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을 다니다 보면 옛 지방관아(현 군청이나 시청)나 향교, 서원 인근에 공적비, 송덕비, 선정비 등의 이름이 새겨진 옛 비석들이 줄지어 선 모습을 더러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비석들은 조선시대 지방관들의 선정(善政)을 기려 세운 것이 대다수이나 더러는 일제 때 군수를 지낸 사람들의 것도 있습니다.
일전에 충남 옥천엘 들렀다가 구(舊)읍내 육영수 여사 생가 앞에 비석이 줄지어 서 있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곳에도 일제 때 군수를 지낸 자의 공적비가 몇 있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또 근년에 충남 금산엘 갔다가 금산향교 구경을 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도 이런 종류의 비석들이 향교 정문 좌우로 줄지어 서 있더군요. 그 몇을 살펴봤더니 일제 때 군수를 지낸 사람들의 선정비였습니다.
며칠 전, 강원도 정선·영월 등지에서 지역문화운동을 펼치고 있는 강기희(정선문화연대 대표) 선생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강 대표는 소설가이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도 활동하면서 강원도 지역소식을 전해주곤 하는 분입니다.
서로 안부를 나눈 다음 강 대표는 근황을 전해주다가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들려주었습니다. 정선의 대표적 관광지인 '정선아라리촌'에 유명한 친일파의 공적비가 서 있다며 지역시민들과 함께 안내판 건립 등 문제의 공적비 제대로 알리기 운동을 펼치고 있노라고 했습니다.
강 대표는 이 공적비가 일제 때 친일파였던 정선군수가 세운 것이어서 더더욱 문제라고 했습니다. 듣고 보니 그냥 방치해둘 사안이 아니다 싶어 이곳 '역사 에세이' 코너에서 한번 다뤄보겠노라고 했습니다.
정선아라리촌에 있는 문제의 '공적비'는 친일파 이범익(李範益, 창씨명 淸原範益, 1883~?)의 것입니다. 이범익은 일제 때 국내는 물론 만주 지역에서 거물 친일파로 활동한 자입니다.
이 공적비는 이범익이 강원도지사 재직 당시 그의 휘하에 있던 정선군수 김택림(金澤林, 창씨명 金光博, 1888~?)이 소화7년(1932년)에 세운 것으로, 1970년대 초반까지는 정선군청 내 마당에 세워져 있었으나 군청 건물을 증축하는 과정에서 정선읍내 비석거리가 있던 우전거리로 이전되었다가 그 후 정선 남산 밑, 비봉산 입구 등으로 전전하다가 2008년 정선아라리촌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이 비석은 정선의 충신 윤칠봉의 추모비 등 10여 기와 함께 서 있는데 그 가운데 크기도 가장 클 뿐더러 비석의 재질도 최상급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문제의 비석에 대해 한번 살펴볼까요? 강 대표가 보내온 비석 사진과 비문 소개자료에 따르면, 앞면에는 세로로 '강원도지사 이범익 각하 영세불망비(江原道知事 李範益閣下 永世不忘碑)'라고 새겨져 있는데, '불망비(不忘碑)'라는 이름을 단 비석은 다른 곳에도 적잖이 있습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대통령을 상징하던 '각하'라는 호칭은 일제 때는 도지사급(고등관 2등 이상) 이상의 고관에게 붙였습니다. 비석 뒷면에는 도지사 시절 이범익의 공적을 극찬한 4언 율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만약 이런 식으로 공적비를 세울 요량이라면 국회에서 예산 따서 지역구에 다리 놔준 국회의원 모두 공적비를 세워줘야 할 것입니다. 결국 김택림이 세운 이범익 공적비는 다분히 아부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비문 제1연 결(結)의 '이후(李侯)'는 이범익을 말하며,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峽絶東郡 環者皆山 협절동군 환자개산 康莊莫通 懋遷極艱 강장막통 무천극간 惟我李侯 何暮東藩 유아이후 하모동번 矜民勞苦 眷愛頻煩 긍민노고 권애빈번 東遷五丁 始達九逵 동천오정 시달구규 以鎰十萬 助給其資 이일십만 조급기자 便宜吾民 從見富殷 편의오민 종견부은 萬口皆碑 永頌厚恩 마구개비 영송후은깊은 산골짜기 동군이라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사방팔방 막혔으니 힘써 교역하기 심히 어렵네 우리 이후시여, 이 고을에 어찌 이리도 늦었는고! 백성 위해 노고하며 사랑으로 돌보기를 다하셨네 동쪽으로 오력사를 파견하여 사통팔달 뚫리었고 십만 일 거금으로 밑천 들여 자본으로 도와주었네 우리 백성 편의하니 이로부터 넉넉하고 풍성해져 많은 사람 칭찬하니 두터운 은혜 영원히 칭송하네
비문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이 비석이 세워진 그해(1932년)에 이범익이 정선에 다녀간 것으로 보입니다. 정선지역 향토사 자료에 따르면, 정선의 동쪽, 즉 지금의 화암면인 '동면' 지역은 일제 당시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금광이 있던 곳입니다. 현재 화암동굴로 관광명소가 된 이곳에는 '천포광산'이 있었는데, 이 금광은 당시 조선에서 5대 금광 중 하나로 불렸습니다.
광산이 있던 이곳은 정선에서 전기가 가장 먼저 들어왔는데 이는 금광 때문이었습니다. 추정컨대 이범익은 강원도지사 재직 시절(1929~1935) 일본인들의 채금작업을 지원하기 위해 금광 인근까지 신작로를 개설하거나 또 기타 부대시설을 지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때 든 비용이 '십만 원'이었고, 이를 고맙게 여긴 당시 정선군수 김택림이 문제의 공적비를 세운 셈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문제의 비석과 관련된 정선군수 김택림과 강원도지사 이범익의 일제하 친일행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평남 평양 출신의 김택림은 16세 되던 해인 1904년 평남 중화군 사립 일어학교 특별과를 졸업한 후 평양감리서 통역을 거쳐 관리로 진출했습니다. 평남, 강원도 일대 군청 서기 등을 지낸 그는 1930년 5월 군수로 승진해 강원도 정선군수에 임명돼 1933년 5월까지 만 3년간 재직했습니다.
군수 재직 중 그는 '훈6등 서보장'을 받았으며, 퇴임 후에는 김화상사(金化商事) 감사역, 김화군소작위원회 예비위원, 김화수리조합 간부 등을 지냈습니다. 군수 출신임에도 이례적으로 그는 1936년 강원도 통천군 순령면장에 임명되었는데, 이듬해 중일전쟁이 터지자 군수품 공출, 군사원호, 국방헌금품 모집 등 전쟁지원 업무를 적극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또 태평양전쟁 발발 후인 1943년 3월 강원도 통천군민들이 모금하여 구입한 애국기 '통천호' 헌납식 때 통천군수와 함께 헌납대표로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군수 출신 가운데는 친일행위가 구체적이며, 적극적인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음은 이범익. 이범익은 수많은 친일파 가운데 1등급에 드는 거물입니다. 그가 일제(만주국 포함) 때 역임한 대표적 직함 몇을 소개하면, 중추원 참의·도지사·만주국 참의부 참의·간도성 성장(省長) 등으로 이는 엔간한 친일파라도 하나 맡기도 어려운 고위직이랄 수 있습니다.
중추원 참의 하나 빼고는 모두 막강한 권한을 가진 자리였으며, 특히 그는 국내와 만주에서도 요직을 맡았던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났습니다.
이범익은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한 지 두 달만인 1949년 3월 반민특위 경기도조사부에 의해 체포돼 조사를 받았으나 반민특위가 문을 닫기 직전인 8월에 기소유예로 풀려나 면죄부를 받은 셈입니다. 그의 생몰연대에서 사망연도가 없는 것은 그가 한국전쟁 때 납북됐기 때문입니다. 오욕으로 얼룩진 그의 삶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1883년 충북 단양 출신인 이범익은 1903년 4월 관립 일어학교를 졸업했는데, 그의 공적비를 세운 정선군수 김택림과 출발이 비슷한 셈입니다. 이후 외국어학교 부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1904년 8월 경성병참사령부 통역을 시작으로 1907년 3월까지 한국주차군사령부에서 통역으로 종군하였습니다. 이같은 공로로 그는 1908년 일본 정부로부터 은사금 80원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대한제국 내각에 들어가 번역관을 지내다가 1912년 군수로 승진해 강원도 춘천군수로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이후 경북 여러 곳에서 군수를 지낸 후 1921년 사무관으로 승진해 조선총독부 내무국 내무부장을 거쳐 1927년 경남 참여관으로 옮겼습니다. 1929년 강원도지사(고등관 2등)에 임명돼 6년간 근무했는데, 바로 이때 문제의 공적비가 세워졌습니다.
이후로도 그는 탄탄대로를 걸으며 승승장구하였습니다. 강원도지사를 물러난 후 곧바로 충남도지사(고등관 1등) 전임된 그는 2년 뒤인 1937년 2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칙임관 대우)에 임명되어 그해 7월까지 재직했습니다. 당시 총독은 미나미 지로(南次郞)였는데, 관동군 사령관 출신인 미나미는 시정방침의 하나로 '선만일여(鮮滿一如)', '조선과 만주는 하나'라는 기치를 내걸고 만주지역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이범익은 그해 8월 금산 군수 출신의 김창영(金昌永, 일제말기 경북도지사 역임) 등과 함께 만주로 전입하여 만주국 국무원 촉탁(간임관 대우)에 임명되었고, 다시 11월 간임관(簡任官, 조선의 칙임관에 해당함) 1등의 만주국 간도성 성장(省長)에 임명되었습니다. 조선인으로서 만주국 성장을 지낸 사람은 그가 유일합니다.(유홍순은 간도성 차장을 지냄)
간도성은 동북3성 가운데 하나로 조선인들이 대거 거주하던 곳이어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간도성장 재임 시절인 1938년 그는 간도 일대의 조선인 항일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만주국군 내에 특수부대 조직을 제안했는데, 이 부대가 바로 백선엽 등이 근무했던 소위 '간도특설대'입니다. 일제 패망 때까지 간도 지역에서 활동한 간도특설대는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한 100여 차례의 공격은 물론 민간인에 대한 강간·약탈·고문 등으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이범익은 간도지역 항일무장 세력에 대한 귀순공작 등을 목적으로 1940년 10월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에서 발족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東南地區特別工作後援會)'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특무공작에도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당시 그와 함께 간도에 파견되었던 김창영은 동북항일연군 소속 김일성(金日成)부대에 귀순공작을 펴 큰 타격을 입히기도 했습니다.
또 이범익은 1942년 2월 조선인의 근로보국(勤勞報國)을 내용으로 하는 '국민개로운동(國民皆勞運動)'을 제안하였으며, 그해 5월 일제가 조선에서의 징병제 실시를 결정하자 만주지역 친일지인 <만선일보>에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일제 패망 두 달 전인 1945년 6월 만주국 참의부 참의를 사임한 그는 만주로 건너간 지 8년 만에 조선으로 귀국하였으며 귀국 직후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습니다. 20세 때 일어학교 졸업한 후 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으로 친일의 길에 들어선 그는 만 41년간을 친일로 일관했습니다. 바로 이런 자를 칭송하는 비석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에 버젓이 서 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정선군청은 여태 이렇다 할 입장표명도 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 비석을 철거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철거만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치욕의 역사를 길이 남겨 후세에 역사 교훈의 증거자료로 삼는 것도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정선문화연대측은 최근 성명을 통해 "비석을 철거하자는 여론이 높지만 친일파의 흔적을 없애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느니 아픈 역사이지만 도려내기보다는 품기로 했다"며 이범익의 공적비 옆에 그의 친일반민족 행적을 알리는 안내판 건립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강 대표에 따르면, 12월 중순경 안내판을 세울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친일파가 세운 친일파 공적비는 이제 오욕의 역사를 증언하는 역사교육의 산 자료로 길이 활용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