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영화 '도가니'
영화 '도가니' ⓒ

며칠 전에야 벼르고 벼르던 영화 <도가니>를 보게 됐다. 아내와 같이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중학교 교사인 아내는 다른 때와 달리 영화 보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에서 교장·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행하는 성폭력 묘사가 너무 끔찍하다는 의견이 많아 학교 도서관에서도 책을 치웠다고 했다. 아내는 영화 장면이 상상 이상의 충격으로 다가올 것 같다면서 영화 보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실제 영화를 보니 성폭력 장면은 절제돼 묘사되어 있었다. '도가니 사건'의 주인공 같은 상황에 있는 친구나 가족들은 꼭 이 영화를 봤으면 했다. 우리 사회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이런 사건이 분명히 잘못된 것이고, 숨길 게 아니라 주위에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좋은 작품이었다.

이런 공감들이 국민들에게 전해져 마침내 비리의 온상이던 광주인화학교는 폐쇄됐다. 장애인 대상 성폭력 범죄에 대한 친고죄 폐지 등 사회복지 시설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는 소위 '도가니 방지 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됐다. 그리고 지난 10월 28일 국회에서 '도가니법'이라고 불리는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이번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장애인 준강간죄 조항을 세분화하고, 처벌 형량을 최소 10년에서 최고 무기징역형까지 대폭 강화했으며, 장애인 및 만13세 미만 아동에 대한 공소시효를 배제한 것이다.

그런데 왜 도가니가 청소년 관람 불가일까

그런데 영화 <도가니>가 '청소년 관람 불가'란다. 영상물등급위원회(아래 영등위)는 일반 영화 중에 가장 강력한 제한 등급을 매겼다. 제작사는 '15세 관람가'로 재구성, 심의를 요청했지만 지난 10월 10일 최종 심사에서도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다시 받았다. 이에 다시 재편집본을 제출했지만 지난 17일 있었던 영등위의 등급 분류에서도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았단다.

영화계에서는 '15세 관람가'로만 낮추어도 100만 관객이 더 볼 수 있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무엇이 두려워 청소년들이 이 영화를 보지 못하게 하는가?

영등위의 면면을 한 번 살펴보자. 지난 6월 9명의 5기 위원이 임명돼 3년간 임기가 시작된 영등위 위원은 <조선일보> 문화부기자 출신의 박선이 위원장을 비롯, 인천교총회장이며 인천 부평남초등학교장인 윤석진 부회장, 최미숙(학교를 사랑하는 학부모 모임 대표), 박노형(고려대학교 법학대학원 교수), 이원혁(방송제작자), 표양호(전 대통령 공보정부비서관) 등 대부분이 보수적인 인사로 구성돼 있다.

영등위는 영화인들이 자유로운 영화제작 및 상영을 위한 치열한 싸움의 결과로, 1996년 헌법재판소의 '영화사전 심의제도'에 대한 위헌 결정으로 탄생했다. <파업전야>(1987), <오 꿈의 나라>(1990), <닫힌 교문을 열며>(1993) 등 영화 사전 검열제에 맞서 싸운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한 자락이었으나 정권이 바뀌면서 보수회귀 바람을 타고 영등위위원 대부분이 보수 인사로 채워진 것이다.

이러한 영등위에 대한 우려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8년 문화연대는 "예술원과 국가가 독점하고 있는 위원 추천 선임구조를 민간참여 중심의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제도로 발본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연대는 "심의 및 결정과정 등을 모두 공지하고 분야별 전문성이나 동시대적 감각을 지닌 인사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나눠주기식 인사가 아니라 민주적 인선원칙을 통한 영등위 운영구조 개혁이 현재의 문제점을 해결할 방안"이라고 제시하기도 했다.

그동안 영등위는 할리우드의 거대한 상업자본이 만든 <터미네이터>, <트랜스포머> 등 폭력과 선정성이 넘치는 작품에는 '청소년 관람가'의 관대한 등급을 허용해 왔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을 착실하게 반영한 창작작품에는 역차별적인 등급 판정을 내리는 모순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도가니>에서 박 선생은 장애학생 전민수를 무자비하게 구타하면서 "예의를 지켜야지…"라고 한다. 혹 영등위 위원들은 마치 박 선생처럼 '예의를 지켜야지' 하면서 어른들이 저지르는 성폭력은 '너희들이 모르는 게 예의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도가니>가 '관람 불가'의 족쇄를 풀고 청소년들이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상호님은 해직교사소송지원단장입니다.



#도가니#영등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