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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차정희에 관하여>의 한 장면.
 영화 <차정희에 관하여>의 한 장면.
ⓒ 디앤 볼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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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저 출산율에도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의 해외입양아동 숫자는 743명으로 세계 4위를 기록했다. 세계 최저출산율 국가라고 언론에서는 연일 보도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확실한 '해외 입양 대국'이다. 왜 그럴까? 입양아 생부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미혼모들이 열악한 복지와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아이를 키우기가 극도로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후에 시작된 해외입양은 빈곤과 가난의 산물이었다. 당시는 먹고 살기 힘들어 아이들을 해외로 보냈다고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면피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자고나면 G20, OECD 가입국, 국민소득 2만 불을 떠든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해외입양 현황은 세계를 놀라게 한다. 혈연 중심의 문화라 그런가? 문화가 다좋은 것은 아니다. 잘못된 문화는 과감히 바꿔야 한다. 잘못된 문화는 저주일 뿐 가꾸고 지켜야 할 가치가 아니다.


 
디앤 볼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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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앤 볼쉐이 감독은 1957년 '강옥진'이라는 여성으로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가 9살 되던 해 한국입양기관은 그녀의 신분증, 생년월일과 이름을 차정희라는 이름으로 바꿔서 미국으로 입양 보냈다. 어린 나이에 그녀는 자신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왜 바뀌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말이 안 통하고 외모가 다른 이국에서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어린 소녀였던 그녀는 미국 양부모에게 자기는 차정희가 아니라 강옥진이라고, 다른 아이가 잘못 입양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영어를 할 수가 없었고 자기의 실제 신분인 강옥진에 관한 기록이 철저하고 은폐되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던 그 후 그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뇌 때문에 결국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서 말 못할 어려움을 극복한 후 그녀는 디앤 볼쉐이라는 영화감독이 되었다. 입양 올 당시의 악몽과도 같은 상황을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차정희는 1960년대 남한의 선덕 고아원에 같이 있었던 소녀입니다. 그녀와 나는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었으며 또한 그녀를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8세가 되던 해, 미국으로 입양되기 직전 나의 신원은 그녀의 신원과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바뀌어 버립니다. 나에게 차정희라는 이름과 그녀의 생일, 그리고 그녀의 가족 기록이 마치 내 것인처럼 주어졌으며 이러한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동시에 나의 이전 기록은 관료적 술책으로 인해 완전히 말소되었습니다. 수년간 차정희라는 이미지의 여성은 항상 실존하며 내 삶을 정의해 온, 그리하여 가히 역설이게도 이방인이자 나의 공식적 자아 역할을 해왔습니다."




나는 지난 18일 대학로에서 열린 제1회 입양인 영화예술제에서 그녀가 만든 자전적 영화 <차정희에 관하여>를 보았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1966년 미국으로 입양될 당시 뒤바뀐 운명의 소녀이자 또 다른 자아인 차정희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차정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녀는 인종 간 국제입양에 관한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의문을 탐구해 가며 입양문제가 입양인 자신과 가족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특히 이 영화에서 그녀는 아이들이 입양 과정에서 상품화되는 날카로운 도덕적 문제와 한국에서 버려진 고아들이 서구의 양부모들에 의해 소중한 욕망의 대상으로 전이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예술제가 끝난 후 나는 디앤 볼쉐이 감독을 만났다. 다음은 그녀와 나는 인터뷰 전문이다.



"한국의 해외입양 세계 4위의 국가... 부끄럽지 않은가?"



- 한국정부의 해외입양정책에 대해 할 말이 많을 터인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입장을 이야기 해 줄 수 있나. "한국전쟁 이래로 지금까지 한국정부는 약 20만 명의 아동을 해외입양 보냈다. 이중 대부분은 아동은 미국으로 입양돼 갔고, 몇 천 명은 유럽, 호주, 캐나다 등지로 갔다. 해외입양은 한국전쟁 후 생긴 고아문제로 인해 시작되었지만, 전쟁 후 한국이 현대화되고 산업화가 되고 나서도 계속해서 증가했다. 1980년대 이르러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한국의 경제력은 세계무대에서도 주요국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1980년대 풍족함 가운데에서 한국의 해외입양 아동의 숫자는 그 절정을 이루었다. 1985년 한국이 세계경제규모 10위를 기록했을 때, 8837명의 아동이 해외로 입양되었고 한국은 해외입양 세계 1위의 자리를 차지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정부의 해외입양정책과 더불어 한국의 해외입양은 연일 계속되고 있고 한국의 해외입양 세계 4위의 국가다. 부끄럽지 않은가? 이제라도 비록 많이 늦었지만, 한국은 그 경제규모에 맞게 해외입양정책을 바꿀 때가 되었다.



이제 한국 정부는 비혼모, 고아, 가난한 가족을 국가가 지원해 주어야 한다. 자국민이 낳은 아기를 해외에 보내기보다는 한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도록 보살펴주는 것이 정부의 기본적 역할이고 책임이다. 자국민을 버리지 않고 스스로 키우는 책임감과 성숙함을 한국정부가 보여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 언제 어떤 계기로 영화감독이 되기로 마음 먹었나? 그리고 자신의 인생역정을 영화로 만들기로 결정한 계기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내 양부는 집에서 영사기로 항상 영화를 찍으셨다. 1950년부터 양부는 8mm 영사기를 갖고 계셨고 집에서 늘 영사기를 돌리셨다. 내가 미국에 왔을 때인 1966년에도, 양부는 홈무비를 찍고 편집하여 가족이 함께 지켜보곤 했다. 나도 자연스레 양부가 홈무비 만드는 것을 도왔다. 몇 년 후 내가 성인이 되어서 양부가 만든 홈무비를 보면서, 나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갑자기 슬픈 감정이 복받쳐왔다.



홈무비에서 양부는 내 어린 시절의 여러 주요한 장면을 담았지만, 나는 양부가 나를 행복하고 근심 없는 아이의 이미지로 만들려고 하셨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양부의 홈무비는 내 자신의 진정한 모습보다는 양부가 보고 싶은 나의 이미지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나 자신을 누구의 시각이 아닌 나 자신의 시각으로 보고,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로 결국 영화감독이 되었다. 그래서  2000년 내가 만든 영화 <1인칭복수(FIRST PERSON PLURAL)>와 2010년 만든 <차정희에 관하여(IN THE MATTER OF CHA JUNG HEE)>는 내 모습을 내 시각으로 보고 해석하고자하는 시도였다." 



- 당신 인생에 영화 만들기가 주는 의미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말 할 수 있나?

"영화는 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매개물이다. 나는 보여주는 이야기에 아주 관심이 많다. 보여주는 이야기는 강하고 극적인 구조를 그 근본으로 한다. 보여주는 이야기(영화)를 통해서 인생, 사회, 문화, 정체성, 정치에 관한 복잡한, 생각과 주제를 비유적으로 또 실험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나는 자신을 영화라는 예술을 통해 표현할 수 없으면 온전하게 살 수 없다. 사람은 자기를 표현할 권리가 있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강옥진은 사라지고 대신 차정희만 남았다"





- 인종적으로 한국 아이로서 미국 백인가정에 입양이 되고 자라면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무엇이었나?

"내가 입양되면서 내 신분이 차정희라는 아이로 바뀌는 것이 내 입양 생활 중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내가 미국에 입양 보내졌을 때 나는 8살이었다. 그 말은 당시에 나는 내가 누구인지, 내 이름이 뭔지,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이미 또렷하게 자각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1966년 내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나는 영어도 몰랐고, 내가 친숙했던 모든 환경으로부터 단절된 상태였다.



나는 신분은 갑자기 강옥진에서 차정희로 바뀌어 버렸고, 내 여권과 모든 공적인 문서에서도 강옥진은 사라지고 대신 차정희만 남았다. 내가 강옥진이였다는 역사와 증거는 철저히 은폐되어 사라졌고 나는 차정희라는 아이로 결정되어진 것이다. 나는 영어를 배우고 이국에서 생존하려고 발버둥이 쳤다.



하지만 양부모에게 나는 당신들이 생각한 차정희라는 아이가 아니고 강옥진이라는 다른 아이라고 확신시키려는 노력을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차정희가 아니고 강옥진이라는 증거가 말살되었기 때문이었다. 정체성 상실과 혼동에 따른 충격 때문이었는지 나는 곧 기억상실증에 걸렸고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나는 과거가 없는 아이가 된 것이다. 나는 무력감 때문에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후 수년 동안, 나는 내가 차정희라는 아이의 미래 인생을 방해했다는 죄책감으로 엄청난 부담을 느꼈다. <차정희에 관하여>라는 영화는 그래서 그런 잘못된 과거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시도고 표현이었다. 동시에 이 영화는 입양인으로서의 내 개인적 삶을 조망했고 나아가 역사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입양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예전에 본 자료에 의하면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해외입양아의 약 30% 정도가 내 경우처럼 신분이 위조된 것으로 기억한다."



- 기억상실증 등으로 인해 참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많이 가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 어떻게 그러한 정체성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나?

"영화 만들기를 통해서 나를 표현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또 나와 같은 환경을 가진 다른 해외 입양인들을 만나면서 나 자신의 정체성 형성에도 많은 도움과 치료가 되었다."





- 진짜(?) 차정희를 만난 후 느낀 점이나 소회가 어땠는지 알고 싶다?

"내가 만난 모든 차정희들은 놀랍고 강인한 분들이었다. 나는 전부 101명의 차정희라는 이름의 분들과 전화통화를 했고, 그 중 6명의 차정희씨는 직접 방문하여 만났다. 내가 만난 차정희들은 척박하고 어려운 현실 속에서 끈기와 강인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 자신이 살아온 고달픈 인생역정을 나와 기꺼이 공유해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가 직접 몸으로 만난 대부분의 차정희들은 내 세대의 한국여성들이었다. 나는 그분들을 방문하고 만나면서, 그분들은 한국전쟁 직후 몇 년 간에 태어난 여성들로 정말 고된 삶을 살아 오셨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분들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시고, 가족도 돌보며, 자녀들도 어려운 환경에서나마 대학에 보내셨다. 1957년생 해외입양인으로서 나는 종종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어려서 미국에 입양가지 못했더라면 나는 기아로 굶어 죽었거나 매춘부가 되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여러 차정희들을 만나면서, 내가 입양 보내지지 않고 한국에서 자랐더라도, 굶어죽거나 창녀가 되지 않고도, 다른 차정희 분들처럼 나는 생존하여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은 내게 중요한 교훈이었다."



- 한국인 해외입양인들과 한국의 해외입양정책과 관련하여 일을 하고 있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사회복지가 전무하던 나라에서, 한국전쟁 후 전쟁고아들에게 해외입양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한국전쟁이 끝난 지도 60년이 가까워 온다. 이제 한국정부는 G20 국가인 한국이 아직도 생모와 아이들 구조적으로 분리시키고 지속적으로 세계 해외입양 4위를 유지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진단해 봐야 한다. 나는 한국인들이 해외입양문제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이고 깊은 고민을 했으면 좋겠다."


 
디앤 볼쉐이 림은 누구인가
영화 <차정희에 관하여>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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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앤 볼쉐이 림(Deann Borshay Liem, 제작자/감독)은 교육 및 공영 텔레비젼 프로그램의 개발, 제작 및 배급분야에서 20년 이상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다큐멘터리 부문 에미상 후보로 선정된 First Person Plural (2000년 선댄스 영화제;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베이 지역 최우수 다큐멘터리)의 제작자/감독/작가였으며, 스펜서 나카사코의 Kelly Loves Tony(1998년, PBS)와 AKA Don Bonus(1996년 Emmy 상, PBS)의 총감독으로 활약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는 칠레인 망명자인 헥터 살가도(Hector Salgado)에 대한 Special Circumstances(2008년에 발표 예정)를 공동제작하기도 했다.

 

그녀는 전미 아시안 아메리칸 통신 협회(NAATA, National Asian American Telecommunications Association)의 전직 소장으로서 공영방송에 제공될 새로운 영화 제작을 이끌고 미 하원과 함께 공공 미디어 부문에서 소수계의 참여와 대변을 지원하는 활동도 해 나가고 있다. 그녀는 현재 비영리 제작사인 카타딘 재단(Katahdin Foundation)의 소장으로서, 새로운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자금조달, 제작 및 유통을 관장하고 있다.
 

 

태그:#해외입양, #강옥진, #디앤 볼쉐이, #차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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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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