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카드의 혜택을 업그레이드 해드립니다

전화가 왔다. 1588로 시작하는, 익숙하지만 반갑지 않은 번호. 뭐지? 대출? 휴대폰 교체? 보험? 몇 번을 망설이다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래도 아주 가끔 유용한 정보도 있지 않았던가. 비록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전화 너머 상대방은 현재 내가 사용하고 있는 L신용카드 직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쨌든 내가 쓰고 있는 신용카드 회사의 직원이니, 내게 무작정 어떤 상품에 대해 광고는 하지 않을 테고, 내가 지니고 있는 카드의 혜택이나 조건 등을 이야기하려는 것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그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목소리의 여성은 내게 '가족카드'란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인즉슨 이번에 L신용카드사가 기존 고객들을 위해 하나의 선물을 준비했는데, 가족 명의로 카드를 하나 만들면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카드의 혜택을 모두 받을 수 있음은 물론이요, 이에 더하여 연말까지 쓸 수 있는 1만 점의 포인트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찝찝했다. L사가 어떤 회사인데, 왜 이렇게 갑자기 말도 안 되는 혜택을 준다는 거지? 가족카드 운운하지만 이거 혹시 사기 아냐? 계속되는 의심에 따져 묻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7년 전 전화를 통해 콘도 이용권과 관련하여 사기 비슷한 것을 당한 적이 있는 나이기에 그 목소리는 더욱 까칠했다. (오마이뉴스 2006년 4월 5일 <혹 텔레마케팅에 속았다 생각이 들면>)

"기존의 카드를 모두 통합하는 거라면,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카드 대신 이 카드를 써도 똑같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건가요? 카드가 통합되는 건가요?"
"그럼요. 모든 걸 통합하는 카드입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 주저거릴 필요는 없었다. 기존 카드의 혜택을 모두 포함한 카드가 새로 발급되고, 그 카드에는 포인트 1만 점이 서비스로 들어있다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난 그녀가 요구하는 대로 아내의 휴대폰 번호를 가르쳐주었고, 곧 도착하게 될 신용카드를 기다렸다. 1만 포인트를 두 달 안에 사용하려면 무엇을 사면 될까?

신규 신용카드 발급이라고?

잘려진 신용카드 이젠 지겹기까지 하다
잘려진 신용카드이젠 지겹기까지 하다 ⓒ 이희동

앞선 전화를 받고 1주일쯤 지났을까? 역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동네에 산다는 어느 아줌마. 그녀는 L사에서 발급한 신규 신용카드를 전해주겠다며 꼭 본인이 직접 사인해야 된다고 했다.

때마침 아내가 친정을 가고 내가 출장이 잡힌 터라 우리는 며칠을 미뤄 겨우겨우 접선할 수 있었고, 나는 그렇게 새 신용카드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럼 이제 이 카드만 가지고 다니면 기존처럼 교통카드도 되고, 주유소 할인도 받고, 대형마트 할인도 받는단 말이지.

그러나 왠걸. 혹시나 해서 읽어본 카드설명서에는 내가 기대했던 내용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기존 카드의 혜택이 모두 포함된다는 그런 별도의 구절은 언급되어 있지 않은 채 신규 신용카드의 다른 혜택들이 열거되어 있었다. 내게는 전혀 쓸모 없는 혜택들이.

다음날 아침, 급한 마음으로 카드사에 전화를 걸어 따지기 시작했다.

"새로 발급한 신용카드를 받았는데 이거 뭔가요? 기존 카드를 포함하는 게 아니라 아예 새로운 카드 발급인가요?"
"예, 고객님. 이번에 발급된 카드는 예전 카드와 전혀 상관없는 별도의 신규 카드입니다."

"제가 저번에 전화가 왔을 때 분명히 예전 카드와 통합되는 거냐고 물었었는데, 그때는 그렇다고 답했었거든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그때는 저희 마케팅팀에서 전화를 걸었던 거라서 지금 제가 그 당시 녹취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 제가 지금 카드를 폐지한다고 하면 되는 건가요? 연회비는 따로 나가지 않고요?"
"예, 고객님 폐지 가능합니다."

그렇다. 난 또 속은 것이다. 다행히 돈이 나간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신용카드가 생성되었고, 난 이렇게 통화까지 하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결국 난 새로 발급한 신용카드를 폐지했고, 내 손에 들려진 플라스틱 카드를 가위로 잘게 잘게 잘라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카드사는 내게 이 카드를 보내기 위해 꽤 많은 인건비를 썼을 텐데, 왜 이렇게 무리수를 펴는 것일까? 6개월 전만 하더라도 백수라면서 카드를 만들어 주지 않더니, 이제는 본인이 원치 않음에도 막무가내로 카드를 발급한단 말인가.

분을 삭이지 못한 난, 나와 비슷한 사례가 또 있지 않은지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검색창에 '카드 발급 사기'를 써놓고 검색 버튼을 클릭했더니 한 마디로 가관이었다. 나와 같은 사례들이 적지 않았으며 이와 관련하여 '제2카드대란', '가계대출 900조원'이 관련 검색어로 뜨는 것이었다.

제2 카드대란이 다가오는가?

최근 많은 전문가들은 제2 카드대란이 올 수도 있다고 경고를 하고 있다. 비록 카드사들의 자기자본율이 2002년 말 12.44%에서 현재 26.61%로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최근의 가계부채 급증과 금융시장 불안으로 카드사에 대한 신용리스크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경제가 어려움에 따라 부실의 위험이 커지고 있음에도 자산 건전성이 낮은 저신용자들에게 경쟁적으로 카드를 발급해주고 대출을 해주고 있는 카드사.

한국은행은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신용카드사들의 마케팅 비용이 지난해보다 30.3% 늘었다고 보고했는데 이는 카드회사들이 얼마나 방만한 운영을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는 결국 나와 같은 경우처럼 사기에 가까운 마케팅을 하기 위해, 최근 문제가 되었던 중소상인들의 카드수수료를 깎아주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수수료를 통해 엄청난 영업이익을 올리면서 제대로 된 금융관리는 방기함으로써 경제 위기를 부추기는 카드회사들. 과연 이들의 몰염치는 모기업의 자본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아님 서민경제를 볼모로 정부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 어쨌든 현재 신용카드 회사들의 무차별적인 경쟁은 우리 경제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으며, 결국 그 결과는 또 다시 서민의 몫이 될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현재 우리나라 가계부채의 총 합은 약 900조로, 한 가구당 5205만 원의 부채를 안고 있다. <개그콘서트-사마귀 유치원>의 일수꾼 표현을 빌리자면 월 216만 원씩 버는 월급쟁이가 24개월을 꼬박 숨만 쉬고 아무 짓도 하진 않으면 벌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문제는 대한민국 99%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제발 정부는 금융관리를 제대로 해주기 바란다. 그대들이야 이 정권이 끝나기 전에 경제위기가 찾아오겠냐며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1997년 IMF의 기억을 떠올려 보시기를.

아울러 카드사들에게도 부탁한다. 제발 위와 같은 전화 좀 하지 마시라. 이젠 짜증을 넘어서 지겹기까지 하다.


#카드대란#신용카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