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는 보수적인 사학자였다. 어느 날 아버지는 지도교수였던 강만길 교수가 대공분실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면회를 갔다가, 술이 만취돼어 돌아와 "강 교수가 찾아오지도 아는 척도 하지 말라더라"며 한숨을 쉬셨다. 강 교수가 끌려 간 이유는 일본에서 불온서적을 가져와 소지했다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재직하던 학교 동료 교사 한 분은 술이 취해 택시를 잡아타고 가면서 박정희를 욕했다고 한다. 그 분은 이후 택시기사의 신고로 대공분실에 끌려갔고, 사상이 불온하단 이유로 반병신이 돼 돌아왔다.
학자가 학문에 필요한 책을 소지했다고, 술에 취해 대통령을 욕했다고 대공분실에 끌려가 반병신이 되던 세상. 장발, 옷 색깔, 미니스커트도 규제 대상이던 비상식적인 세상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국가보안법이라는 마녀사냥 도구 때문이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이 생겨난 지 63년이나 됐다. 그동안 그 악법으로 인해 무고한 수많은 시민들이 간첩이나 사상범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거나 옥살이를 했고, 지금도 양심수들이 감옥에 갇혀 있다.
국가보안법은 남북 분단의 특수상황에서 만들어진 기형적인 법으로, 국가안보를 지키기 보다 국가와 권력자들의 정치 권력 도구로 악용됐다. 법의 필요성이 1이고 그 폐해가 99라면 그 법은 당연히 폐지되거나 만들어지지 말았어야 한다.
독재정부 시절 이따금 신문 1면을 커다랗게 장식하던 간첩단 검거 사건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들이 사용하거나 소지했다는 도구는 기껏해야 등사기와 책 몇 권이었다. 그런데 신문은 간첩들의 조직과 계보 활동사항, 자랑스러운 검거 상황이 주르륵 실었다. 식민시대 일제 앞잡이들에 의해 밀고 당하고 전쟁의 수난을 겪은 세대들이라, 간첩이라는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유죄로 인정되고 대다수 국민들이 용서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일제시대 친일 활동을 하며 권력에 빌붙었던 이들은 또 다시 권력을 잡자, 국민을 상대로 사냥을 해댔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본론을 읽었다는 이유로, 혹은 자본론 복사본을 지니고 있었다는 이유로 사상범이 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감옥에 가서 무기징역을 살아야 했다. 심지어 리영희 선생 책이나 김지하 시인의 시집을 읽거나 지니고 있어도 요주의 인물로 찍혔고,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나오면 멀쩡한 사람도 간첩으로 둔갑됐다.
국가보안법의 실체를 아는 사람들과 양심수로 석방된 이들이 매주 목요일 파고다 공원 앞에서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치고 있다.
그런데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SNS(Social Network Service)와 애플리케이션(이하 앱)을 심의하는 뉴미디어 정보 심의 전담팀을 신설해 검열하겠다고 나섰다. 개인의 취향, 활동상황, 친구관계 등 개인의 내밀한 사생활을 정부가 일일이 들여다보겠다는 이야기다. 국가보안법보다 더 지독하게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겠다니 정부의 눈에는 99%의 국민이 모두 잠정 범죄자집단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국민들의 거센 반발에 대해 방통위는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 발맞춰 해당업무를 보다 효율적·체계적으로 수행하자는 취지"라는 옹색한 변명을 해대고 있다.
지금도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문제의 소지가 있는 글이나 사진이 올라오면 일차적으로 게시자에게 자진 삭제를 권고한 뒤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계정을 차단한다. SNS에 대한 심의가 현재도 존재하고, 시정요구 조치 또한 이뤄지고 있다. 충분히 자정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정부가 전담팀까지 꾸려 감시를 하겠다고 나서는가. 이는 종편과 공공언론 장악에 이어 개인 미디어를 통해 소통하는 국민들의 눈과 귀와 입까지 철저하게 막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만일 국민들의 입을 막으면 산과 들판과 메아리와 돌멩이가 일어서서 외칠 것이다.
절대왕권 시절에도 벽보는 있었고, 상소도 신문고도 있었다. 마을 우물가에서 동네 소식이 오가고 학교와 교회에서 나라 안팎의 돌아가는 일들을 서로 전했다. 동네마다 여론이 형성되고 잘못을 비판하고 바로잡으며 자율적인 정화가 이루어져 왔다. 아고라 광장이 살아있던 아테네에서 가장 먼저 시민들의 민주주의가 시작됐다. 역사는 언제나 시민들에 의해 새로운 변화를 거듭하며 이어지고 발전해 왔다.
그렇다. 건전한 사회란 모름지기 광장이 살아있어야 하고 말할 자유와 집회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아테네 언덕의 아고라 광장처럼 광화문 광장에도 서울광장에도 수많은 시민들이 주말마다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고 문화 난장으로 축제를 벌이며 더 나은 대안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인터넷 공간 속의 아고라, 트위터, 페이스북에서도 다양한 의견, 기발한 아이디어, 때론 엉뚱해 보이는 상상력이 무한히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끊임없이 창의적인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진정 검열과 규제로 국민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다. 당나귀 귀를 지닌 임금이 목숨을 담보로 이발사의 입을 봉했지만 한 사람이 알던 진실은 대나무 숲 바람결에 실려 온 나라에 알려졌다.
비폭력인 풍자와 개그, 국민들의 거센 여론을 권력이 얼마나 오랫동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국가가 아무리 강력한 도구와 방법을 동원해 국민들의 생각과 사생활을 검열한다 할지라도 개인의 마음속까지 들여다 볼 수는 없다. 1%는 결코 99%를 영원히 억압하며 군림할 수 없다. 한계 상황에 이르면 누가 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폭발할 때가 올 것이기에.
99%의 뜻에 반한 한미FTA가 국민들의 가슴 속에 있던 촛불의 불씨를 다시금 타오르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정부가 SNS 검열이라는 국가보안법의 또 다른 변종 기형아를 기어이 마녀사냥 도구로 사용하려 든다면 국민들의 타오르는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이다. 부디 국민들의 정서를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읽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