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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55) 서울시장은 당선이 확정된 지난 27일 새벽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을 만난 자리에서 첫 공식 사인으로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는 문구를 적었다. 이어 박원순 시장은 국립현충원을 참배하면서 '함께 가는 길'이라는 문구를 남겼으며, 시청으로 출근한 뒤에는 공식 업무의 첫 결재 사항으로 오는 11월부터 '서울시 초등학교 5, 6학년 무상급식 전면 확대'를 선택했다.

27일 새벽 첫 일정으로 노량진 수산시장을 방문한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자가 아이스박스 덮개에 사인을 요청한 한 상인에게 "더불어 사는 세상 서울시장 박원순"이라는 문구를 남긴 뒤 "자주 찾아 뵙겠다"고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27일 새벽 첫 일정으로 노량진 수산시장을 방문한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자가 아이스박스 덮개에 사인을 요청한 한 상인에게 "더불어 사는 세상 서울시장 박원순"이라는 문구를 남긴 뒤 "자주 찾아 뵙겠다"고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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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인과 첫 방명록 문구 그리고 첫 결재 내용을 볼 때 박원순 시장의 시정 철학은 '더불어 함께 사는 서울시'라고 할 수 있다.

과연 박원순 시장은 '더불어 함께 사는 서울시'를 만드는 도전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지난 기사('세심' 나경원 vs. '나눔' 박원순... 승자는?)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박원순 시장이 시민운동가로 활동하던 지난 2002년 12월, 그의 나이 46세 끝머리에 펴낸 책 <성공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습관... 나눔>(이하 <나눔>)의 내용을 토대로 그의 무한도전을 추적해 본다.

"나는 입학시험에서 두 번 떨어졌다. 한 번은 고등학교, 한 번은 대학교다… 만약… 무사히 합격했다면 내 인생이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게 틀림없다… 대학 생활을 시작한 지 불과 5개월 만에…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의 칼날을… 4개월의 수감 생활과 그 후 수년의 방랑 생활 동안 대학 4년 이상의 지적 탐험을 하며… 이 같은 실패의 경험들이 없었다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지금 이 곳'이 아니었을 터다… 수감 생활이 아니었다면 나는 법조인이 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새로이 역사 공부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검사의 길을 포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시민운동은 더더욱 하지 않았을 것이고."(28~33쪽)

박원순은 10대 시절 두 번의 입학시험 실패와 스무 살 때 4개월 간 감옥 생활을 겪었다. 이에 대해 박원순은 "이 같은 실패의 경험"이 소중했던 탓에 '아름다운 재단'을 이끌며 2002년 지금의 시민운동가 자리에 서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박원순은 "뒷날 생각해 보면 마치 모든 일이 예정된 절차를 밟아 온 것처럼 진행되었던 것"(29쪽)이라고 10대와 스무 살 초반의 "실패의 경험"을 아래와 같이 전한다.

수감 생활 시절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 <성경>…,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 헤세의 <싯다르타>까지… 완벽한 면학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독파"(31쪽)했다는 이야기, 단국대 사학과 재학 시절 "역사학도로서… 또 다른 세계를 경험… 동학에 대한 논문을 쓰고 새마을 운동이 지닌 성격 등을 연구… 아래로부터 일어나는 올바른 변혁의 의식은 위정자로부터 어떤 압박을 받더라도 결국은 성취된다"는 이야기 등은 박원순으로 하여금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재산인 '실패의 경험'이 나를 '나눔'의 바다로 이끈"(33쪽) 바탕이라고 규정하도록 만들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2002년 12월 펴낸 <나눔> 표지. '나 있는 곳 나 가진 것에서 아름답게 나누기'라는 문구가 보인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2002년 12월 펴낸 <나눔> 표지. '나 있는 곳 나 가진 것에서 아름답게 나누기'라는 문구가 보인다.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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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치기 잡범, "너 나가면 고시 공부해라! 돈 걱정은 말고!"

특히, "나는 아주 특별한 친구들을 사귄 적이 있다"(34쪽)며 들려준 '잡범' 소년수들과 몸을 부대낀 사연은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한 박원순의 시각을 잘 드러내 준다.

"내가 아무리 어려운 책을 읽으며 폼을 잡아도 그 친구들은 열등감을 내비치거나 '먹물'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며 비웃는 속 좁은 짓은 하지 않았다. 소매치기로 들어온 한 녀석은 대범한 목소리로 나를 격려하기까지 했다. '야! 너 나가면 고시 공부해라. 돈 걱정은 말고! 내가 다 대줄게! 너 같은 놈이 판사도 하고 검사도 해야 우리 처지를 이해할 거 아니니?'"(37쪽)

선거운동 기간 한나라당 측이 줄곧 '협찬 인생'이라고 박원순에게 시비를 걸었었는데 자칫 소매치기범의 '협찬'을 받아 고시 공부를 할 뻔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수감 생활을 통해 박원순은 법조인이 되기 한참 전에 이미 "적어도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사람이라면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38쪽)며 이런 생각을 밝힌다.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판사라면 적어도 감옥 생활을 한 번쯤은 해봐야 한다. 직접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감옥에까지 오게 되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인간과 상황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해 없이는 함부로 판관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진짜 악랄하고 노회한 사람들은 감옥에 오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얼마든지 피해 가는 길을 못 피한다는 건 이 친구들이 그만큼 순진하고 착하기 때문이란 걸 알아야 한다."(38쪽)

실제 박원순은 이때의 경험이 검사 생활을 1년 만에 관두게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뒷날, 내가 검사가 되고 나서 업무의 성격을 잊은 채 범죄자들을 변호하는 해프닝을 벌이곤 하던 것도, 결국 그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1년 만에 옷을 벗은 것도 알고 보면 모두 그 때 그 친구들의 눈빛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선하다는 믿음을 안겨 준 그 특별한 친구들이 고맙다."(40쪽)

"물론 검사의 직책은 우리 사회의 귀중한 임무 중 하나다. 다만 내가 그 길에 어울리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좀 더 따뜻하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좋은 사람들과 사귀고 싶었다. 어쨌든 죄지은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는 일 대신 죄지은 사람을 변론하는 것으로 인생길을 수정한 덕에 나는 '나눔'이라는 길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46쪽)

1980년부터 10년 주기로 바뀐 박원순의 삶

박원순의 삶을 들여다보면 24세이던 1980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10년을 주기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원순의 삶은 연수원을 거쳐 1982년 8월 검사 활동을 시작으로 법조인의 삶을 살았던 1980년대, 변호사 활동을 접고 1991년 8월 돌연 유학을 떠난 뒤 돌아와 '참여연대'와 '역사문제연구소' 활동에 집중했던 1990년대, 2000년 8월 ''아름다운 재단'을 설립한 뒤 '아름다운 가게'와 '희망제작소'로 이어지는 2000년대의 사회운동가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막 시작된 2010년대는 2011년 10월 26일 첫 발걸음을 뗀 서울시장의 삶으로 채워질 것이다.

박원순은 26세 나이에 검사로서 "곧바로 권력층에 진입"(42쪽)하고, 이어 27세부터 시작된 변호사의 삶을 통해 "어느새 부자가 되어… 기사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탔고, 다른 사람들은 뭔지도 모르는 휴대전화를 사용했고, 제법 큰 단독 주택에서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25쪽)고 고백한다.

박원순의 변호사 생활은 가장 존경받는 법조인으로 꼽히는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에서 1983년에 시작된다. 박원순은 이에 대해 "인생의 큰 행운"이며 "1980년대 이른바 인권 변론을 할 수 있던 것도 그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덕"(21쪽)이라고 적었다. 실제로 조영래 변호사는 1990년 12월 세상을 떠나기 전 병실에 누워 박원순에게 이렇게 묻는다.

"박 변호사, 돈 그만 벌고 이젠 눈을 좀 돌려 봐, 외국에도 한번 나가 보고."(21쪽)

박원순은 그때 "나에게 돈은 무엇인가?"(22쪽)라고 물으며 "브레이크도 없이 내달리는 '탐욕'이라는 열차에 올라타 있던 내게 조영래 변호사의 가슴 뜨끔한 일침이 가해진 것"을 느낀다. 조영래 변호사의 말이 "돈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앞으로 좀더 보람된 일을 시작해 보라는 조언"이라고 해석한 박원순은 1991년 8월 유학길에 오른다.

박원순의 표현대로라면 '권력층에 진입한 검사' 업무와 '탐욕이라는 열차에 올라탄 변호사' 생활을 차례로 벗어던지면서, 사회 변화를 향한 '참여(참여연대)와 나눔(아름다운 재단)'이라는 그의 무모한 듯한 도전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1994년 설립된 '참여연대'에서 박원순은 오랫동안 사무처장을 맡아 일했다. 익히 알려진 대로 '참여연대'는 재벌과 정치권력을 감시하며 시민의 입장에서 법과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특히 1997년부터 소액주주운동을 통해 대주주들의 탈법적인 전횡 하에 관행적으로 치러지던 삼성전자 등의 주주총회에서 소액주주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국민적 호응을 얻은 것과, 2000년 4월 치러진 국회의원선거에서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에 대대 낙천낙선운동을 벌인 것 등은 참여연대가 거둔 큰 성과였다. 그 중심에 박원순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어 '체크 엔클로즈드'

박원순 서울시장의 집은 도서관을 방불케 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아무래도 법률책이 많으니 고시 관련서만 가득한 서울대 법대에 기증하는 것도 좋겠소"라고 '젊은 유언장'을 통해 아내에게 남겼다. 서울대 법대생들이 고시 관련서 이외의 책도 읽으라는 이야기일 터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집은 도서관을 방불케 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아무래도 법률책이 많으니 고시 관련서만 가득한 서울대 법대에 기증하는 것도 좋겠소"라고 '젊은 유언장'을 통해 아내에게 남겼다. 서울대 법대생들이 고시 관련서 이외의 책도 읽으라는 이야기일 터다.
ⓒ 원순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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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은 국민의 권리를 위한 법과 제도를 개선하는 참여연대 활동을 넘어 다시 한 번 무모한 도전을 이어 나간다. 바로 월급 1% 나누기와 유산 1% 나누기, 전문성 1% 나누기, 끼 1% 나누기 등을 비롯해 수익의 일부분을 나누는 나눔의 가게와 나눔의 기업 등 사회 곳곳의 개인과 단체의 나눔을 전파하는 '아름다운 재단'의 설립이었다.

"1992년 겨울, 미국 하버드 법대에서 객원연구원 생활을 하던 때… 대학 신문을 들었다가 우연히 도로시 파커라는 소설가가 쓴 칼럼을 읽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체크 엔클로즈드(check enclosed)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봉투가 들어있다'라는 뜻이다. 곧 기부금이 들어 있다는 의미다.' 그 말에 나는 충분히 공감했다."(47쪽)

"피에르 신부는 프랑스 사람들이 금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라 평가하며 존경하는 인물이다… 일생을 세상의 빈곤과 불평등, 불의에 맞서 온 그는 저서 <단순한 기쁨>에서 이렇게 묻고 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성 프란체스코처럼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나누어준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이 국가의 원수건, 회상의 사장이건, 노동조합의 책임자건, 교사건, 매일 저녁 이렇게 자문했는지 묻는 것이다. '나는 나의 능력과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202~203쪽)

박원순이 '나눔 전도사'이자 '희망의 중개인'의 삶으로 가꾼 '아름다운 재단'은 2011년 현재 수만 명의 시민들과 여러 단체들이 참여한 가운데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나눔의 아름다움을 전파하고 있다.

위안부였던 고통스런 삶 속에서도 5천만원을 기부한 김군자 할머니(137쪽), 생활보조금을 받아 생활하는 궁핍한 삶에도 매달 2만원을 기부하는 한윤학씨(148쪽), 구두를 닦아 버는 100만원의 1%인 1만원을 매월 기부하는 이창식씨(156쪽), 돼지 저금통 속 9만 190원을 통째로 기부하는 5살 재서 이야기(177쪽) 등 아름다운 재단에 모아진 사연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다.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 위해 무엇을 했는가?

박원순은 책 <나눔>의 시작인 프롤로그를 '나누는 손이 아름답다'로, 끝인 에필로그를 '우리가 함께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박원순의 46세까지 삶의 기록은 <나눔>에 비교적 자세하게 나와 있다.

대한민국 1% 권력과 부유를 소유할 수도 있었던 검사와 변호사 생활을 과감하게 벗어던진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의 삶, 비판과 견제를 통한 사회구조 바꾸기에 힘썼던 30대 중반부터 40대 중반까지의 삶, 가진 것 1% 나눔을 통해 함께 행복해지는 길을 모색하며 길을 찾은 40대 중반부터 50대 중반까지의 삶은 인간 박원순의 면모를 잘 드러낸다.

그러고 보면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1% 특권층'에 맞선 '1% 나눔 전도사'가 승리했다고 할 수 있다. 오래 전 '1% 특권과 탐욕의 부'를 벗어던진 박원순이 '1% 나눔 전도사'가 되어 자신도 속할 수 있었던 '1% 특권층'을 이긴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이는 개인적으로 박원순의 승리가 더욱 감격적인 이유다.

박원순은 선거운동 기간 동안 자신의 기호 10번을, 대표 예능 프로그램인 MBC의 <무한도전> 출연진들처럼 두 손을 위아래로 편 채 외쳤다. <무한도전>은 대한민국 평균 이하 사람들의 무'모'한 도전이라며 2006년 5월 시작됐지만 지금은 '도전에 한계가 없다'는 '무한도전'으로 바뀌어 6년째 국민들의 높은 사랑을 받고 있다.

박원순은 이제 전무후무한 무소속 서울시장으로서, 사회운동가 출신의 서울시장으로서 그가 꿈꾸고 있을 '더불어 함께 사는 서울시'를 만들어내야 하는 또 다른 무한도전에 나섰다.

21일 강남구 삼성역 인근에서 거리유세를 벌이던 박원순 야권통합 서울시장 후보가 거리를 지나던 학생들과 '기호10번'을 뜻하는 열손가락을 펴보이며 기념촬영에 응하고 있다.
 21일 강남구 삼성역 인근에서 거리유세를 벌이던 박원순 야권통합 서울시장 후보가 거리를 지나던 학생들과 '기호10번'을 뜻하는 열손가락을 펴보이며 기념촬영에 응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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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시장의 무한도전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스무 살 중반부터 그가 10년 주기로 바꾸어 왔던 삶의 궤적으로 봤을 때, 박원순은 60대 초중반 또 한 번 큰 변신을 꾀할 가능성이 높다. 단, 그것은 서울시장 업무를 잘 마무리했을 때 주어질 것이지만.

끝으로, 박원순 시장에게 <나눔>의 에필로그 중에서도 맨 마지막에 남긴 문구를 되돌려준다. 이는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정을 어떻게 운전해야 하는지를 일러두는 것일 수도 있다.

"난파를 당해 죽음 직전에 다다랐던 피에르 신부의 이야기다. 살을 에는 추위와 피로에 맞서다가 실신한 뒤 다시 정신을 차리면서 나는 이제야말로 죽는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살면서 저지른 죄를 회개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한평생 자신의 손으로 가난한 자들의 손을 잡고자 애썼을 때, 비로소 죽음의 순간 자신의 다른 쪽 손에서 하느님의 손을 느낄 수 있는 것이구나.'"(239~240쪽)

박원순 시장이 선거 구호로 내세웠던 '시민 편에 서는 첫 시장이 되겠습니다!'를 완수했을 때, 서울시정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내려올 때 그를 뽑아준 서울시민은 물론 그를 지지하지 않았던 서울시민도 기꺼이 그의 손을 잡아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박원순 시장이 책 <나눔>에 남긴 '박원순의 젊은 유언장' 이야기는 개인블로그(http://blog.ohmynews.com/run63)에 올려둔다. 박원순 시장의 인생철학과 가치관 등을 엿볼 수 있어 남녀노소 모두에게 일독을 권할만 하다.



태그:#박원순, #서울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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