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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늑대의 시간'.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대표는 성적소수자와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의 지난 10년을 이와 같이 표현했다.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학교 가브리엘관에서 열린 '인권위 설립 10주년 대토론회'의 패널로 나선 한 대표는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했다"고 인권위를 향한 미묘한 감정을 나타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해질녘 나타난 그림자가 개인지 늑대인지, 적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는 순간을 의미한다.

18일과 19일 이틀에 걸쳐 진행되는 토론회 첫째 날에는 '인권과 인권위의 역할'을 주제로 표현의 자유, 정보인권, 여성인권, 청소년 인권, 이주인권, 북한인권 등 총 10개 분야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다. 

한채윤 대표는 "예상되는 반발에도 불구하고 청소년 보호법 내 동성애자 차별조항의 삭제를 권고하거나 '군형법 내 계간 조항은 인권침해'라는 의견을 표명한 것은 약자의 편에 서려는 매우 용기 있고 뜻 깊은 행보였다"고 평가하면서도 "하지만 한국 역사상 최초의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법무부의 성적 지향 항목 삭제를 못 본 척 하던 모습은 큰 상처를 남겼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장애인들에게도 인권위는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곳"이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치열하던 지난 2002년 인권위에서 단식농성을 하면서 인권위와의 첫 인연을 맺었다는 박김영희 장애인차별금지법추진연대 사무국장에게 인권위는 다른 국가기관과는 분명히 다른, 그리고 달라야 하는 정체성을 가진 곳이다. 하지만 박김 사무국장은 여전히 장애인에 대한 감수성과 전문성이 부족한 인권위의 모습을 볼 때마다 장애인차별에 대해 함께 대응해가는 '동지'로서, 과연 인권위가 믿을 수 있는 곳인가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한다고 전했다.

"실정법 넘지 못하면 인권위는 죽는다"

강재경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집행위원장이 2010년 12월 10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린 '세계인권선언 62주년 기념식'에서 현병철 인권위원장 사퇴를 요구하며 위원장 표창 수상을 거부하고 있다.
 강재경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집행위원장이 2010년 12월 10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린 '세계인권선언 62주년 기념식'에서 현병철 인권위원장 사퇴를 요구하며 위원장 표창 수상을 거부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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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검찰 등 형사사법과 구금시설 분야 관련된 지난 10년간의 인권위 주요 결정례를 분석한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인권위가 지나치게 '실정법'에 갇힌 사고를 해왔다고 비판했다.

기자회견 등 미신고 집회 관련 인권위의 입장이 대표적인 예다. 지난 2009년 한국대학생연합 소속 대학생 100여 명이 이명박 정권심판을 내용으로 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자, 경찰은 기자회견이 끝날 즈음 자진해산요청과 3회의 해산명령에 이어 전격적으로 체포해 돌입했다. 그리고 대학생 50명을 체포·연행했다. 이에 대해 인권위는 '경찰이 체포과정에서 과도한 물리력을 행사한 점은 인권침해'라고 판단하면서도, '기자회견도 집회인 이상 신고의무를 위반한 것이기 때문에 경찰의 강제해산 및 체포를 위법한 공권력 행사라고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와 관련해 이 교수는 "집회의 자유의 핵심이 '평화로운 집회의 보장'에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집회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산명령이 내려지고 현행범체포 등 사법처리로 이어지는 현실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집시법은 '신고 없는 집회의 개최'를 그 자체로 범죄행위로 취급하고, 이러한 집회에 대해서는 해산명령과 사법처리가 가능하다"면서 "이러한 집시법의 구조자체가 헌법상 집회의 자유에 대한 과도한 침해의 문제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권위는 '채증'에 대해서도 경찰의 권한남용이나 필요최소한의 범위를 벗어난 경우에만 위법한 행위로 판단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교수는 "인권위는 실정법이 갖고 있는 인권침해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인권의 '최대화'를 위한 정책을 제시해 우리 사회의 인권수준을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면서 "실정법을 넘지 못하는 인권위는 죽는다"고 경고했다. 

이 교수는 또한 형사사법 분야와 구김시설 분야 관련해 인권위가 인권침해 행위자에 대한 징계 등 개별적인 구제조치만을 강구하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나타냈다.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고 있다는 것.

이 교수는 "경찰과 검찰의 인권침해 문제는 제도나 관행의 문제라기보다는 경찰관이나 검사의 개인적인 권한남용에 의한 인권침해로 문제화되었고, 인권위의 권고도 주로 침해행위를 한 자에 대한 징계나 인권교육수강 등의 권고를 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인권침해는 인권교육 수강이나 징계 따위로는 근절되지 않는다, 개별적인 진정사건에서 인권침해의 지점을 발견하고 이를 정책권고로 연결시키는 것은 앞으로 인권위가 고민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현병철 취임 이후, '국가인권위'가 '북한인권위'로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의 독단적인 인권위 운영에 반발해 유남영, 문경란 상임위원이 임기 중 사퇴하는 등 국가인권위원회가 내홍을 겪고 있는 가운데, 2010년 11월 8일 오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전원위원회에서 현병철 위원장이 참석하고 있다.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의 독단적인 인권위 운영에 반발해 유남영, 문경란 상임위원이 임기 중 사퇴하는 등 국가인권위원회가 내홍을 겪고 있는 가운데, 2010년 11월 8일 오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전원위원회에서 현병철 위원장이 참석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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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에 관한 인권위의 활동에 대해 발제한 박주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변호사는 2009년 7월 '현병철 인권위'가 들어서면서 인권위의 역할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2002년도부터 2011년도까지 표현의 자유 관련 인권위의 활동을 연도별로 분석한 박 변호사는 "설립 후부터 지금까지 10년간 국가인권위원회는 폭력시위 전력을 이유로 집회를 금지하는 것은 사실상 '허가제'이고, 집회 및 시위를 보장하기 위해 집회에 대한 시간적, 장소적 제한 규정을 폐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해왔고, 국가보안법에 대해 폐지의 입장을 견지해왔다"면서 인권위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현 위원장이 들어선 이후 ▲PD 수첩 검찰수사 사건에 대한 의견제출 부결(2009. 12) ▲용산 철거민 사망사건에서 나타난 주거권 침해 법원 의견제출건 부결(2009. 12) ▲4대강 공사 반대농성 이포보 농성자들 긴급구제 요청 기각(2010. 4) ▲강제철거 반대농성 두리반 긴급구제요청 기각(2010. 8) 등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들에 대해 인권위는 침묵했다.

박 변호사는 "2002년 월드컵 당시 앞으로 대규모 국제행사시에 헌법에 명시된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던 인권위가 G20 때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등 집회 및 시위의 자유 보다는 국가가 내세우는 소위 국익에 더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현병철 위원장이 취임하면서 표현의 자유는 급격히 후퇴한 반면,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과 예산은 대폭 증대되었다. 정태욱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북한인권위원회로 바뀌는 것이 아닐까 하는 세간의 농담이 현실화되는 상황"이라고 개탄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현 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북한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달라는 특별한 주문을 했다.

정 교수는 "인권 관련 경험이나 전문적 역량에서 미흡했던 현 위원장은 그러한 대통령의 '특별주문'에 적극 부응함으로써 위원장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해 나가고 있다"고 보았다. 지난 3월, 인권위는 북한인권침해신고센터와 북한인권기록관을 설치했다. 정 교수는 "이러한 기구들은 단순히 북한 인권개선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북한 체제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면서 "통일부 산하 통일연구원, 북한 민주화를 위한 시민단체들이 수행해오고 있던 '전투적 역할'을 인권위가 직접 떠맡고 나선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 교수는 인권위의 북한 인권 관련 활동의 증대가 2006년에 표명된 인권위의 공식입장과 도 배치되는 것으로 평가했다. 정 교수는 "인권위의 공식입장은 북한 주민들의 인권침해 자체는 인권위의 관할범위가 아니라고 했는데 이후 인권위는 북한 지역에서의 인권침해를 진정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나아가 북한 체제 자체 및 주민들 인권을 직접적으로 문제 삼고 있다"면서 "또한 정확한 사실과 객관적 조사를 요구하고 있는 공식입장과는 달리, 현재 인권위의 인식은 북한을 '악의 축', '폭정의 전초기지'로 규정한 미국 네오콘들의 고정관념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교수는 이러한 인권위의 '북한인권위화' 현상이 지속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나타냈다. 정 교수는 "아무리 인권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정부, 또 그에 의하여 선인된 인권위원이라고 하더라도 인권위원회의 본질이 있고 국제인권법상 인권위의 위상이 있으며 법률에서 정한 인권위의 고유한 업무가 있다"면서 "인권위가 정치에 의하여 구제불능으로 오염되어 파국에 이른다면, 이는 인권위 관계자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불명예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인권위는 항상 위기였다...통렬한 자기 반성 필요"

이어진 토론회에서 이정은 성공회대 연구교수, 김덕진 천주교 인권위 사무국장, 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는 "현병철 체제 하에서 인권위가 위기인 것은 맞지만, 인권위는 항상 위기였다, 위원장 하나 바뀌었다고 이렇게 휘둘린다면 그 전에도 문제가 있었다"면서 인권위의 '통렬한 자기반성'을 주문했다.

이어 "지난 10년 간 인권위가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우리 인권운동 진영을 무엇을 했나"라면서 "인권위와 함께 인권운동 진영도 인권위를 통한 인권증진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19일 오후 1시 '인권위 10년, 성과와 과제'를 주제로 같은 장소에서 토론회가 진행된다.


태그:#국가인권위원회, #국가인권위, #인권위, #현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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