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도구(?)로 한 유럽 배낭여행 계획은 빈틈없이 착착 진행되었다. 여행 자금이 부족했지만 야외촬영과 벽걸이용 사진액자를 하지 않는 등 최대한 간소하게 결혼식을 치르기로 하고 친구들의 축의금을 직접 받아 여행자금을 채웠다. 추석연휴에 맞춰서 예식날짜를 잡고 결혼휴가에 여름휴가까지 붙여서 보름간의 유럽 5개국 배낭여행 일정을 잡았다.
출국은 결혼 다음 날이어서 첫날밤은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최고급 W호텔의 스위트룸에서 보내기로 했다. 그 방은 아내의 직장 상사가 선물로 마련해준 것이었다. 호텔이 제공한 리무진 차량의 영접을 받으며 호텔에 들어가 전망이 탁 트인 방으로 들어섰다. 넓은 거실에 식탁(와인바?)이 놓여 있고 침실까지 고급스러움이 한껏 느껴졌다.
친구들에게 피로연은 하지 않겠다고 미리 공언했지만 짐을 내려놓고 나니 그대로 그들을 돌려보내기는 미안했다. 그래서 근처의 호프집에서 생맥주 한잔씩 하는 것으로 피로연을 대신하려고 했다. 하지만 술잔이 금세 여러 번 돌았고, 결혼식 당일이라 밥을 한 끼도 못 먹은 위장에 술만 들어가니 취기가 금방 올라왔다.
처음의 약속과 달리 친구들은 이대로 그냥 보낼 수 없다며 크게 한 턱 쏘라는 분위기를 만들었고, 빨리 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친구들이 원하는 것(?)을 빨리 충족시켜줘서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트클럽으로 몰려갔고, 클럽에서는 결혼을 축하하는 이벤트라며 샴페인을 터트리고 키스타임과 난리부르스까지…. 피로가 가중된다고 해서 '피로연'인가…. 하지만 즐거웠다.
한바탕 정신없는 난리통이 끝났다. 악동 같은 친구들과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모르게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와서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아내는 결혼식을 끝내고 긴장이 풀린 데다가 빈 속에 건네주는 술을 다 받아서 거의 반 실신 상태였다. 첫날밤이 문제가 아니라 다음 날 출국해야 할 일이 더 걱정이 되었다.
"딩동 딩동~."'누구지?'순간, 친구들이 쳐들어왔음을 알아챘다. 하지만 혼자서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아내를 부축해 욕실에서 화장을 지우고 머리핀을 뽑아주고 있는 상황에서 문을 열 수는 없었다. 모른 척 하면 곧 갈 줄 알았는데, 밖에서는 '쾅쾅쾅' 이제는 문을 세게 두드리고 소란스러웠다. '이놈들 참 지독하네. 니들 결혼할 때 두고보자' 하면서 이렇게까지 하는 친구들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아내는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곧이어 바깥도 조용해졌고, 첫날밤은 그렇게 소란 속에서 어수선하게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 거실에 앉아서 여행 짐가방을 다시 꾸리면서 빠진 것은 없는지 확인을 하는 틈에 아내가 눈을 떴다. 아내는 간밤의 일은 까맣게 모른 채 넓은 호텔방을 둘러보면서 근사한 식사와 부대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야외촬영 비용을 아껴 구입한 비디오카메라로 호텔방을 찍으려고 버튼을 눌렀는데 동작을 하지 않았다. 순간 머리가 '띵' 했다. 구입 후 몇 번 사용할 때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전혀 동작이 안 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배터리를 다른 것으로 교체해봐도 마찬가지, 가장 중요한 물건이 동작을 안 하니 마음이 다급해졌다.
서둘러 짐을 챙겨서 택시를 타고 호텔을 빠져나와 용산전자상가로 내달렸다. 호텔에서 근사한 아침식사와 한강을 내려다보는 여유를 즐기지 못한 것보다 비디오카메라로 유럽 곳곳을 담지 못하는 사태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비디오카메라를 구입한 상점의 주인은 배터리가 완전히 장착되지 않았다며 장착방법을 상세히 설명했다. 어이없는 한숨과 함께 힘이 쭈욱 빠졌다. 다시 호텔로 돌아갈 수도 없고. 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 출발 시간까지 몇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전혀 지루하지도 않았고 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가슴이 설렜다. 비행기가 힘차게 땅을 내딛으며 날아오르는 순간 아내의 손을 꾹 잡았다.
올해로 결혼 15년째. 10주년 마다 해외여행을 가자고 했던 그때의 다짐은 5년째 보류되고 있지만 우리의 사랑과 행복은 여전히 고공비행 중이다.
덧붙이는 글 | 기사 공모 '결혼,그 사소한 모든 것' 응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