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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시절 야자시간이었다. 대입 스트레스에 대장이 예민한 아이들이 많았다. 내 친구 K가 그랬고 나도 그랬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그 분이 오신다'고 말했다.

"야, 그 분 강림하셨다. 내 화장실 쫌."

휴지를 들고 화장실을 드나들었던 나날들. 하루는 야자시간에 둘 다 '그 분'이 찾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지만, 고3 주임선생님은 야자시간에 화장실을 못 가게 하셨다(누고 싸고는 살아야지요 쌤). 여튼 그 때는 그랬고 우리는 몰래 화장실로 갔다. 그런데 일을 보고 나오려는 찰나 주임선생님이 "야자 시간에 누가 싸다니노" 소리를 지르며 화장실 앞에 책상을 갖다놓고 앉으셨다.

나와 K는 정말로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다. "우짜노" "우야노" 발만 동동 굴렀다. 결국 우리는 화장실 창문을 넘기로 했다. 화장실 창문을 넘어서 뒤로 돌아가 다시 교실로 창문을 넘을 계획이었다. 원스텝, 세면대를 밟고 투스텝, 수건걸이를 밟은 뒤 점프! 계획은 창대했으나 끝은 처참했다. 세면대는 버텨줬는데 수건걸이가 K의 무게를 버티지 못해 부서졌고 K는 나자빠졌다. 무척 아파보였는데 웃음이 났다. 그 후, 우리는 화장실에서 "저 수건걸이 와 저렇노?"하고 애들이 한 마디씩 할 때마다 바짝 긴장하는 동시에 웃곤 했다. 우리는 이런 재미있는 추억이 한도 끝도 없는, 특히나 힘들었던 고3 시절을 함께 보낸 절친한 11년 지기 친구다.

어릴 적부터 '선생님'이 꿈이었던 친구 K... "재수는 못해"

 K와 이번에 수능을 치르는 그의 동생이 어릴적 찍은 사진
K와 이번에 수능을 치르는 그의 동생이 어릴적 찍은 사진 ⓒ 강혜란

K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 했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선생님'이라고 답했던 친구다. 초등학교 때도 같은 반인 적이 있었던 나는 어렴풋이 그때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가 대학을 갈 당시에도 교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교육대학, 어느 순간부터 훌쩍 높아져 버린 그 문 앞에서 친구는 좌절했다. 교대에 원서조차 쓰지 못했다.

'친구의 성적이 안 됐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잖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정말로 오랫동안 소망하고 꿈꾸던 것을 이룰 수 없게 된 친구가 너무 안타까웠다. K는 체념했다. 나는 재수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도 봤지만 K는 그걸 해낼 자신도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집안 사정이 넉넉치 못하다고 했다. 지난해에 서울 사립대학에 들어간 오빠와 고등학생이 되는 동생이 있다고…. K는 그런 상황에서 부모님께 재수 뒷바라지를 시켜달라고 할 만큼 염치를 불구할 친구가 못됐다.

결국 친구는 집 앞에 있던 국립대학의 정치행정학부에 진학했다. 등록금 문제도 그렇고, 원래의 꿈을 접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빨리 공무원이 돼 시험 준비를 할 오빠 뒷바라지를 하고 싶다고 했다.

K는 1년간의 대학생활 후 휴학을 하고 노량진으로 올라갔다. 오빠가 군대에 가있는 동안, 힘들더라도 부모님이 뒷바라지를 해주겠다고 한 것이다. 친구도 빨리 시험에 붙어서 집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K는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은 채 독하게 공부에 매달렸다. 하지만 수백대의 경쟁률에 어렵기도 하다는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고 결국은 고향으로 내려왔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로 친구는 밥을 잘 소화하지 못했고 돈이 많이 든다는 것도 고향으로 돌아온 또다른 이유였다.

그놈의 돈, 돈, 돈. 친구는 늘 돈을 걱정했다. 사실은 돈을 걱정한 게 아니라 가족을 걱정했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오빠와 앞으로 학원을 다니며 수능 뒷바라지를 받아야 할 동생을 걱정했다.

유달리 남매애가 강한 K였다. 때론 다른 이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동생과 자고 싶어 울고, 오빠가 군대에 갔을 땐 우울증 직전까지 갈 뻔했으니 말 다했다. 부모님을 지극히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고시원 생활을 하며 쓰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엄마, 아빠가 얼마나 힘들게 일하실지'를 정말이지 늘, 항상, 언제나 생각하곤 했다.

동생 재수 시키려 식비까지 아끼는 친구... "니는 못했다 아이가"

또다시 2년 후인 2010년, 친구는 서울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신림이었다. 감정평가사를 준비하는 오빠와 함께 다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다. 또다시 얼마나 더 많은 돈이 들지 걱정이 됐지만 오빠가 '함께 돈 아껴쓰며 잘 해보자'고 했고 꼭 붙는단 생각으로 올라오는 거라고 K는 말했다. 핸드폰을 없앤 K는 가끔 보내오는 인터넷 메신저로, 그래도 오빠가 있어 살 것 같다고, 예전처럼 소화를 못 시키거나 집으로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고 했다. "유별난 가족애 만세다, 그래"라고 말해주면서도 친구가 덜 힘들 것 같아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뒤에는 K의 동생까지 서울로 올라왔다. 공부를 잘했던 동생이 생각보다 수능점수를 잘 받지 못해 재수를 시키려 데리고 올라왔단다. '니는 그 재수 못했다 아이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하지 않았다.

K는 말했다. '고난의 행군'이라고. 오빠의 비싼 사립대학 등록금에, 친구의 등록금에, 거기에다가 자식을 둘이나 고시촌에 보내놓은 부모님은 도저히 막내를 재수시킬 여력이 없었고 재수에 반대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 친구가 나섰다. 오빠와 함께, 우리가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동생을 데리고 올라왔다고 했다. 친구의 방에 동생을 재우고 인터넷 강의를 듣게 하며 공부를 시켰다. 그럴려면 식비까지 아껴야 한다고 했다.
한 달에 10만 원쯤 되는 식비로 산다고 K는 얘기했다. 등록금에 보태려고 집에서 보내온 생활비를 쪼개 모아뒀던 적금까지 깼단다. 고시촌에 자리한 식당 식권을 사서 밥을 먹고 공부하는 나날들. 이런 친구에게 고3 시절 이후 좀처럼 찾지 않던 '그 분'이 고시촌에서 또다시 자주 강림하신다고. 친구가 얼마나 힘들지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그려졌다.

그래도 그토록 보고싶던 막내랑 같이 잘 수 있어서 좋단다. 지금은 고시원에 방을 따로 얻어 사는데 같이 자고 싶어 침대를 동생방으로 옮겨 잤단다. 그랬더니 둘이서 부둥켜안고 좋다고 수다만 떨어대서 며칠 뒤 할 수 없이 침대를 원위치 시켰단 웃긴 이야기도 했다. 같이 자고 싶은 걸 참다참다 폭발한 날은 그 비좁은 고시원 1인용 침대에 둘이 같이 잤단다. 자다가 떨어졌다는 친구 왈 " 내 허리 뿔라지는 줄 알았다." 이 못말리는 사랑을 어찌할꼬.

"부모님도 늙는데, 그만 고향 갈란다"... "왜 니만 희생해서 사노"

그러다 지난 10월, K로부터 연락이 왔다. 결국 올해 시험에 아깝게 떨어지고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붙을 때까지 1년이고 2년이고 안 내려간담서?"

K는 또 돈 이야기를 꺼낸다.

"명절 때 한 번씩 내려갈 때마다 엄마 아빠 늙는 게 확확 보여서 도저히 여기 못 있겠다."
"느그 오빠야는?"
"우리 오빠야는 계속 공부하지."
"집에서 공부하면 집안일도 해야 되고, 눈치보여 싫다며?"

할 말이 더 울컥 치밀어 오르는데 겨우 참았다. K가 그런 내 맘을 알았는지 말을 덧붙인다. 점수가 많이 올라서 이제 자기 정도면 집에서 공부해도 내년 시험에 자신이 있단다.

'그래도…'

이왕이면 확실히 하도록 좀 더 버티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친구가 웃는데 괜히 미안해졌다. 욱하는 몇 마디를 더 던질 뻔했는데 참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도 K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든 적이 꽤 있었다. 입이 자유분방해서 문제였지만 내 딴에는 하도 답답해서 내뱉은 말이긴 했다.

"니는 제발 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 내는 그리 생각한다. 나중에 니가 니 하고 싶은 대로 못해서 부모님 원망하는 것보다 지금 니 하고 싶은 대로 해서 부모님한테 원망 안하는기 그기 진짜 효도하는 기다. 그때 재수했으모 교대 갔을끼다. 내 재수해 보니까 다 1년 더 하면 오르드란 말이다."

"왜 니만 희생하고 사노 말이다. 만다꼬 니만 희생하는데. 오빠 뒷바라지는 개뿔, 니가 오데 <육남매>에 나오는 숙희도 아니고."

가뜩이나 꿈을 접으며 마음이 아팠을 친구의 마음을 생각도 못하고 자주 헤집어놓았다. 나이가 조금 더 들어서야 그 말이 얼마나 친구에게 상처가 될지 알았고 그 말을 그만두었다. 지금 또 이 말을 하고, 또 이 말을 보게 될 친구에게 다시 미안해진다.

요즘은 친구의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다 다르다는 것, 사람들이 우선하는 가치는 다 다르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와 나는 가족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행복해짐으로써 그게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친구는 내가 조금 참아서 부모님의 짐을 덜어드릴 수 있다면 그게 효도하는 길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점점 친구의 생각과 가치관을 존중해 가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내 친구 K가 아니라 그의 '동생'을 응원하고 싶다. 자기 적금까지 깨면서, 부모님께 반기를 들면서까지 힘들게 서울로 데려온 동생이 수능을 잘 치길 친구는 그 누구보다 바라고 있을 것이다. 동생이라면 죽고 못사는 내 친구는 어쩌면 자기 시험보다도 동생시험에 더 신경이 곤두서 있을 테다.

그래서 나는 얼굴도 몇 번 보지 못한 K의 동생을 응원한다. 그것이 곧 내 친구를 응원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K가 '공부를 잘한다'며 자랑스러워하는 동생이 꼭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할텐데. K는 못했던 재수까지 하며 공부했으니 동생은 잘 될거라 믿는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응원한다.

"느그 언니 위해서다. 니가 잘되는 기 젤로 좋고 니가 잘 되서 행복한 부모님 보는 게 좋은 니 언니 위해서라도 시험 잘 치라. 알았제. 꼭이다. 내도 니를 응원할끼다."



#수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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