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정치인 때가 전혀 남지 않은 전직 국회의원

 

2009년 11월 '일본생태문화탐방'을 함께했던 제종길 박사님께서 모티프원에 오셨습니다.

 

현재 한국해양연구원 정책전문위원, 기후변화행동연구소 고문, 도시와 자연연구소 소장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계십니다. 이 모든 활동은 서울대학교 해양학과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단단한 전문성에 여러 현장 경험을 더해 지구의 미래 환경에 대한 경종과 대안을 고민하는 일들이라는 점에서 한 가지 일입니다.

 

제17대 국회의원으로서 의정활동을 하실 때도 권위 대신 책임, 인기 대신 성과를 과묵하게 실천하신 분이지요.

 

저는 3년간 이분을 지켜보면서 '이 분이 어떻게 정치를 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좀 더 깊이 이 분을 알아갈 때마다 이런 분이 정치를 해야 하는데, 하는 안타까움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전자는 제가 정치판을 전사들이 횡횡하는 전투장으로 인식한 결과이고, 후자는 진정한 정치는 혜안을 가지고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는 전문성을 가진 학자적 재능이 필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아무튼 제 박사님을 뵐 때마다 한 번도 의정활동을 하던 때의 얘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늘 여행, 로컬 푸드, 책, 가정 등 어찌 보면 사소하다할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소들은 개울의 민물가재처럼 그 사회의 건강성을 담보하는 지표종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요소들이 간과된 거대 담론은 그저 허울만 번드르르한 경우일 수 있습니다.

 

이번 모티프원에서의 만남에서도 그분다운 주제와 얘기들로 밤 깊어지는 줄 몰랐습니다.

 

룸살롱 자리에 책방을

 

"저는 생태관련 책 출판, 생태여행기획, 생태여행용품유통 등을 결합한 회사를 곧 설립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서점도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사는 안산의 한 지역에 한때 룸살롱이 번성했던 곳이 있습니다. 경기의 침체와 함께 그 룸살롱들이 모두 폐업했어요. 그 지역에서 갤러리를 연 후배가 있는데, 그 후배와는 함께 문화를 일구는 일을 하자는 약속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먼저 갤러리를 열고, 제게 전화가 온 거에요. 예전의 그 약속을 지키라고. 그래서 그 친구가 있는 인근의 룸살롱 자리에 헌책방을 열어볼까 싶어요. 그동안 제가 모아온 것들도 펼쳐놓은 '여러 가지 박물관'도 함께……."

 

그동안 모아온 생태 관련 책들이 4만여 권 된다는 박사님은 모티프원의 잣나무 책장을 보고 그 서점에 대한 구상을 털어놓은 것입니다.

 

"망설이지 말고 시작하세요. 룸살롱 지역을 서점과 갤러리, 작은 박물관 등의 문화 클러스터(cluster)로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건강한 생태계의 복원이지요. 요즘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로 황폐해진 도시를 건물의 개축과 용도 변경을 통한 '도시재건'이 화두입니다만 정신문화의 황폐함을 드러내는 룸살롱 지역에 서점과 갤러리 등 문화적인 요소가 이식된다는 것은 '정신재건'일만하지 않습니까. 제 박사님께서 구상 중이 헌책방은 재충전이 가능한 책은 팔고, 이미 절판되어 구하기가 어려워진 책들은 파는 대신 비치해서 그 지역 커뮤니티의 생태전문 도서관 같은 기능을 함께 가진 담론공간의 역할을 하면 좋을 듯싶습니다."

 

저는 룸살롱이 도서관으로 옷을 갈아입은 멋진 변신을 상상하면서 제 박사님을 부추겼습니다.

 

"저는 달팽이에 대한 관심이 특히 많아요. 달팽이에 관한 것이라면 작은 소품들도 수집하곤 하지요. 달팽이는 세계적으로 2만 종이 넘어요. 먼 거리의 이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종이 많은 편입니다. 3년 미만의 평생 동안 넓지 않은 한 지역에서 일생을 마치는 달팽이는 생태계 변화에 매우 취약합니다. 만약 달팽이가 사는 한 지역에 도로가 생긴다면 함께 어울려 살던 한 종류의 달팽이는 그 도로를 건너지 못한 채 각기 다른 형태의 삶을 살 수밖에 없어요. 또한 느린 삶을 추구하는 현대에 달팽이가 시사 하는 것이 많다고 여깁니다."

 

제 박사님은 또다른 관심사의 일단을 내보이셨습니다.

 

"광속으로 정보가 교환되고 모든 것들의 라이프사이클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달팽이로 상징되는 느림의 가치 즉 원초적이고 평화로운 삶에 대한 욕구뿐만 아니라 푸드 마일리지(food mileage : 음식이 우리 입에 들어오기 까지 이동한 총거리)처럼 그 이동거리가 짧을수록 더욱 가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염두에 두고 계신 박물관과 서점도 박사님께서 좋아하는 달팽이로 하면 될 듯싶습니다. '달팽이 박물관'과 '달팽이 책방'으로요."

 

와려에서 안단테의 속도로 사는 자의 행복

 

박사님은 잣나무 원목 책꽂이로 하면 좋겠다는 방법과 서점 이름도 아이디어를 얻어서 기쁘다며 저의 아내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방에서 들고 나온 것은 오시는 길에 서점에 들러서 사온 세 종류의 책이었습니다. 그중에서 한 권을 고르도록 제의했습니다.

 

요리가 마음이 치료가 될 수 있음을 잔잔하게 보여주는 소설 <달팽이 식당(오가와 이토 저/권남희 역 | 북폴리오)>,  야생 달팽이에 관한 에세이 <달팽이 안단테(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저/김병순 역 | 돌베개)>, 단편소설모음<20세기 한국소설-44 그 집 앞/양수리 가는 길/민달팽이/회색 눈사람/빗소리/산타페로 가는 사람 외 이혜경,김인숙 외 저 | 창비)> 등 모두 달팽이와 연이 닿아있는 책들이었다.

 

이 세 권의 책은 제 박사님이 직접 서점까지 가는 발품을 팔아 사온, 아직 본인도 보지 않은 것을 펼쳐놓은 것이었습니다. 어렵게 골라온 책을 한 권 들어내는 것이 좀 모질어 보였지만 아내는 그 중의 한 권을 검지로 알렸습니다. 

 

"저는 사모님이 그 책을 선택할 것으로 미리 알고 있었어요."

 

그동안의 대화를 통해 제 박사님은 우리 부부의 마음을 이미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 박사님은 아내의 요청으로 책 면지에 서명을 해주셨습니다.

 

"깊은 가을밤에 아름다운 대화 즐거웠습니다."

 

<달팽이 안단테>에서 '후천성 미토콘드리아병'이라는 희귀병에 걸린 저자 베일리는 친구가 함께 건네준 제비꽃 화분에서 달팽이와 조우한 후 그 달팽이를 통해 생명의 경이로움과 존재가치에 대한 숙연한 성찰을 합니다.

 

제 박사님이 매혹된 달팽이를 통해 안단테로 사는 그 분 삶의 가치와 진정성을 숨김없이 알 수 있습니다.

 

달팽이를 한자로는 와우(蝸牛)라고 합니다.

 

몇 년 전에 병원 영안실로 문상을 같다가 문상객을 맞는 접객실의 벽에 걸린 '蝸牛角上之爭(와우각상지쟁)'이라는 편액을 본적이 있습니다. 산자가 앞서가신 분과 이별하는 자리에서 아직 더 살아야하는 자의 삶의 태도를 깨우치게 하는 문구다, 싶었습니다.

 

<장자> 칙양(則陽)편에서 언급된 '달팽이 뿔 위에서의 다툼'이라는 이 편액을 통해 티끌처럼 하찮은 일에 집착하면서 살아있는 동안의 시간을 낭비치말라고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저는 제 박사께서 다시 다가오는 총선에 얼굴을 내밀겠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룸살롱 자리에 생태와 여행에 관한 책으로 가득한 달팽이 헌책방을 내고 사람들과 행복한 대화에 빠져계실 그 분의 가까운 미래를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행복한 미소가 번집니다.

 

제 박사님과의 하룻밤 대면을 통해 달팽이 뿔 위에서의 다툼 같은 탐욕을 버리고 와려(蝸廬 : 달팽이 집이란 뜻으로, 작은 집의 비유)에서 안단테의 속도로 자연과 이웃을 대면하는 삶이야말로 진정 가치 있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홈페이지 www.motif.kr 에도 포스팅됩니다.


#제종길#달팽이#헌책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