볕... 떨어진 나뭇잎에 햇볕이 앉아 논다...
가을볕...떨어진 나뭇잎에 햇볕이 앉아 논다... ⓒ 이명화

날은 어제보다 좀 더 쌀쌀하다. 매년 이맘때쯤 되면 차가운 내 손발은 겨울을 감지하기라도 하듯 벌써 시려오기 시작해 자꾸 호주머니에 손을 넣게 된다. 오늘도 날씨 한 번 좋다. 하늘은 드높고 소슬바람은 나른한 몸과 마음을 일깨우고 하늘은 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청신하다. 앞 산 뒷산은 내 눈앞에 더 가까워졌다.

오늘도 어떤 이는 일터로 나가고 어떤 이는 사업장으로 어떤 이는 산으로 들로 바다로, 어떤 이는 길로, 어떤 이는 먼 여행길을 갔다. 가을은 날로 깊어만 가고, 이맘때쯤이면 괜시리 마음이 바빠지는 것 같다. 엊그제 새해 첫날을 연 것 같은데 어느덧 가을도 깊어 한 해의 끝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손에 쥔 일에 열중하고 있다가도 문득 문득 고개를 들고 중요한 것을 빠뜨린 건 없는지 자꾸만 두리번거린다. 가을만큼 깊은 사색에 마음이 익기는커녕 떨어지는 나뭇잎들처럼 일순간 마음이 산란해진다. 뭔가를 해야할 것같다. 문득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던 시가 생각난다.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다 거두어 갈무리 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을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가을 어느 날 농사꾼 아우가 무심코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 있겠는가. 열매 살려 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가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뜻으로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으로 보면 쓸모가 있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 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말려라. 햇볕에 내어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 내거라.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
                                           -정진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전문-

햇볕... 옆집 할머니가 평상에 내다 넌 호박...
햇볕...옆집 할머니가 평상에 내다 넌 호박... ⓒ 이명화

가을볕 좋은 날에 현관 밖에도 옆집 할머니 집 장독대 위에도 산에도 들에도 당신의 사무실 창밖에도 탱탱 놀고 있는 햇볕에 뭐라도 말려야 할 것만 같지 않은가. 얼마 전에도 이 시를 읽다가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던 적이 있다.

시를 읽다가 문득 눈을 들어 창밖을 보았을 때 가을볕이 너무 좋았다.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상쾌한 바람과 고슬고슬한 가을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나는 일어나 이 좋은 햇볕에 내다 널 것이 없을까 두리번거렸다.

괜히 멀쩡한 이불을 내다널고도 아쉬워서 혼자 옥상으로 올라갔고 눅눅하게 젖어있던 마음이랑 몸이랑 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말리고 싶어 옥상 한 가운데 섰었다. 가을볕에 고슬고슬 꼬들꼬들 보송보송 잘 말리면 내 몸에서 내 마음에서 뽀드득 소리가 날것처럼. 연초록 풀잎 위에 이슬처럼 또르르 햇살이 굴러갈 정도로 맑아질 것처럼. 옥상 한가운데 서서 햇볕샤워를 하고 서 있었다.

햇볕 놀고 있는 가을볕에 내다 넌 삶은 고추..
햇볕놀고 있는 가을볕에 내다 넌 삶은 고추.. ⓒ 이명화

가을은 더 깊었다. 오늘도 가을볕은 놀고 있다. 놀고 있는 햇볕이 저 혼자 아깝다 아깝다 말한다. 탱탱 놀고 있는 가을볕이 정말 아깝다. 내 이웃에 놀고 있는 햇볕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바로 옆집 할머니다. 할머니는 허리 한 번 꼿꼿하게 펴고 걷는 걸 본 적이 없다. 활시위처럼 휘어진 꼬부랑 허리로 항상 팔팔하게 걸어 다닌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밭으로 나가거나 채소를 삶고 데치고 자르고 햇볕에 말린다. 봄·여름·가을 내내 그렇게 한다. 한 겨울이 되기 전까지 할머니는 뭐든 햇볕에 내다 덜고 거둬들이기를 반복한다.

호박을 썰어 널고, 고구마 줄기, 고춧잎, 고추, 아주까리 잎, 고사리 등 무엇이든 햇볕에 내다 널고 또 넌다. 계절 따라 햇볕에 널어 말리는 종류가 조금씩 다를 뿐, 매일 대문 밖 평상에도 길가에도, 할머니 현관 앞 볕이 잘 드는 장독대 주변에도 어김없이 뭔가 햇볕에 마르고 있다. 햇볕에 잘 말린 것들은 큰 고무 통에 보물처럼 봉지 봉지에 담아 보관해두었다가 가끔 구포 장에 갖고 나가 팔기도하고 겨울까지 두었다 팔기도 한다. 커다란 고무 통은 옆집 할머니의 보물 통이다.

옆집 할머니야 말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까워서 못사는 할머니 같다. 놀고 있는 햇볕에 뭐라도 널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오늘처럼 째지게 맑은 날이면 아침 산책을 하고 나서도 이따금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이다지도 가을볕이 좋은 날에 팽팽 놀고 있는 햇볕이 너무 아까워서 나라도 좀 말려야겠다는 듯이. 뭐라도 해야 할 것 만 같아서.

우린 오늘도 타성에 젖은 채로 아무 생각 없이 오늘 이 하루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째지게 좋은 날, '생명을 살리는 햇볕'은 오늘도 제 몫을 다하는데, 가을볕 아래 우리는 제 몫을 다하고 있는지.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놀고 있는 햇볕이 제가 아깝다 아깝다 소리친다. 뭐라도 끊임없이 살려 내는 하루가 되자. 젖어 있는 나라도 햇볕에 내어 말려 쓰자. 줄창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아깝다 한다.


#햇볕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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