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삶이 이렇게 난감해도 되는 것인가
날은 또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막 피어나려는 싹수를
이렇게 싹둑 베어내도 되는 것인가
짧은 순간 만상이 교차한다
술을 끊으면 술과 함께 덩달아
끊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 한둘이 어디 그냥 한둘인가
세상에 술을 공짜로 준다는데
모질게 끊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있는가
불혹의 뚝심이 이리도 무거워서야
나는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란 걸
저 감자탕집이 이 세상이
훤히 날 꿰뚫게 보여줘야 한다
가자, 호락호락하게
- <소주 한 병이 공짜> 전문
지난 2004년 첫 시집 <걸레와 찬밥>을 펴낸 시인 임희구(46)가 두 번째 시집 <소주 한 병이 공짜>를 펴냈다. 이번 시집은 '소주 한 병이 공짜'라는 시집 제목에서 언뜻 드러나듯이 우리 일상생활과 물질문명에 푹 빠져 허우적거리는 천민자본주의를 시인이 지닌 독특한 해학과 풍자로 샅샅이 훑어내고 있다.
<건배> <양복 한 벌> <사랑은 너무 쓴가> <봉은사 개조심> <공기 청정기> <국민흔행> <똥개> <기초노령연금지급시청서> <머리를 빡빡 민> <어머니 병 팔러 가셨다> <심심한 밥> <송년회> <뽕짝같이> <날 버려요> <땅도신경> <간밤의 뽀뽀> <변방에서 온 쪽지> <공공의 적> <전쟁놀이> <개량종> <졸부가 되어> 등 50편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시인 임희구는 <자서>에서 "땡볕에 서 있다"고 말한다. 그는 "몸이 바싹바싹 마르고 있다 지금 누가 내 몸에 불을 지르면 확 타올라 한 줌 재가 될 것이다"라며 "다 잃었다 남김 없이 다 잃고서도 내 눈과 귀는 똑바르지 못하다 이 와중에 축 처진 어깨를 다독여주는 신의 손길을 느낀다"고 적었다.
시인은 왜 지금 땡볕에 서 있으며, 남김 없이 다 잃었다고 여기는 것일까. 시인이 서 있는 땡볕은 물질로 뒤범벅거리는 자본주의 세상이다. 그 세상에서 시인은 발을 딛고 똑바로 서서 걸을 수 없다. '물질'이 모든 것을 주무르는 그 세상을 피할 수도 없고, 웃통을 벗고 싸워도 끄떡없는 그 세상은 너무 목이 마르고 어지럽다.
아무렇게나 던져놔도 한 폭 멋진 풍경 되는 자연
은행 365일 코너에
공기청정기가
나 종이 파쇄기 아니고 공기청정기니까
자꾸 내 구멍에 종이 들이밀지 말라
고 커다랗게 쪽지를 붙여놨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들 쑤셔 넣었으면
청정기가 저렇게 화가 났을까
- <공기 청정기> 전문
시인은 슬프고 화가 난다. 시인은 그 슬픔과 화를 이 엄청난 물질문명 앞으로 다시 되돌려 놓는다. 은행 365일 코너에 놓인 그 공기 청정기도 사람이 편하게 더 오래 살기 위해 만들었다. 그곳에 돈을 찾으면 나오는 영수증을 파쇄하기 위해 집어넣는 것도 사람이다. 오죽했으면 공기 청정기가 자기를 만든 사람에게 화를 내고 있을까.
아무리 주물럭거려도
똥은 똥이니까
그만 주물럭거리자
자연은 아무렇게나 던져놔도 한 폭의 멋진 풍경이다
- <변금술> 전문
그래. 똥을 주물럭거려 다른 그 무엇을 만들려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똥은 똥" 아니겠는가. 똥이 어찌 된장이 될 수 있겠는가. 자연도 마찬가지다. 4대강 사업 등을 내세워 자연을 아무리 이리저리 주물럭거려도 자연이 어찌 사람 중심으로 바뀌겠는가. 그러니 자연은 그대로 둬야 한다. "아무렇게나 던져놔도 한 폭의 멋진 풍경"이 될 수 있으므로.
시인 임희구가 지닌 독특한 해학과 풍자는 시집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시편들을 아무렇게나 뽑아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섬뜩하다 국민흔행이라고 친 / 내 손가락의 실수를 훤히 꿰뚫고 있는 인터넷 검색기"(<국민흔행>)라거나 "사는 것만큼이나 저승길 문턱도 하이패스"(<하이패스>), "생을 조진 것은 / 소주 때문에 내가 아닌 / 나 때문에 소주인 것 같은데"(<빚>), "스님을 교회로 인도할 수 있겠단다"(<적>) 등이 그러하다.
시인 임희구가 펴낸 두 번째 시집 <소주 한 병이 공짜>는 읽는 이로 하여금 '참 오랜만에 재미있고 속 후련한 시를 읽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이쯤에서 임희구 시인에게 한 마디 살짝 건네고 싶다. 시인이여! 그렇게 화장 끼나 액세서리, 걸친 옷 하나 없는 그런 알몸 시를 써라. 그래야 그 시가 천민자본주의 심장을 쏘는 총알 같은 시로 거듭날 것이리라.
그 시인은 형식을 빌려 폼을 잡지 않는다
지금은 북한산
통일되면 국산
- <원산지 표시> 전문
꼭 두 줄로 짤막하게 끊어 친, 참 재미있는 시다. 요즘 원산지 표시를 놓고 말이 많다. 중국산이나 호주산, 미국산, 일본산, 북한산 등이 국산으로 바뀌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시인은 이 '원산지 표시'에 따른 말이 많은 것을 두고 보다가 문득 북한산에 눈길을 머무르게 한다. 북한산은 사실 '국산'인데, 마치 외국제품 대하듯이 깔보니 가슴이 몹시 답답하다는 것이다.
시인 박형준은 "임희구는 친구 대하듯 가족 대하듯 살아 있는 입말로 세상의 불행과 빈곤을 사랑으로 감싸는 친근함을 소유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말한다. 그는 "무엇보다 슬픈 것들조차 따뜻하게 하는 임희구 시인의 유머에는 진지한 시선이 담겨 있다"며 "마흔한 살 차이가 나는 노모를 '김씨'라고 부르거나 오십을 바라보는 형과 형수가 마주앉아 봉숭아꽃물을 들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에는 슬픔이 어려 있지만, 그것이 시가 되는 순간은 언제나 유머가 있다"고 적었다.
시인 이병률은 "그는 형식을 빌려 폼을 잡지 않는다. 선명함으로 가르치려 들지 않고 목소리를 크게 내는 법도 없다"며 "타고난 마음의 결로 노래를 불러 시 읽는 이들의 어깨를 내려놓게 한다. '순수함을 빚으면 이렇게 빛이 나는 차돌이 되는구나'고 생각한다. 그의 이런 순한 시법(詩法)이 우리 시단을 올곧게 받쳐 주고 있으니 이 또한 분명한 희망일 것"이라고 썼다.
시인 임희구는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3년 계간 <생각과 느낌>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제12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았다. 시집으로 <걸레와 찬밥>이 있으며, 2007년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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