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부터 2011년 <오마이뉴스> 지역투어 '시민기자 1박2일'이 시작됐습니다. 이번 투어에서는 기존 '찾아가는 편집국' '기사 합평회' 등에 더해 '시민-상근 공동 지역뉴스 파노라마' 기획도 펼쳐집니다. 이 기획을 통해 지역 문화와 맛집, 그리고 '핫 이슈'까지 시민기자와 상근기자가 지역의 희로애락을 자세히 보여드립니다. 어느덧 다섯 번째, 이번엔 광주·전남·전북입니다. [편집자말] |
"우리만 오면 꼭 이래요. 갑자기 비가 왔다가 눈이 왔다가. 한 번도 좋은 날을 본 적이 없어요"
하늘까지 무심했다. 10월의 마지막 날, 동해 연안에 접한 일본 중부(北陸)지방에 위치한 인구 42만의 도야마(富山)시. 속까지 검게 타들어가는 김정주(81. 서울. 전남 순천 태생) 할머니의 날씨 타박이었다.
한 가닥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번 재판마저 패소한다면 더 이상 생전에 희망이 없기 때문.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정부와 후지코시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게 지난 2003년. 장장 8년여의 지루한 재판 끝에 원고 중 4명은 이미 사망했다. 급기야 지난달 24일에는 1심, 2심에 이어 일본 최고재판소에서도 최종 기각당했다. 이번에도 1965년 한일협정이 발목을 잡았다.
"언니 만날 수 있다고 해서 왔는데...""우리가 도야마에 도착할 때도 2월이었어요. 얼마나 눈이 많이 오던지, 그런 눈은 태어나서 처음 봤죠. 그해에 가장 눈이 많이 내렸다고 하더라고요. 마당의 눈이 거의 지붕까지 차 있었어요. 굴을 기어 가는 것처럼 겨우 사람 하나 지날 수 있게 길을 만들어 놨더군요. 고향을 찾아가고 싶어도 어디가 동쪽이고 어디가 서쪽인지 모르니.... 우린 죽었구나 생각했죠"
기각 소식 때문일까. 할머니의 한숨 소리는 어느 때보다 깊었다. 때론 알 수 없는 밑바닥 그 어디에서부터 몰아쉬는가 하면, 어느땐 맥없는 신음소리 같았다.
최고재판소 판결로 이제 더 이상 사법적 구제의 길도 막힌 상황. 언제 도야마에 다시 와 볼 지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군수업체 후지코시 회사로 끌려 온 때는 초등학교 졸업을 코앞에 둔 1945년 2월께. 아직 철부지인 만 13살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인생의 끄트머리인 여든한 살에 이르렀다.
"지금도 분하고 떨려서 말이 안 나와요. 그래도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오니 힘이 생겨요"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일본 방문길에 하나밖에 없는 고등학생 손자도 어렵게 동행했다. 그러나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탓인지, 아니면 이런 상황이 아직 부담스러운 것인지 할머니의 기대와 달리 많이 겉돌고 있었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적잖이 변덕스런 날씨였다. 밤새 내리던 비가 멈추고 아침에 화창하게 개는가 싶더니, 점심 무렵이 되자 시커먼 구름이 몰려와 하늘에서 금방 소나기라도 뿌릴 기세였다.
"오늘 (참가자) 숫자는 이 정도일 것 같습니다. 우선 정문에 도착하면 다시 한 번 후지코시 사장 면담을 신청해 볼 계획입니다. 그러나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할머니들의 손해배상소송을 지원해 온 '제2차 후지코시(不二越) 강제연행 강제노동 소송을 지원하는 호쿠리쿠(北陸) 연락회' 나카가와 미유키(中川 美由紀) 사무국장의 설명이었다.
지원단체인 호쿠리쿠연락회가 일본이 저지른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며 할머니들의 소송을 도운 지도 십수 년째. 변호인단을 꾸려 무료 변론은 물론, 매번 재판 때마다 할머니들의 체류비와 항공비 일체를 지원했다. 할머니들의 건강을 살피기 위해 한국도 수차례 방문했다.
이들은 지난 9월 28일 외교통상부를 방문하기도 했다. 헌법재판소 판결에 따라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일본정부와 협의를 할 때 근로정신대 문제도 다룰 것을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그런가 하면 이들은 일제 전범기업들이 한국 정부가 발주하는 사업 입찰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 달도 안돼 또 한국을 찾았다. 후지코시 회사도 일제 전범기업 명단에 포함하라고 국회에 요청했다.
회사측에 교섭을 요청한 것도 수차례다. 그러나 아직 재판 중이라는 이유로 매번 무시당했다. 재판이 끝난 만큼, 이번에 다시 회사측 문을 두드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회사측은 재차 만날 생각이 없다는 입장을 시위 하루 전 지원단체에 통보했다.
점심 대신 주먹밥 하나씩을 뭉쳐 쥐고 나선 항의시위. 그러나 항의시위라는 게 무색할 정도였다. 참가자는 고작 스무 명도 채 안 됐고, 그것도 젊은 사람 몇 명을 제외하면 족히 60대에서 70대, 많게는 80대에 가까운 이들이었다. 그나마 한국에서 온 몇 사람이 겨우 체면치레를 하는 모양새였지만 애초 후지코시를 상대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후지코시는 도야마를 대표하는 굴지의 토착기업. 시내에 별도의 사원 주택을 두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종합병원과 회사 이름으로 공업 고등학교까지 운영하고 있다. 지역 사람들이 이 회사 종업원들을 부러워할 만큼 지역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기도 하다.
회사는 아예 오전부터 일찌감치 정문을 봉쇄하고 나섰다. 그것도 안심이 안 됐던지 평소와는 다르게 후문에도 경비원을 3명이나 배치했다. 아니나 다를까, 날씨가 다시 말썽을 부렸다. 시위 현수막을 펼치기가 무섭게 우두둑 장대비가 쏟아졌다.
"10살 때 아버지 징용으로 끌려가고, 12살 때 언니는 나고야 미쓰비시로 끌려가고, 그것도 부족해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내게 '일본에 가면 언니도 만날 수 있고 공부도 시켜 준다'며 후지코시로 데려왔다. 후지코시는 양심이 있으면 당장 나와라!"김정주 할머니의 핏발 선 목소리가 담장을 타고 넘었다. 그러나 정문을 굳게 걸어 잠근 후지코시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눈치였다.
"한국에서 시민들도 함께 왔다. 시민들도 함께 할 것이고, 이제 한국정부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분풀이라도 하듯이 할머니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당찼다.
쇠창살 틈에서 몸부림... "내 서류 좀 받아!"도야마에 도착하자마자 후지코시가 새로운 증산 계획에 따라 기간제 직원 250명을 신규 채용한다는 기사를 봤다. 지역신문에 크게 신규 직원 채용 소식을 장식하는 후지코시 회사였지만, 사장 얼굴 한 번 보겠다는 김정주 할머니의 바람은 일거에 외면했다.
보다 못한 할머니가 먼저 뛰어들었다. 회사 정문으로 들어가 보려 쇠창살 틈에서 몇 번을 몸부림을 쳤지만 모두 허사였다. 요구안이라도 받아달라며 지켜보는 경비원들을 향해 애타게 서류를 내밀어 봤지만 부질없는 헛손질일 뿐이었다.
급기야 일본 지원 단체의 한 회원이 면담 신청서를 직접 전하겠다며 담을 넘었다. 그러나 곧바로 달려온 경비원들과 몸싸움 끝에 맥없이 끌려나오고 말았다. 어느새 회사측의 구원요청이 있었는지 경찰까지 달려와 있었다.
추적추적 내린 비에 어느새 옷까지 젖었다. 그 꼴이 항의시위라고 하기에는 위신도 서지 않고 체면도 구긴, 영락없이 초상집 개만도 못한 신세였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낯짝이 있으면 사장 나와 봐! 뭣이 무서워서 코빼기도 안 보이냐! 후지코시 이 도둑놈들아! 이 도둑놈들아!"분을 삭이지 못한 할머니는 끝내 오열하고 말았다.
"이런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 비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후시코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한스러운 눈물입니다. 머나먼 땅에서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오신 여러분들을 뵈니 저희들이 부끄럽습니다."광주에서 온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김희용 대표가 말했다. 지켜보는 행인도 없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1시간 30여분의 항의시위는 이렇게 막바지로 향했다.
"후지코시 사장은 들어라. 이제 시민들도 같이 나서고, 한국정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지금은 우리를 얕보지만 명심해라. 내가 비록 내일 죽는 한이 있어도 내 자식이 있고, 또 손자가 있다. 이것이 결코 끝이 아니다."못내 아쉬운지 마지막까지 할머니는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최고재판소 판결에도 호쿠리쿠연락회는 다시 새로운 투쟁을 준비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변방의 한 도시에 불과한 지역에서 외치는 이들의 외로운 목소리에 후지코시 회사가 얼마나 귀 기울일지 의문이다.
앞과 뒤가 다른 일본을 탓하기는 쉽다. 그러나 일본의 과거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이 시각에도 외롭게 싸우는 일본인들 앞에, 정작 우리는 얼마나 떳떳할 수 있을까?
"재판하러 (일본에) 올 때마다 일본인들이 '한국에서는 뭐 도와 준 것 없느냐'고 묻는데, 부끄러워서 말도 못했어요. 우리정부가 뭔 죄를 지었어요? 왜 말 한마디 못하고 꼬리부터 내려요."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66년, 인생의 황혼녘에 서 있는 근로정신대 할머니의 이 단순명료한 질문 앞에 우리 정부는 뭐라고 답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