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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말의 잔치'가 시작되다

MB정권의 실정으로 진보진영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때에 맞춰 진보진영에서 '진보' 키워드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가히 "나는 진보다" 논쟁으로 불릴 만하다. 썩 반가운 현상이긴 하다. 하지만 소출되는 담론들을 보면 만족할 만한 게 없다. 치열하게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진보는 분열로 망하는 게 아니라, 공부를 하지 않음으로 망한다(보수의 인식 수준은 논의할 게 못 된다).

진보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최근 언급한 사람은 조국-오연호(책 <진보집권플랜>), 김규항, 진중권(이하, 한겨레신문 지면), 김어준(책 <닥치고 정치>)이다. 진보진영의 내로라 하는 '이빨'들이다. (김어준 이전 논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오마이뉴스 기사 "김규항-진중권, <진보집권플랜> 둘러싼 '진보' 논쟁" 참조)

 김어준은 2D에 머무르던 진보 논쟁을 3D로 끌어올렸다. <닥치고 정치>(푸른숲)은 '정서적 직관'을 통한 진보의 말을 보여준다.
김어준은 2D에 머무르던 진보 논쟁을 3D로 끌어올렸다. <닥치고 정치>(푸른숲)은 '정서적 직관'을 통한 진보의 말을 보여준다. ⓒ 푸른숲
최근 김어준은 책 <닥치고 정치> 등을 통해 "나는 진보다" 대열에 합류했다. 김어준은 이 한마디로 이전의 진보 논쟁을 정리해 버렸다.

"이건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정서적 직관의 영역이지. 내가 자꾸 '느낌'을 이야기하는 이유야. 대중정치는 사실 이 영역에서 결정되거든. 진보 진영에선 정치가 논리의 영역에서 결정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 <닥치고 정치>(푸른숲) 전자책 29쪽

이전의 진보 논쟁은 관념이거나 논리이거나, 최소한 정서적 직관을 감안하지 않은 2D의 차원에서 전개되었고, 김어준은 3D 수준으로 논의를 끌어올렸다. 2D와 3D를 구분하는 기준은 김수영 시인의 시론이 던져준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 김수영 산문선집 '시여 침을 뱉어라', 민음사(1975)

여기서 시작(詩作)을 '진보'로 바꿔 써도 좋다. 2D까지는 밑단부터 차곡 차곡 쌓아가는 이른바 '선형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나 3D부터는 쌓는 순간 전체가 되고 영원이 되는 직관의 영역이다. 이것은 내 주장이 아니다. 이미 4세기 전인 17세기 르네상스 시대부터 유럽에서 줄곧 논의되던 방식이다.

참된 원리들로부터 직접 도출되는 명제들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때로는 직관에 의해 또 때로는 연역에 의해 인식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참된 원리 자체에 대해서는 직관에 의해서만, 반면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결론들은 연역에 의해서만 인식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데카르트,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1628년)

스피노자 인식의 3단계(에티카) : 첫째, 감각은 영혼의 표상을 초래한다. 이것은 원인에 관한 통찰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에 대한 관계를 밝히지 못하므로 불완전한 인식이다. 둘째, 이성은 보편 개념을 가지고 표상을 가다듬는 것, 즉 표상의 원인을 발견하여 더욱 높은 단계의 인식에 도달한다. 셋째, 실체에 대한 인식은 직관적인 인식에서 도달된다. (1662~1665)

김어준의 '사바나 가설'에 대한 교정

김어준은 진보와 보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를 사바나의 원시 세계로 데리고 간다. 포식자나 자연재해 등 예측할 수 없는 공포에 대해 살고자 하는 욕망의 자세에서 좌와 우가 구분된다는 논리다. 여기서 '우'는 공포에 지배당한 자들이 살려고 발버둥치는 '반응'에 불과하기 때문에 세계관이라고 하기 뭣하다는 게 김어준의 입장이다. 그래서 우를 '겁먹은 동물'에 비유한다. 다만, 보수에게 '세계관'이라고 이름을 붙여줄 수 있다면 그것은 '자존심'이다. 자존심 없는 우는 역시 동물일 뿐이다.

이에 반해 좌는 공포의 구조(시스템)를 상대하며 모든 사람이 부담할 수 있도록 논리의 칼로 잘게 잘라낸다. 그래서 반응보다는 '세계관'으로 불릴 만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밀림 전체를 상대하면서 오만에 빠져 대중들로부터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를 '사바나 가설'이라고 부르겠다.

김어준의 사바나 가설은 보수에 대한 노골적인 폄하와 함께 진보에 대한 과도한 상대우위이다. 솔직히 좀 유치하다고 생각한다. 김어준이 이야기하는 우와 좌의 시점은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불공정하기까지 하다. '18세기 우'와 '21세기 좌'를 비교할 수 있을까?

좌가 공포를 구조화하는 인식에 도달했다면 우 역시 그러한 인식에 도달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 게임이 되지 않을까? 역사는 좌와 우의 끊임없는 경쟁이니까. 이보다 더 과학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어느 순간부터 직립보행을 하기 시작하면서 앞발, 즉 두 손에 여유가 생겼다. 직립보행 자체도 전체 구조의 변화다. 내게는 27개월 된 민준이와 9개월 된 민서 두 아기가 있다. 민서가 7개월 될 때만 해도 형 민준이는 '민서야, 까꿍~!' 하면서 아기 대접을 해줬다. 그런데 민서가 9개월이 되자 밥상을 짚고 일어섰다. 이때부터 민서에 대한 동생 대접이 끝났다. 민준이는 민서 위에 올라타며 친구처럼 놀았다. 이것이 세계의 일반적인 변화다.

사바나로 돌아가 보자. 인간은 남은 손으로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다. 즉 소셜미디어다.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협업을 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좌와 우가 구분되지 않는다. 마치 일제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에 좌와 우가 구분없는 것처럼. 잉여물이 생기고 부족이 생기면서 권력이 등장한다. 지배가 시작되고 전쟁이 시작되고 제국이 생겨난다. 이 지점에서 '우'가 탄생한다.

우는 높은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이며, 좌는 낮은 피해대중을 생각하며 권력에 저항하는 의지이다. 동양에서 우를 대표하는 지식인은 공자, 맹자, 한비자 등이며, 좌를 대표하는 지식인은 노자와 장자, 묵자 등이다. 좌와 우의 관심사는 '낮은 곳', 즉 대중이지만 각자 대중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뿐이다. 한나라당이 '복지'를 '시혜'로 해석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3D 진보논쟁을 좀 더 자세히

김어준을 포함해서 지금까지의 진보 논쟁이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진보'와 '보수'를 구분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제까지 보수가 만들어 놓은 프레임이다. 이를 박차고 뛰쳐나와야 한다. 즉, "진보, 보수"라는 '구분'이 아니라 "진보-보수"라는 '섞임' 속에서만 진정한 진보 논쟁이 가능하다. 동양의 음양 이론의 거울로 보면 진보와 보수를 바라보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섞임'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는 양(陽), 어머니는 음(陰)이지만,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어머니가 양 자식이 음이 된다. 그러니 내가 없을 때는 어머니를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존경해야 한다"
-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

다산 정약용이 보여주는 음양이론의 특징은 음과 양이 서로 위치를 바꾼다는 데 있다. 이것은 주역의 일반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진보와 보수 간에도 이런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

"한마디로 총괄해서 정리하자면 이념은 서구의 것이되, 그걸 수행하고 주장하는 방식은 여전히 성리학자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거지."
- <닥치고 정치> 전자책 593쪽

요컨대 진보는 보수의 안에서 파악될 수밖에 없고, 보수 역시 진보의 안에서 파악될 수밖에 없다. 한 국가를 지휘하는 장군의 전투력을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은 장군 본인도 아니고 부하들도 아니고 왕도 아니고 백성도 아니고 오직 적병과 적장이다. 적과의 교전 속에서만 장수의 능력이 표현되는 것이니까. 음양이론 중 하나인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하늘은 틀이 있으면 죽고, 땅은 틀이 없으면 죽는데, 사람은 하늘과 땅이 없으면 죽는다."

결국 남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진보성, 보수가 아니라 보수성, 그 비율의 차이뿐이다. 이 비율 중 진보성이 51% 이상이면 '진보'라 표현하며, 진보성이 49% 이하라면 '보수'라고 표현한다.

 플라톤(왼쪽)과 아리스토텔레스(오른쪽)을 구분하고 읽어버리면 서양철학의 첫단추를 잘못 끼운 셈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안에서 플라톤을 읽고, 플라톤 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어야 한다.
플라톤(왼쪽)과 아리스토텔레스(오른쪽)을 구분하고 읽어버리면 서양철학의 첫단추를 잘못 끼운 셈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안에서 플라톤을 읽고, 플라톤 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어야 한다. ⓒ
음양이론뿐 아니라 서양철학으로도 진보와 보수를 설명할 수 있다. 플라톤은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고,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는 유명한 그림인 이탈리아의 화가 라파엘로(1483~1520)의 "아테네학당"(School of Athens, 1510~11)을 직관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면.(그림 참조) 플라톤(왼쪽)이 들고 있는 책은 "티마이오스Timaeus"로 추상적, 논리적 철학으로서의 정신적 이데아를 상징한다. 아리스토텔레스(오른쪽)가 들고 있는 책은 "니코마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으로서 자연과 생물의 관찰을 중시하는 현상적, 경험적 철학을 상징한다.

이 그림의 포인트는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다. 바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관계 그 자체다. 즉,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 안에서 의미를 가지며,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플라톤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구분하는 순간 철학은 공허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플라톤이 의미를 획득했고, 플라톤이 있었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철학을 정립할 수 있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

김어준을 읽을 때 주의사항

김어준은 '직관'의 언어를 사용한 근래 보기 드문 진보논객이다. 김어준의 '정서적 직관'은 충분히 대중적이며 '스타일 돋는다'. 하지만 반쪽의 정서, 반쪽의 직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진보성-보수성, 음-양처럼 모든 것은 짝을 이룰 때 의미가 분명해진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남성성-여성성이 있다. 물론 남성과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있지만 모든 인간은 정자와 난자의 결합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나 남성성-여성성을 가지고 있다. 이 비율에 따라서 시대정신이 결정된다.

김어준은 자칭 타칭 '마초'다. 남성성 과잉이다. 김어준의 '말'을 대할 때 정서적 쾌감과 동시에 '정서적 반감'이 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은 김어준의 '타고난 애티튜드'이기 때문에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김어준을 읽을 때 이 부분에 주의를 해야 한다.

기질과 정신적 능력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손 치더라도, 여자들 사이에서 여자에 의해 길러진 남자들은 다른 남자들과는 좀 다른 데가 있다. 유모적 보살핌과 어머니의 귀여움, 그리고 누이의, 특히 '작은' 어머니라 할 수 있는 큰누이의 사탕발림은 남성적 기질을 반죽처럼 주무르면서 바꾸어 버린다. 출생 이후 여인의 부드러운 분위기, 그녀의 손과 가슴, 무릎과 머리, 그리고 넘실거리는 그녀의 유연한 인상이 풍기는 향취에 오랫동안 젖은 남자는 예민한 신경과 돋보이는 품성을 갖게 된다. 이를테면 그는 남성과 여성을 다 지니고 있는 인간이 되는데, 이런 속성이 없으면 더없이 힘차고 엄격한 천재도 예술의 완벽성에 있어서 미진한 존재로 남을 뿐이다.
- 보들레르(프랑스 시인)

우리들의 시대정신은 '아빠 멘토'가 아니라 '엄마 멘토'다. 아빠 멘토는 김어준처럼 한수 가르치고 명령하는 방식이다. 엄마 멘토는 상처를 보듬고 이야기를 경청하고, 세심하게 설명을 해준다. 물론 김어준의 말에 상처를 위로받을 수 있지만, 김어준이 보듬어주지 못하는 상처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 부분에 유의하며 '나꼼수'와 '닥치고 정치'를 권한다.

김어준은 '개념찬 꼰대'로서 '구시대와 새 시대를 연결짓는 연결고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구시대의 연결고리를 증명하는 간단한 방법은 나꼼수 방송을 듣고나 <닥치고 정치>를 읽은 후에 질문을 하나 던져보면 된다.

"그래서 어떻게?"

이것은 김어준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새시대의 연결고리'들이 찾아야 한다. 김어준은 다만 몰상식이 진흙탕처럼 흐르는 시대를 증언하는 데 머무른다. 사람에 대한 최대의 예의는 제대로 그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김어준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예의다.


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푸른숲(2011)


#김어준#닥치고 정치#진보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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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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