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배임죄'(背任罪). 말뜻은 '본인에게 맡겨진 임무를 위배한 죄'다. 형법에는 구체적으로 "타인을 위하여 그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가하는 죄"(형법 제355조 2항)라고 규정하고 있다.

조금 풀어서 이야기하면 사적 또는 공적으로 어떤 일을 위임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어기고, 자기에게 또는 제3자에게 이익을 취하게 하여 위임 당사자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입히는 경우, 배임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가장 황당한 배임죄' 당사자인 내가 보기엔...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지난해 10월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뒤 법원을 나서며 환하게 웃고 있다. 서울고법 형사5부는 세금 소송을 중단해 회사에 손해를 끼친 혐의로 기소된 정 전 사장에게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지난해 10월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뒤 법원을 나서며 환하게 웃고 있다. 서울고법 형사5부는 세금 소송을 중단해 회사에 손해를 끼친 혐의로 기소된 정 전 사장에게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 연합뉴스
지난 '증언'에서 밝혔듯이 <한겨레>는 지난 11월 1일, 한명숙 전 총리 무죄 판결 뒤 기사에서 나의 '배임사건'을 가리켜 ""이명박 정부 들어 진행된 검찰 수사 중 법조계에서 가장 황당한 수사로 꼽는 사례"라고 밝혔다.
그렇게 '가장 황당하게' 배임죄를 경험해 본 나로서는, 내곡동 사저 구입과 관련해 다시 불붙기 시작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배임' 논란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나의 배임사건에 대해서는 앞으로 차근차근 자세한 내용을 풀어나가겠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배임'과 비교하기 위해 우선 간단하게 짚어보도록 하겠다. 내 사건에서 검찰이 엮어놓은 얼개는 대략 이렇다.

1994년부터 KBS와 국세청 사이에는 세금 분쟁을 둘러싸고 17건의 재판이 진행되어 왔다. 이 가운데 1심 판결이 내려진 16건에서 KBS는 7승 9패(1건 미판결)였다. 이 7건의 1심 승소판결 소액을 모두 합치면 1764억 원이고, 환급가산 이자 684억 원을 합치면 KBS는 1심 승소금액 2448억 원을 모두 국세청으로부터 환급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연임의 욕심에 사로잡힌 피고인(정연주 사장)이 예상되는 적자를 없애기 위해 서둘러 서울고등법원의 조정을 통해 환급액 556억 원만 받고, 그 차액인 1892억 원 상당의 재산상 이익을 국가(국세청)에게 취득하게 하고, 같은 액수 상당의 재산상 손해를 KBS에 입혔다는 것이다.

검찰의 공소장 맨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피의자는 공사(KBS 지칭)가 조세소송을 통해 환급받을 수 있는 금액인 2448억 원(환급가산 이자 포함)을 합리적 이유 없이 포기하여 실제 환급액과의 차액인 1892억 원 상당의 재산상 이익을 국가에게 취득하게 하고 동액 상당의 재산상 손해를 공사에게 가하였다."

여러 '기적적인 전제들'이 필요했던 나의 '배임사건'

검찰의 이런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여러 '기적들'이 전제가 되어야 했다. 검찰은 승소가 '매우 유력'하다고 했고, 그래서 1심 승소소송 가액 전액을 (가산이자까지 포함하여) KBS가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배임죄 구성의 대전제였다.

이렇게 배임죄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추가적인 '기적적 전제들'이 필요했다. KBS가 모두 승소를 하고, 그 다음 국세청은 KBS에 돈을 환급해 주고, 그러고도 세금을 재부과하지 않는 (징세권을 포기하는) 게 전제가 되어야 했다. 재부과를 하면 KBS가 다시 세금을 물어야 하니, 환급받으나 마나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징세권을 가진 국세청이 재부과의 징수권을 포기할 리 만무다. 더군다나 KBS가 승소한 판결에서도 재판부는 국세청이 '추계과세'를 할 수 있다고 판시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국세청이 재부과를 할 경우, KBS는 이에 불복할 것이고, 그래서 다시 소송을 시작하게 될 터인데, 이 소송에서도 KBS가 다시 100% 이긴다는 또 다른 기적적 전제가 필요했다.

그리고 KBS와 국세청 사이의 세금 분쟁은 서울고등법원의 중재로 해소되었다. 내가 배임죄를 저질렀다면 중재를 한 서울고등법원은 배임의 공모자가 될 수밖에 없다.

나의 배임사건이 '가장 황당한 사건'이 되어버린 여러 이유들 중 몇 가지만 간단하게 추려본 것이다(이밖에도 나의 배임 사건은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어떻게 이럴수가' 하는 내용들이 많다. 앞으로의 증언에서 풀어나갈 예정이다).

내곡동 게이트의 알맹이를 전한 전 경호처장의 증언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의 배임 정황은 나의 '황당 케이스'와 다른 것 같다. 이익이 돌아간 대상이 '국가'라는 제3자도 아니고, 여러 기적적인 전제들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익을 본 대상은 매우 구체적이고, 발생한 행위와 전후관계가 분명하다. 특히 내곡동 사저 파문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김인종 전 대통령실 경호처장이 <신동아>와 한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들은 너무나도 생생하다.

김 전 처장의 증언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 경호처에서 후보지로 검토한 12군데 가운데 내곡동을 추천받은 뒤 직접 현장을 둘러보고, 사저 터로 승인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입자금은 이명박 대통령의 '개인 돈'을 사용했고, 경호처 의견을 받아 들여 아들 시형씨 이름으로 구매를 했다는 것이다. 김 전 처장은 이와 관련하여 <신동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내곡동 땅을 방문해 OK 하니까 샀지. 돈 투자하는데 내 마음대로 했겠나? (대통령의) 승인이 나니까 계약을 하는 거지."
"이번 사저는 각하 개인 돈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총무수석(김백준)이 알 필요도 없지. 그러나 알기는 알았지만..."
"(이 대통령이) 평생 사실 집이고 개인 돈을 투자한 것."

이런 발언 내용은 이명박 대통령이 내곡동 터 구매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청와대의 해명과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청와대는 내곡동 사저 문제가 터지자, 아들 시형씨가 내곡동 땅을 구매할 때 사용한 돈 가운데 6억 원은 부인 김윤옥씨의 땅을 담보로 은행대출을 받았고, 나머지 5억2000만 원은 친인척에게 빌렸다고 설명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아들 이시형씨와 대통령실이 공동으로 구입한 서울 서초구 내곡동 20-17번지 일대 저택의 입구.
이명박 대통령의 아들 이시형씨와 대통령실이 공동으로 구입한 서울 서초구 내곡동 20-17번지 일대 저택의 입구. ⓒ 권우성

이명박 대통령의 배임과 관련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추궁하는 이는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다. 이 대표는 김인종 전 경호처장의 '증언' 이후 "결정적인 증거가 나왔다고 본다"고 밝혔다. 그리고 준비중인 고발장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부인 김윤옥씨가 (민주당에서 고발한) 임태희 대통령실 실장, 김인종 대통령실 경호처장, 이 대통령의 아들 시형씨 등과 공모해 10억 원 상당의 이익을 취하고, 10억 원 상당의 재산적 피해를 대통령실에 입혀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배임)을 위반한 혐의가 있으며, 대통령 부부가 매수한 부동산을 아들 명의로 명의신탁하여 등기해 부동산 실권리자 명의 등기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혐의가 있어 고발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법학자인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는 더 적극적으로 '배임'을 넘어 '탄핵 사유'로까지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번 내곡동 사저 구입에는 경호처가 개입하는 등 공권력이 관여했기 때문에 이것을 '대통령의 사적 비리'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우리나라 헌법이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법치주의를 당연히 내포하기 때문에 내곡동 게이트 같은 법치주의 훼손은 대통령이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저버린 것이라서 당연히 탄핵 사유가 된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상돈 교수 "정연주 사장이 겪었던 고초는..."

이에 앞서 이 교수는 10월 중순, 내곡동 사저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때부터 '업무상 배임죄'로 봐도 무방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10월 25일 내곡동 문제에 대해 이런 글을 썼다.

...'내곡동 게이트'는 대한민국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대한민국 정부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들이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재산상 이익을 취한 것이니, 드러난 사실만으로 보아도 최고형이 징역 10년인 '업무상 배임죄'를 구성한다고 보기에 무리가 없다. 이들은 공(公)과 사(私)를 분명히 구분해야 하는 기초적 임무를 위반해서 사익을 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곡동 사저 계획을 백지화한다고 해서 범죄행위가 무마되는 것도 아니다. 도둑이 절도를 한 다음날 아침에 마음이 변해서 주인한테 훔친 물건을 되돌려준다고 해도 절도죄가 무혐의가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말하자면 범죄행위는 이미 완료된 것이다. 더구나 언론에 의해 폭로되자 할 수 없이 백지화한다고 했으니, 자고 일어나서 양심의 가책 때문에 훔친 물건을 되돌려준 도둑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십억 원 대의 부동산 거래가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과연 원상회복이 될는지도 알 수 없다. 대통령이 퇴임 후 어디에 살 것인지는 대통령 본인의 결심이 없이는 결정하기가 불가능한 것인데, 일개의 경호처장이 이런 일을 책임지고 저질렀다는 변명은 그냥 듣기에도 거북하다.

 참여연대 박원석 협동사무처장을 비롯한 활동가들로 구성된 '이명박 대통령 사저 부지 방문단'이 지난 10월 17일 낮 서울 서초구 내곡동 사저 부지를 방문해서 '이곳은 범죄현장입니다'가 적힌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부동산 실명제 위반'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참여연대 박원석 협동사무처장을 비롯한 활동가들로 구성된 '이명박 대통령 사저 부지 방문단'이 지난 10월 17일 낮 서울 서초구 내곡동 사저 부지를 방문해서 '이곳은 범죄현장입니다'가 적힌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부동산 실명제 위반'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 권우성

횡령죄와 달리 배임죄는 구성요건이 애매하기 때문에 검찰에 의해 남용될 가능성이 높다. 어느 회사의 간부가 회사에게 손해가 되고 제3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알고도 방치했다면 배임이 되겠지만 단순한 경영상의 실수가 배임죄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그 구분이 모호할 수 있기에 검찰의 무리한 수사와 기소가 우려되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 검찰이 정연주 전 KBS 사장을 배임죄로 기소한 것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정연주 전 사장은 사장을 지내던 지난 2005년 국세청을 상대로 KBS가 제기한 법인세 부과 취소 소송의 1심에서 이기고 항소심을 진행하던 중 법원의 조정권고를 받아들여 556억원을 환급받기로 하고 소송을 취하해서 KBS에 1892억원의 손실을 끼쳤다는 배임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으나 1심, 2심에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검찰은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공기업이 정부를 상대로 세금 환급을 철저하게 받아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정 전 사장을 기소했으니, 대한민국 정부의 일원인 검찰이 정부보다 공기업을 더욱 사랑한 셈이다.

보통 사람 상식으로는 정부기관인 검찰은 같은 정부기관인 국세청 편을 들어야 하는 법인데, 검찰이 별안간 KBS의 수호천사로 돌변해서 정연주 전 사장을 향해 칼을 빼들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무죄판결이 나왔지만 정 전 사장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 전 사장의 행위가 배임죄를 구성한다고 생각했던 검찰이, 아무리 선의로 해석해도 국고를 빼돌린 것으로 보이는 '내곡동 게이트'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명박 정권의 정치 검찰이 마구 휘두른 '배임'의 칼날이 부메랑이 되어, 결국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 겨누고 있는 형국이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는 21일 한 라디오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명박 대통령 내외를 지칭하면서 "아마 형사 처벌이 예약된 최초의 대통령 내외분이 아닌가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연주#KBS#배임죄#이정희#이상돈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6,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전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논설주간, kbs 사장. 기록으로 역사에 증언하려 함.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