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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걷는 재미에 빠져서 틈만 나면 길을 걷는다. 혼자 걸을 때도 있지만 대개 길벗들과 함께 나설 때가 잦다. 며칠 전(11월 6일)에도 인천 강화 광성보에서 출발해서 불은면까지 가는 나들길 걸음이 있었다. 하늘은 비가 올 듯 끄무레했지만 이 정도 날씨로는 나의 발걸음을 잡을 순 없다. 길을 나서는 사람들에겐 가는 빗줄기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광성보에 도착하니 저만치에 어른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오늘 함께 걸을 사람들이다. 대부분 처음 보는 얼굴들이지만 그중에는 더러 안면이 있는 사람도 있다. 길이 좋아서 걷기보다는 함께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길을 나설 때가 잦은데, 오늘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뒤에서 주춤주춤 따라만 가는 길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누가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흠칫 놀라며 바라보니 반가운 분이 눈인사를 건넸다. 이 분과 함께라면 오늘 이 길은 특별한 걸음이 될 것이란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오지게 달린 이 감은 아마도 겨울 새들의 먹이가 될 것 같습니다.
 오지게 달린 이 감은 아마도 겨울 새들의 먹이가 될 것 같습니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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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에서 출발한 우리는 불은초등학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 서둘러 나오느라 보온용 장비를 챙겨오지 않았던 나는 준비성이 없는 자신을 질책하며 뒤따라 걸었다. 물이 빠진 바다 갯벌은 마치 가을 산 속의 물든 단풍인 양 온통 발갛게 물든 나문재 밭이었다.

같이 걷는 사람이 좋으면 길은 더 좋다

갯벌을 보며 걷는 길은 산길을 걸을 때와는 다른 기분이 든다. 산길은 오붓하고 호젓해서 마치 보드라운 목소리를 가진 사람과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같다면, 갯벌을 바라보며 걷는 길은 옆에서 든든하게 지켜주며 힘을 주는 친구와 걸어가는 것 같다. 산길이 마음 가까이로 눈길을 이끌어준다면 갯벌을 보며 걷는 길은 깊숙한 곳으로 마음결을 잡아끈다.

갯벌을 지나 들길로 들어섰다. 고만고만한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가 보인다. 교회가 있고 붉은 벽돌집과 하늘색과 주황색의 지붕을 인 농가들이 흩어져 있다. 익히 잘 알고 있는 그 동네는 기억 속의 어느 날로 나를 데려갔다.

십여 년 전, 매주 토요일 오후면 나는 이 동네를 지나갔다. 강화읍에서 출발해서 불은면 소재지에서 좌회전을 하면 고능리 쪽으로 들어선다. 그 길을 계속 달리면 오두리가 나오고 그리고 넙성리 동네로 길은 이어진다. 나는 이 길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한 때 내가 사랑했던 곳으로 달려가던 길이었기에.

아침결에 한 줄기 비가 내려서인지 낙엽이 수북하게 쌓였습니다.
 아침결에 한 줄기 비가 내려서인지 낙엽이 수북하게 쌓였습니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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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자주 강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더니 마침내는 이사 가자며 끈질기게 나를 설득했다. 당시 삼십 대의 팔팔한 나이였던 나는 도시를 떠난 삶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늘 도리질을 치며 남편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빈 들에 나무를 심다>라는 책을 만나게 됐다. 그 책은 강화에 살고 있는 박광숙 선생님이 쓴 책이었는데 진정이 담긴 이야기들이 책 속에 담겨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런 분이 사는 곳이라면 강화는 틀림없이 좋은 곳일 것이며 언젠가는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릴 거란 확신을 했다. 그리고 강화로 거처를 옮겼다.

강화로 이사를 왔지만 아는 이 하나 없는 생활이었다. 그 때 내 친구가 돼줬던 것은 집 건너 바라보이는 산과 그리고 들꽃들이었다. 나는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고 그 마음을 글로 담았다.

문득 만난 한 권의 책. <마리서당 이야기>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또 한 편의 글을 만났다. '마리서당 이야기'라는 제목을 단 만화였다. 내가 만나고 싶어 했던 분이 그 이야기 속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당장에 마리서당을 찾아갔다. 그렇게 해서 나의 빛나는 날들이 시작됐다.

강화의 곳곳에 사는 사람들은 토요일 오후면 불은면 넙성리로 모였다. 넙성리에는 마당이 넓은 집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 집 마당 한 쪽에 있는 컨테이너 방에서 서당을 열었다. 우리의 뜻을 알아준 신창호 훈장님이 멀리 서울에서 달려와서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펼치면서 우리 모두의 훈장님이 돼 주셨다.

박광숙 선생님은 늘 한결 같습니다.
 박광숙 선생님은 늘 한결 같습니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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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훈장님은 당시 고려대에서 강의를 하시는 분이셨는데 한 푼의 노잣돈도 받지 않으시고 순전히 정리(情理)로 강화를 찾아주셨다. 당시 승용차도 없으셨던 그 분은 멀고 먼 상계동에서 강화까지 몇 번이나 차를 갈아타고 오셨는데, 훈장님을 뵐 때마다 고마우면서도 송구스러웠다. 그래서 약간의 돈을 교통비 명목으로 드리려고 했더니 훈장님은 "저도 제 스승님께 무상으로 배움을 얻었습니다. 저 아이들 중에서 나중에 또 그리하는 사람이 나오면 되는 겁니다"라고 말씀하시며 한사코 손사래를 치셨다. 그리고 또 하시는 말씀이 "강화에는 강화학이라고 불리는 학맥이 있었습니다. 지금 아이들 중에서 강화학의 맥을 이을 아이가 나올지도 모릅니다"라고 하셨다.

오래도록 함께 할 귀한 인연들

그 말씀은 신선한 자극이 됐다. 조선 중엽의 학자인 하곡 정제두에서 시작된 강화학은 위당 정인보를 마지막으로 맥이 끊어졌다. 그러나 그 정신은 면면히 살아 흐르고 있을 터였다. 마리서당의 학동들 중에 학맥을 이을 인재가 나온다면 이는 훈장님에 대한 최상의 답례가 될 것 같았다.

'마리서당'에 대한 이런저런 추억에 젖어들다가 앞서가는 일행과 길을 달리 해서 옆길로 접어들었다. 박광숙 선생님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박 선생님'으로 지칭되는 그 분은 당시 마리서당의 대표로 계셨던 분이신데 우리에겐 고 김남주 시인의 아내로 알려져 있는 분이다.

오랫동안 함께 가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가고 싶습니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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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는 참 많이도 즐거웠다. 우리는 지금 눈으로 봐도 재미있는 일들을 많이 했다. 어느 해 이른 초봄에는 다함께 걸어 강화를 한 바퀴 돌기도 했다. 차를 차고 다닐 때와는 달리 걸으면서 보고 느끼는 강화는 달랐고, 그래서 우리는 강화를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그 후로 어렵고 힘들어 보여서 피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면 끝까지 걸어서 마침내 이뤄냈던 그때의 경험이 힘이 되곤 했다.

박 선생님은 마침 댁에 계셨다. 박 선생님을 뵈니 늘 마음에 담고 사는 분인데도 그동안 소원하게 지낸 듯해 면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신명나게 한 때를 같이 보냈으면서도 나는 '또 다른 것을 쫒아 다니느라 소중한 인연을 놓치며 살지 않았나'라는 자괴감도 들었다. 이제는 분잡한 마음을 벗고 그때의 순정한 마음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박 선생님을 바라봤다.

늘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소중한 추억들이 이 가을에 나를 찾아왔다. 마치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듯 걸음은 나를 그곳으로 이끌어줬다. 나를 찾아온 어제의 인연들이 마치 오래전에 이미 예정돼 있던 일이라도 되는 양 소중하게 생각된다. 그 인연들을 오래도록 가꾸고 귀히 여길 일이다.


태그:#강화나들길, #김남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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