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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고공농성이 11월 1일로 300일을 넘겼다. 그동안 수많은 연대의 손길이 이어졌고 사회적 관심이 모였다. 그럼에도 농성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답답하다. 하지 못한 말도, 들어야할 말도 여전히 많다. 희망의 볼륨을 높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말들이다. 11월 1일 서울 갈월동 한진중공업 본사 앞에 '희망의 부스'가 차려진 이유다.

'희망의 부스(버스라고 쓰고 부스라고 읽는다)'는 11월 1일 정오부터 3일 오후 7시까지 진행되는 라디오 방송이다. 영화감독, 예술가, 기자, 활동가 등 다양한 이들이 참여해 대담과 공연을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길거리와 인터넷으로 전파된다. 주최 측은 "주로 한진중공업과 재벌 문제, 나아가 한국 사회의 다양한 이슈를 중심으로 한다. 재밌으면 좋고 재미없어도 좋은 방송"이라고 설명했다.    

그리운 사람들과의 통화... "6차 희망버스 전에 승리했으며"

김진숙 지도위원과 통화중인 배우 김여진씨.
 김진숙 지도위원과 통화중인 배우 김여진씨.
ⓒ 노동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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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방송-보이는 라디오'는 그리운 사람들과의 전화통화와 노래로 꾸며졌다. 수배생활 중인 송경동 시인이 전화를 통해 시를 읊었다. 배우 김여진씨도 임신으로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참여했다. 얼마 전 한 신문에 기고한 칼럼의 의미를 설명하며 그는 말했다.

"뭔가 만들어내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진짜 강자죠. 그 도움을 받고 사는 게 나고... 서로 연결돼 있고 서로 도움 받으며 사는 게 사람이잖아요. 다만 이들이 약자가 되는 건 잘못된 계약조건 때문인 거고. 그걸 제대로 되돌려놔야죠. 정치인이 이걸 정당화 하면서 다만 '약자를 돌보겠다'고 말하는 건 잘못된 거죠."

이어 김 지도위원과 전화가 연결되었다.

"제 말이 들리세요? 잘...계세요?"

김씨의 눈이 붉어졌다. 역시 미미하게 흔들리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김 지도위원이었다.

"잘... 있습니다. 잘 지내세요?"

김씨의 눈물이 결국 터졌다.

"네. 배 많이 나왔고요. 많이 쉬었고... 연극 연습하고 있어요. 보러 오셔야 되는데. 자리 비워 놓을게요. 아니 무대 위로 모실게요."

첫사랑 얘기, 매운 음식이 당긴다는 얘기, 좋아하는 책은 "날라리들이 낼 책을 위해 비워두겠다"는 얘기 등 짧고도 따스한 통화가 울면서, 웃으면서 이어졌다.  

희망버스 초기만 해도 가벼운 마음이었다고 김씨는 밝혔다. 그저 맨손의 조합원을 방패로 내려찍는 용역의 사진 한 장, 트위터를 통해 나눈 김 지도위원과의 마음. 그를 부산까지 날아가게 한 건 그것 뿐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떨어져 있는 날들이 너무 길다.  김씨의 웃는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저는 사실, 11월 26일 6차 희망버스가 안 갔으면 좋겠어요. 그 전에 이기고, 승리대회도 하고, 김진숙씨가 내려오면 하고 싶다던 거, 목욕하고, 찜질하고, 늘어지게 자는 거, 다 한 후에 26일을 맞았으면 좋겠어요."

김 지도위원이 한 시간이라도 빨리 내려왔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을 모두가 다시 확인했다. 김여진씨는 "아이가 태어나면, 김진숙씨가 미역국을 끓여줬음 좋겠다"고 덧붙였다.

85호 크레인 사수대 박성호·박영제·정홍형씨와의 통화도 이뤄졌다. 그들이 올라온 지도 128일이나 지났다. 박성호씨는 "날이 뜨거웠던 것, 생리현상을 제대로 해결하기도 힘들었던 것, 그 중에서도 용역과 대치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던 고충은 다짐으로 끝났다.

"이후 투쟁이야 어쩌겠습니까. 끝까지 버티는 게 이기는 거 아입니까. 국회서도 청문회하면서 한진 본이, 정리해고가 부당하다는 이런 것들이 알려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곧 숙일 줄 알았는데 워낙 발악하고 있어서, 저희는 계속 크레인 사수하면서 버티고, 밑에선 정투위 동지가 싸우면서 꼭 이기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가 박씨의 아들, 슬옹이의 편지를 읽었다. 태어날 무렵엔 해고투쟁 탓에 감옥에 있었다. 열 다섯이 된 지금은 크레인 위에 있다. '슬기롭고 옹골차게' 키우고 싶은 아들의 곁을 자꾸만 비울 수밖에 없는 아버지는 그저 미안하기만 하다.

"아버지 노릇 잘 못 하는데..." 

서로가 서로를 바꿨다

밤 10시께에는 독립영화감독 박성미씨와 김 지도위원이 전화 통화를 나눴다. 김 지도위원이 크레인 위에서 가장 힘든 건 "감정을 관리하는 일"이라고 밝히면서 젊은 시절의 아픔을 끌어냈다.

"밤낮 주말 없이 일해야 125시간 잔업이 나오거든요. 그렇게 일만 하면서 살았으니까, 내 또래 아이들이 놀러가는 거 보면 정말 부러웠어요. 생활이 이러면 그런 걸 빨리 포기를 해야 하는데, 젊어서 그랬는지 포기가 안 되고 상처가 되더라고요.

공장에는 다 남자들이고, 나이대도 다르니까 친구가 거의 없었어요. 관심사도 언어도 다른, 웃고 떠들지만 친구는 되지 않는 그런 어떤 외로움... 그런 상황에서는 외롭다는 생각을 안 해야 합니다. 여기도 그래요. 감정을 자제하는 일이 큰일이거든요. 평상심을 유지하는 게 제일 힘들고, 제일 신경 써야 하는 일이에요."

김진숙 "날라리에게 강한 충격 받았다"

박 감독은 '날라리 외부세력'으로서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사실 날라리가 노동운동과 맞는 걸까 하는 고민, 개인적으로는 어찌 보면 자본의 혜택을 잘 누리고 살던 일반 시민이라는 죄책감도 있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지도위원이 답했다.

"날라리들이 제게는 굉장히 강한 충격이었어요. 그동안 노동운동은 굉장히 결연하고 비장하잖아요. 완전히 종이 다른 사람들을 접한 건데, 근데 나는 그게 굉장히 편했어요.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라는 말에 너무 너무 깊이 공감했고. 그런 게 일대 전환점이 된 거 같아요. 사람들에 대한 경직된 시선도 바뀌고. 사람에 대해 깊이 있게 보게 된 거 같아요.

트위터로 이렇게 보면 낮에는 그냥 잡담이 오가는데, 날라리들 만나기 전의 나였다면 그런 대화엔 귀 기울이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어떤 생각을 할까, 깊이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대단히 깊이 있는 사유도 하고 통찰도 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저는 한 친구가 강정에, 카페마리(명동 재개발지역)에 일이 있다니까 제 일을 내던지고 쫓아가는 데 상당히 놀랐어요. 그렇게 일상에서 연대하면서 사는 모습에. 그게 그냥 단순히 그 사람들이 가진 어떤 죄책감의 문제 이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 진심, 어떤 심성 이런 게 있는 거 같아요."

김 지도위원은 "모두가 나한테 '미안합니다 3종 세트'를 말하는데, 고공농성은 처절한 농성인 건 맞다. 다만 나한테는 이게 단순히 처절함만은 아니다. 오히려 내면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되고, 굉장히 뜻깊은 시간들이다"라며 11월 26일날 보자는 말로 인사를 보냈다.

앞서 '크레인 그리고 우리는' 코너를 진행했던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은 이 과정에서 긍정적인 힘을 읽어냈다.

"사실 고공농성은 굉장히 극한 투쟁이잖아요. 일반 시민들이 가서 응원하고 그러는 건 없었던 일이죠.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연대의식을 보이고, 소통했던 거 자체가 엄청난 사건이라고 봐요. 시민들의 의식 변화의 분기점이 되지 않을까. 실제 이 농성 이후에 SNS를 봐도, 사회에 대한 안목이 스스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인 경우가 많았어요. 예전엔 이명박 욕만 하다가 이젠 더 나아가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얘기하거나, 이명박과 대립하면서 마치 노동자 서민편인 양 행세하는 정치세력을 견제한다던가. 이런 발전된 모습이 많이, 빠르게 늘어난 거 같아요. 긍정적이라고 봐요."

희망부스.
 희망부스.
ⓒ 노동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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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끝날지는 모른다. 다만 서로가 서로를 찾았다. 그리고 바뀌었다. 그게 '열쇠'라고 김 발행인은 말했다.

"조남호씨나 현 경영진의 태도가 지나치게 저급해서 쉽게 해결될 거 같진 않아요. 하지만 김진숙씨가 올라갔는데, 옛날 고공농성 하듯이 관심 갖는 사람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에요. 결국은 노동자인 시민들의 연대와 관심, 이것이 내 일이라는 뚜렷한 태도가 해결의 관건이 아닐까."

누군가 김 지도위원에게 첫사랑을 물었다. "너무 짧았고 강렬하고, 그래서 아팠다"고 그는 답했다. 이런 가을 무렵이었단다. 지금 그도, 노동자들도, 우리 사회도 퍽 아픈 가을을 보내고 있다. 다만 최대한 짧기를, 이리 아팠던 만큼 모두가 성숙해지길, 바랄 뿐이다.


태그:#희망버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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