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옛날 영화를 좋아합니다. 지금은 나이든 여배우들의 젊은 모습과 그 시절 한국의 풍경을 영화로 보는 건 너무 근사한 일이니까요. 특히 6,70년대 활동한 배우들을 좋아하는데, 그네들을 잘 모르면서도 막연한 동경과 경외감을 갖고 있습니다. 뭐랄까? 그 무렵 한국 사회가 수많은 격동을 지나왔을 때인데 영화 속의 여배우들은 다들 우아하고, 그 정점에서 넘치는 긴장미를 슬쩍 흘립니다. 더구나 그 시절 여배우들이 입은 옷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워서, 요즘 70년대 패션이 왜 다시 유행하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지금은 할머니가 된 엄앵란씨가 아침 토크쇼에서 '우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그 환상을 깨건 말건 영화 속에서 보는 젊은 그녀의 풋복숭아 같은 시큼함은 너무 좋습니다. 정윤희, 유지인 같이 지금도 회자되는 배우들도 좋지만 이름도 성도 모르는 여배우를 뜻밖에 발견하는 기쁨은 특히 좋습니다. 최근에 본 영화에서 굉장한 매력의 여배우를 하나 발견했는데, 이제는 오십이 족히 넘었을 그녀의 이름은 최민희입니다. 그녀의 데뷔작 '숲과 늪'을 바람 차가운 날 부산까지 가서 보았습니다.
옛날 신문에선 이 영화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더군요. '금전만능 풍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인기작가 황석영의 신문 연재소설인 '섬섬옥수'를 홍파 감독이 각색하고, 이장호, 하길종, 이원세 등이 주축이 된 영화동인'영상시대'에서 신인을 발굴해서 만든 영화라고요. 이제 고교생 논술 텍스트로 사용되는 소설'섬섬옥수'를 '병태와 영자', '별들의 고향2'로 유명한 하길종 감독이 박근형, 하재영, 최민희를 주연으로 1975년에 만든 영화가 바로 이 영화 '숲과 늪'입니다. 그 시대 보기 드문 모던하고 영상미가 가득한 작품이란 것이 가장 큰 매력이죠.
3인의 남성과 1인의 여성이 물질과 사랑에 대한 가치관을 펼치는 것이 줄거리인 이 영화는 지방유지의 딸이며 여대 졸업반인 한 여대생의 미묘한 심리 변화를 쫒고 있습니다. 그녀는 미국유학을 다녀온 건축사와 약혼을 한 사이이며,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문대 얼뜨기 남학생 하나가 그녀를 쫒아 다녀서 골치가 아픈 중입니다. 농촌봉사 활동에서 단추하나 달아 준 이 여자에게 푹 빠져버린 얼뜨기. 알고 보니 야간 실업고 출신이란 핸디캡을 딛고 명문대에 들어온 막가파 노력인 이었네요. 이제 아름다운 여성을 얻음으로써 그간의 고난에 종점을 찍으며 자신의 삶을 재확인 받으려는 그는 기숙사건 어디건 그녀를 향해 뛰어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지저분하기 짝이 없고 무식해빠진 수리공 하나가 얼결에 이 일에 말려들면서 반전을 가져옵니다.
영화 전반에는 부잣집 규슈들이 꽃꽂이와 요리, 요가를 배우러 다니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선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듯이 각 수업의 강사들은 헌신하는 여성을 강조합니다. 소고기 육전을 만들려고 싱싱한 핏물이 흐르는 고기를 도마 위에 척척 잘라놓고 밀가루도 준비하는 등, 대학 졸업반 부잣집 규수들은 사회가 만들어 온 규칙들을 아무 불평 없이 하나씩 배워나갑니다.
이후 요가학원에서는 자유자재로 몸을 스트레칭하며 몸매 다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로테스크한 음악과 함께 이 장면은 매우 비중 있게 다뤄지는데, 물고기처럼 유연하게 똑같은 포즈로 허공을 향해 움직이던 그녀들의 다리는 어느 순간 정적 속의 화석인양 굳어버립니다. 미혼인 두 여대생과 달리 그물스타킹을 신은 아줌마 요가 강사는 그 군무의 최후에서 한쪽 다리를 의미 있게 벌립니다. 이른바 그물에 잡힌 물고기의 사망, 아니면 여성으로서 남성에게 안주하려는 기혼 여성의 심리를 그린 거라고나 할까요?
사회는 그녀들에게 엄격한 가부장제도 하의 멋진 신랑감을 위해 지금을 희생하라 가르칩니다. 그리고 남성에게 순종하는 삶을 최고라고 여기게 만듭니다. 여주인공이 아파트로 독립해 나오기 전까지 그녀가 살던 곳도 수녀 사감이 지키는 엄격한 기숙사였습니다. 하지만 얼뜨기의 스토킹을 견디다 못해 아파트로 나와 살면서 그녀는 젊은 여자의 본능에 서서히 눈뜨게 됩니다. 욕실 수리를 하러 온 지저분한 수리공을 얕보면서 자신의 성적 매력을 한껏 과시하곤 그의 시선을 즐기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아파트 란 틀처럼 정형화된 삶 안에 있는 자신과 달리, 주차장에서 자전거를 타며 행복해 하는 가정부의 모습을 지그시 내려다보곤 흔들리는 주체감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미 36년 전에 지금과 똑같은 통에 담겨 그 위용을 자랑하는 존슨즈베이비오일과 P&G샴푸가 있는 아파트. 거기다 프랑스 배우처럼 너무 멋진 약혼자와는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하게 될 테지만, 그 어느 것도 완벽한 인생은 아닌 듯싶어집니다. 모든 정신없는 회오리에서 빠져나가고 싶던 여자는 새벽의 시외버스 터미널로 수리공을 불러냅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으리라 도착한 곳은 숲과 늪이 있는 한적한 무인도입니다.
"똥치 같은 게 겉멋만 잔뜩 들어가지고..."수리공은 이렇게 내뱉고 여자를 덮칩니다. 순진한 자신을 괜히 이리저리 약 오르게 하던 부잣집 여자가 이제는 눈꼴사나워진 것입니다. 능욕당한 여자는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할 처지가 되어 눈물을 흘리곤 그간 헤매던 답을 어렴풋이 찾은 기분입니다. 이윽고 세월이 흘러 여자는 일상으로 되돌아와 있습니다. 그리고 테니스코트에서 운동하다 떨어진 공을 줍던 중, 대신 쥐어주는 누군가의 손을 만납니다. 약혼자가 사람을 시켜 겁을 줘 떨궈 낸 그 남자, 그 옛날의 얼뜨기 스토커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어엿한 직장인이 된 그가 양복을 입고 그녀 앞에서 활짝 웃고 있습니다. 그녀도 싫지 않은 미소를 함께 보냅니다.
12월 말까지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는 개관 기념으로 국내외 고전 영화를 상영합니다. 옛날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나 단편영화 혹은 독립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가보실 만합니다. 차가운 환절기에 마음에 작은 여운을 남길 영화들을 이곳에서 많이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올가을 부산 영화제가 개최된 이곳은 이제 국내 최대의 예술영화관으로서의 발돋움을 하는 중이며, 각종 공연장과 영화관이 최고의 시설로 갖춰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