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오니 작은 소포가 하나 도착해 있었다. 일본의 지인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봉투를 뜯어 보니 편지와 함께 아담한 사이즈의 달력이 들어 있었다. 며칠 전 문구점에 펜 하나 사러 들렀다가 일찍 나온 2012년 수첩을 발견하고는 이것저것 뒤적였던 기억과 함께 벌써 연말인가, 새해인가 하는 낯선 느낌에 사로잡혔다.
선물받은 달력은 책상 앞에 압정 같은 것으로 살짝 꽂아 가까이 두고 보기에 적합한 크기였다. 한 장 한 장 넘기니 설빔으로 기모노를 입고 화덕이 놓인 방 안에서 온기를 나누어 가지며 다양한 전통놀이에 빠져 있는 아이들 모습부터 '국민체조'를 하는 어촌 초등학교 풍경과 섬, 기차 풍경 등 어린아이들의 모습 속에 일본 사람들의 옛 추억과 향수를 불러 일으킬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얼핏 우리 초등학교 다닐 적 저학년 교과서 속에 그려져 있던 삽화와도 비슷한 분위기다.
선물을 보낸 이의 마음을 생각해 보니, 그녀는 오십대 후반이다. 내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다. 1950년대생인 그녀는 목소리도 작고 몸도 호리호리하지만 항상 정치적 의견이 분명하여 토론하기를 즐기고, 스페인에 푹 빠져 스페인 말을 배우거나 춤을 추기도 했던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요리솜씨도 좋아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식 요리를 직접 만들어 나를 초대한 적도 있었다. 동네 한식당에 갔을 때는 식당에서 파는 한국 음식 메뉴를 하나씩 전부 시켜서 다 맛있다고 좋아했다.
그녀가 내게 달력을 보내겠다고 주소를 알려 달라는 메시지를 전했을 때, 나는 잠시 피식 웃었다. 일본 달력에 새겨진 숫자와 날, 요일 등이 한국의 것과 다를 것은 없다. 달력 모양이 특별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달력 속 휴일과 세시풍속, 절기는 다르다. 빨간색이 칠해진 것도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한국과 다르다.
내친 김에 일본 달력 속의 휴일은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우선 일본에서는 12월 29일부터 1월 3일까지 일년 중 가장 긴 연휴다. 일본 사람들의 설날인 셈이다. 학교, 도서관, 공공기관, 회사 등은 경우에 따라 이보다 앞뒤로 며칠 더 쉬는 곳도 있다. 그리고 1월 둘째주 월요일 성인의 날, 2월 11일 건국기념일, 3월 20일 춘분, 4월 29~30일 쇼와의 날 연휴, 5월 3일 헌법기념일, 4일 녹색의 날, 5일 어린이날, 7월 16일 바다의 날, 8월 15일을 전후하여 며칠동안 추석 연휴, 9월 17일 경로의 날, 22일 추분, 10월 8일 체육의 날, 11월 3일 문화의날, 23일 근로감사일, 12월 23~24일 '천황'탄생일 연휴 등이 있다.
또 일본 달력에는 우리나라 조선시대 숙종 OO년, 태조 OO년 하는 식으로 일왕의 연호가 표기된다. 2012년은 일본에서는 '평성(平成, 헤이세이)24년'인데 이는 현재의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1989년 1월 125대 일왕에 올라, 그때를 헤이세이 1년으로 셈하니 2012년은 24년이 되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 헤이세이(平成)니 쇼와(昭和)니, 메이지(明治)니, 다이쇼(大正)니 이런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마는 일본에서는 아직도 쇼와 20년, 메이지 9년 하는 방식의 연호를 많이 쓰고 있다.
문득 일본에서 무슨 서류 기입할 때마다 쇼와, 헤이세이 OO년 방식으로 기입하도록 서류 양식이 정해져 있는데다 신문과 언론, 일반 서적에서도 흔하게 '메이지 OO년에 창업, 쇼와 OO년 출생, 헤이세이 OO년 사건 발생' 등으로 서술하고 있어, 그것을 일일이 셈해야 하는 불편함과 동시에, 그 연호 사용 방식에 울컥했던 것이 새삼 떠올랐다. 한일시민교류 활동을 많이 펼치고 있는 어느 한국 사람은 일본에 와서 서류에 연월일을 기록할 때면 일부러 쇼와니 헤이세이니 하는 단어에 볼펜으로 박박 줄을 긋고 그 옆에 'OOOO년 O월O일' 하는 식으로 적곤 한다.
이는 단순히 한일 과거사로 인한 불편함 때문만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라면서 '천황'의 날이 있지를 않나, 헌법 제1조의 첫 항이 천황에 관한 항목이질 않나, 시간을 셈하는 공식적 방식도 '천황'의 존재가 결정한다는 것이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와 같이 일본과 한국의 전통과 문화, 역사, 정치, 사회가 다르듯 일본의 휴일과 한국의 휴일이 서로 다르고 기념일이 다르니, 일본에서의 시간과 한국에서의 시간이 같다고 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일본 달력 선물에 웃음이 났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 마음은 기쁘고 반갑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으로 일년 열 두달이 꾸며진 달력을 구해, 자필 손편지와 함께 보낸 그녀의 마음이 고맙고, 그녀가 좋아한다는 그림을 달마다 한 장씩 넘겨 새롭게 바뀌어 가는 걸 보면서 그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 시청 인근의 대형 백화점에는 벌써 크리스마스 트리와 루돌프, 눈꽃 등을 상징하는 화려한 외등 야간 조명 장식물들이 등장했다. 벌써 연말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끝이 아니다. 2011년 한 해 다 가기 전에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할 일이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