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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를 수확하기 전 물이 차 있는 논바닥에서 낫질하여 장화가 논흙 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벼를 수확하기 전 물이 차 있는 논바닥에서 낫질하여 장화가 논흙 투성이가 되었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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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말,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숫돌에 낫을 갈아 논으로 나섰습니다. 허리 굽혀 콤바인이 벼를 다치게 하지 않도록 논 가장자리를 둘렀습니다. 오후에는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글쓰기 공부를 해야하니, 주경야독이 따로 없습니다.

약속 시간에 맞춰 콤바인이 도착했습니다. 콤바인을 모는 사람은 지난여름 모를 심을 때 논두렁에서 친구 먹은 동갑내기 최공식씨 입니다. 논두렁 친구는 위풍당당하게 콤바인을 몰고 오더니 몇 줄 베다 말고 운전대에서 손을 놓습니다. 벼 포기가 뿌리째 뽑혀 나와 자꾸만 콤바인에 걸리고 해풍으로 나락까지 누워 있었기에 쉽지 않은 작업이었던 모양입니다.

"이거 안 되겠는디... 에이참, 진작에 베었어야지"

위 다랑이 논 가장자리에서 벼가 뿌리채 뽑혀 나와 걱정을 했지만 별 탈 없이 수확했습니다.
 위 다랑이 논 가장자리에서 벼가 뿌리채 뽑혀 나와 걱정을 했지만 별 탈 없이 수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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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바인을 몰고 있는 논두렁 친구 최공식씨
 콤바인을 몰고 있는 논두렁 친구 최공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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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를 심을 때도 물이 적거나 많아 고생깨나 했던 논두렁 친구였기에 나는 안절부절 했습니다. 콤바인에 걸린 벼 포기를 뽑아내며 슬그머니 논두렁 친구를 살폈습니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아이구 저 인간, 못 베겠다고 "땡깡" 부리면 어떡허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친구, 이거 안 되겠는디… 보다시피 벼 포기가 자꾸만 걸려, 에이참, 진작에 베었어야지."
"내가 원래 느려 터져서… 가생이는 좀 그래두, 안 쪽은 괜찮은 거 같은디, 그냥 하는디 까정 하자구…."
"하참…."

미안한 마음에 낫을 들고 부지런히 뿌리가 뽑혀 나오는 벼들을 벴습니다. 논두렁 친구는 마지못해 장발머리에 바리깡질 하듯 쫘르륵 벼 나락을 밀어대며 반대쪽으로 콤바인을 돌립니다. 반대쪽에서부터 베니까 벼 뿌리가 뽑히지 않습니다.

낫질을 멈추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아래 다랑이 논이 걱정이었습니다. 위 다랑이는 벼 뿌리가 뽑혀 나올 정도로 거의 메말라 있었지만 아래 다랑이 논은 물이 너무 많이 차 있어 콤바인이 빠져 버리면 어쩌나 싶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물을 빼 놓았는데 둠벙에서 솟아 나오는 물과 그 사이 내린 비로 논바닥에 물이 흥건했습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는 법인가 봅니다. 가을비가 내리면 한창 가뭄을 타고 있는 배추, 무, 마늘 등의 가을 작물에게는 감로수지만 벼 나락에는 달갑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 만족할 수는 없나 봅니다. 어느 한 쪽이 기쁨을 누리면 어느 한 쪽에는 고통이 잦아드는 모양입니다. 욕심을 거둬내면 그 고통을 느낄 수 없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요. 

그나저나 벼논에 물이 적거나 물이 너무 많아 논두렁 가장자리 벼 나락이 제대로 여물지 않아 보여 걱정이었습니다. 화학비료나 농약 한 방울 치지 않고 단지 우렁이와 유기농 퇴비 조금 넣었을 뿐인데 병충해도 없이 올해 농사 잘 됐다며 동네방네 나발 불고 다녔는데 걱정이 눈앞을 가립니다.

콤바인에서 트럭으로 수확한 나락을 부어 담고 있습니다.
 콤바인에서 트럭으로 수확한 나락을 부어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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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수확을 도는 동네 분들, 나락이 실하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사진을 올려 주기로 약속했는데 미처 이름을 묻지 못했습니다.
 벼수확을 도는 동네 분들, 나락이 실하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사진을 올려 주기로 약속했는데 미처 이름을 묻지 못했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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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 우렁이 살 때 내 것두..." 유기농 가족이 또 늘었다

위 다랑이 논 수확을 무사히 마치고 길가에 세워진 트럭에 벼나락을 퍼올려 놓습니다. 내내 콤바인 주위에서 일손을 돕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벼나락을 포대에 담으면서 그럽니다.

"나락이 실하네요, 잘 여물었네요이."
"농약은 물론이고 화학비료도 안 주고 그냥 유기농 거름 쪼금 뿌렸는디 생각보다 잘 나왔네벼요."

"나락이 아주 좋네요. 나두 한번 해볼까?"
"그류, 유기농으로 하믄 훨씬 좋지요. 우렁이 넣었더니 피 한 포기 없더라구요. 농약값이나 비료 값에 비하면 훨씬 좋지요. 화학비료나 농약 안 치면 사람에게도 좋고 땅에게도 좋고, 올해처럼 병충해가 없다면 수확도 좋구요."

"내 논이 저기 산 아래에 뚝 떨어져 있는디, 괜찮을까요?"
"그럼 더 좋쥬, 주변에 농약 날아올 일도 없구. 쌀 가격도 관행 농보다 배로 받을 수 있구요. 판로가 문제이긴 하지만…."

"우리 먹을 거만 지을 건디요 뭐, 내년에 우렁이 살 때 내 것두 사주세요이."
"아, 좋지요. 근디 내년에는 병충해가 어떨지 모르겠네요…."

그동안 우리 동네에 유기농 농가가 단 한 가구도 없었다는데 그렇게 또 한 사람의 유기농 가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공연히 기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다들 병충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용케 잘 넘어갔지만 내년부터가 문제입니다. 본래 첫 해 농사는 대체로 별 탈 없이 잘 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아래 다랑이 논 수확을 앞두고 아내가 간단한 새참을 준비해 왔습니다. 사실 새참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막걸리 대신 맥주 몇 캔을 사왔습니다. 간단하게 목을 축이고 나서 마저 일을 마치고 점심밥을 같이 먹기로 했습니다.

"두 분 중에 누가 화가요?"
"에이, 화가는요, 그냥 마누라가 그림을 그리는 디…."

"이거 그리면 좋겠네요이. 이렇게 논에서 뭘 먹는 거 그리면 안 되나요?"
"예전에 그런 분이 있었쥬. 서산인가 어딘가 민중화가라구, 가마니때기에 농민들 그림을 그리는 분이 있었는디, 지금은 뭘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네요. 그림은 좀 그렇고, 내가 세 분 일 하시는 거, 인터넷에 올려 드릴께요."

논두렁 친구 공식씨는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비우고 나서 콤바인을 몰고 아래 다랑이 논으로 위풍당당 들어섭니다.

"괜찮겠어? 물이 많은 데는 이틀에 걸쳐 죽어라 돌려 놨긴 했는디, 콤바인이 빠지지 않을까이? 그냥 물 빠지고 며칠 있다가 할까?"
"빠지면 친구가 책임져야 혀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논두렁 친구는 콤바인을 몰고 진흙탕을 잘도 헤쳐나가며 벼를 벱니다. 물 걱정으로 허둥대는 나를 놀려 댄 것입니다. 충남 공주에서 벼농사를 지을 때는 좁은 평수의 논이었기에 손모내기를 하고 대부분 낫으로 수확했습니다. 하여 콤바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는데 요즘 콤바인은 힘이 좋아 어지간한 진흙탕은 문제도 아니라고 합니다.

수확하는 장면을 <오마이뉴스>에 올려 줄 것이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흙손을 털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카메라를 챙겨 나왔습니다. 사진을 찍다가 문득 위 다랑이 논바닥 곳곳에 널려 있는 나락들이 눈에 잡힙니다.

나락 한 알 속에도 우주가 있다는데...

벼를 수확한 논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락, 새들의 먹이로 남겨 두었습니다.
 벼를 수확한 논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락, 새들의 먹이로 남겨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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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우주가 있을까요?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우주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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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락을 줍다가 나락 한 알 속에도 우주가 있다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나락 줍기에서 손을 뗐습니다. 수확 뒤 논바닥에 떨어진 벼 나락들을 쪼아 먹게 될 새들을 떠올렸습니다. 새들도 무위당 선생의 '우주'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흔적 없이 하늘을 나는 새들은 또 다른 우주입니다. 언젠가는 흔적 없이 사라져 갈 또 다른 '나'입니다.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나락도 새들도 그들은 모두 하늘입니다 하여 새가 먹는 것은 내가 먹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두어 시간에 걸쳐 아래위 다랑이 볏논을 무사히 수확했습니다. 40kg 벼 포대로 서른한 가마, 천여 평, 유기농 벼농사치고는 그런대로 잘 나온 편입니다.

마당에 볏 가마를 풀어놓고 우리 집에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본래 최공식씨네 집에서 점심을 준비하기로 했는데 얼마 전 바다낚시로 잡아 올린 생선으로 찌개를 끊이고 손님이 선물로 놓고 간 술을 돌렸습니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벼 나락 포대를 가지고 온 최공식씨 부인도 함께 했습니다.

"벼 베 주고 점심 얻어먹긴 처음이네요이."
"그류? 보통 새참이나 점심을 내놓지 않남요?"
"고건 옛날 말이지요."

벼 수확을 하던 날 나락을 베는 동네 사람들과 점심을 함께 했습니다.
 벼 수확을 하던 날 나락을 베는 동네 사람들과 점심을 함께 했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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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공식씨 부인은 뜻하지 않는 점심에 술까지 대접 받았다며 거듭 고마워하면서 남편에게 벼 수확한 품삯을 깎아 주라고까지 합니다.

"아이구. 그럼 안 되지요이, 어렵게 베 주었는디 내가 고맙쥬, 친구, 남들에게 받는 거 다 받게나."
"친구, 수확 다 하고 나니께 속 시원하지? 쌀 수확한 거 어떻게 할 건가?"
"그동안 우리 먹을 거만 농사지었기 때메 쌀을 팔아 본 적이 없는디, 이번에는 팔아야지, 여기저기 달라는 사람들이 있긴 한디, 어떻게 되겠지. 다 안 팔리면 신세 진 사람들하구 나눠 먹으면 되고."

그렇게 말해 놓고 보니 오로지 농사로만 생활하는 이들에게 미안했습니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부업이라도 있지만 이들은 누군가와 나눠 먹을 짬도 없이 오로지 농사에만 매달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분 좋게 점심을 먹고 최공식씨 일행을 보내고 나서 마당에 나락을 널어놓으려 하는데 우리 집 고양이, 보리 녀석이 벼 나락 위에 턱하니 올라서서 야옹 거립니다. 보리 녀석의 알 수 없는 야옹거림을 억지 해석하면 대충 이런 거 같습니다.

"야옹~ 나락 걱정 붙들어 메슈. 쥐새끼들은 내가 지켜 드릴텐께. 야~옹" 

벼 가마에 올라가 야옹 거리는 우리집 '보리'. 쥐 걱정 말라는 듯 합니다.
 벼 가마에 올라가 야옹 거리는 우리집 '보리'. 쥐 걱정 말라는 듯 합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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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의 쌀가마니 파먹는 진짜 쥐새끼들은 따로 있다

농민들의 쌀가마니를 노리는 쥐새끼들을 철통 감시하겠노라 선언문이라도 읽고 있는 듯합니다. 따지고 보면 땅바닥을 기는 쥐들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만치 농민들의 쌀가마니를 통째로 파먹는 진짜 쥐새끼들은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먹어 치웁니다. 만족할 줄 모릅니다. 누가 굶어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제 배때기만 채우면 그만입니다.

그들은 불평등한 한미 FTA 협정을 통해 농민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습니다. 한미 FTA가 체결되면 근근이 먹고 사는 소농은 점점 사라질 것입니다. 농촌 인구는 점점 줄어 갈 것입니다. 대농만 살아남게 될 것입니다. 대농은 농약을 대량 살포하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렇잖아도 시름시름 앓고 있는 땅이 죽어갈 것입니다. 결국 사람이 상하게 될 것입니다. 

보통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바닥에 벼 나락을 말리는데 집 마당 맨 땅에 벼 말리는 검은 망을 깔고 나락을 펼쳤습니다. 토실토실한 벼 나락을 펼치고 있다 보니 피로가 가시는 듯합니다. 최공식씨 부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금세 가져다 준 플라스틱 고르개로 벼를 고루 펼쳐 놓다가 공주에서 생활 할 때 깊은 인연을 맺었던 농사 사부님, 유씨 할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벼 나락을 펼치면서 작년에 세상을 떠나신 농사 사부님, 유씨 할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벼 나락을 펼치면서 작년에 세상을 떠나신 농사 사부님, 유씨 할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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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농군으로 처음 벼농사를 지어 고르개도 없이 벼를 판판하게 펼쳐 말리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자신이 쓰던 고르개를 내 손에 쥐여 주면서 그랬습니다.

"고르개로 벼 사이에 골을 내야 골고루 마르지…." 

그저 평범한 말이었는데 그 말이 떠오르자 목울대가 울컥 거립니다. 돈도 빽도 없는 이 땅의 농투성이 농민들이 그렇듯이 평생 머슴처럼 땅만 파다가 저 세상으로 돌아가신 유씨 할아버지, 지금 내 앞에 벼 나락으로 펼쳐져 있는 듯합니다. 올해 용케 벼농사 잘 지었다고 흡족하게 웃고 있는 듯합니다.


태그:#벼 수확, #기분좋은 점심, #소농, #한미FTA, #쥐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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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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