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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서둘러 특급열차에 타지만, 이젠 자신이 무엇을 찾아 그리도 헤매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중에서

바쁜 일상이다. 눈 뜨면 어느새 하루가 가고, '휴, 월요일이네' 한숨 쉬기가 무섭게 주말을 맞는다. 그렇게 1년, 2년 세월이 쌓이면 뒤돌아보기 두려워 다시 앞만 바라본다. 광고 속 카드회사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고 소비를 부추기지만 정작 떠나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카드회사가 돈 버는 게 싫어서? 꼭 그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단순히 여행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인생과 일상에도 쉼표가 필요하다는 게다. '슬로 라이프'의 창시자, 쓰지 신이치의 <행복한 경제학>에 소개된 인디오들의 이야기는 꽤 유명하다.

유적 발굴 탐험가들에 고용돼 따라가던 인디오들은 정글을 앞두고 아무 말 없이 둥글게 원을 그리고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탐험가들이 급료를 높여주겠다고 어르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총으로 협박까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자 이들은 갑자기 일어나서 짐을 등에 지고 다시 목적지로 향했다. 인디오들은 말했다.

"너무 빨리 걸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바쁘게 일하는 당신에게도 필요한 말이다. 연말을 맞아 잘 못 쉬는 독자들을 대신해 잘 쉬는 고수들을 찾아 나섰다. 소개하는 다섯 고수들의 다양한 쉼에서 힌트를 얻어 2012년, 당신으로부터 '잘 찍은 쉼표 하나'를 소개받길 기대한다. - 기자말

"인생의 꿈이 직업일까?" 답 찾아 떠난 60일

내년 2월 졸업을 앞둔 대학생 후배 2명과 대학 졸업 13년차인 선배가 만나 지난 여름 <60일간의 계절학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내년 2월 졸업을 앞둔 대학생 후배 2명과 대학 졸업 13년차인 선배가 만나 지난 여름 <60일간의 계절학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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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학생들은 배움을 놓는 방학(放學)에 영어학원과 도서관에서 열심히 '취업공부'를 하느라 바쁘다. 내년 2월 졸업을 앞둔 스물네 살 요즘 대학생, 박세희, 김혜인씨는 지난 여름방학 동안 취업공부 대신 인생공부를 했다. 그들 곁엔 후배들만큼 인생 고민 많은 대학 졸업 13년 차인 서른여덟의 옛날 학생, 목지수씨가 함께 했다.

이들 스스로 정한 프로젝트명은 '60일간의 계절학기'. 대학에선 구멍 난 학점을 메우는 걸로 통용되고 있는 계절학기에 이들은 무엇을 채웠을까. 지난 11월 19일 부산역에서 박세희씨를 만나, 이들의 뜨거웠던 2011년 여름방학을 살짝 들췄다. 김혜인씨, 목지수씨하고는 전화인터뷰를 진행했다.

우연한 만남이었다. 부산 경성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인 혜인씨가 전공수업에서 '선배를 취재해 인터뷰기사 써오기' 숙제를 받았다. 교수는 광고업계에서 일하다가 당시 <아름다운 가게>에서 활동하던 목씨를 추천했다. 인터뷰날 혜인씨의 동기인 세희씨도 따라갔다. 인터뷰를 하면서 취업을 앞둔 두 후배는 평소 해오던 고민을 털어놓았다. "뭐 해먹고 살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돈 많이 버는 일을 해야 하나" 엉킨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은 질문들을 쏟아냈다. 

선배 지수씨는 답 대신 "너희는 꿈이 직업이라고 생각해?"라고 되물었다. "한총련 출범식에 가기 위해" 대학에 갔지만 광고공모전만 준비하면서 대학시절을 보냈던 지수씨는 그랬단다. 자신의 꿈은 취업이었다고. 그래서 꿈이었던 광고대행사에 들어갔을 때 그는 꿈을 다 이룬 셈이었다. 꿈을 이룬 이후 다른 것은 다 시시해보였다. 친구를 만나는 것도, 가족과의 일상도. 휴일이고 설명절이고 따로 없이 회사에 나가 일을 했다. 그렇게 10년 넘게 사회생활을 하면서 문득문득 어려움이 닥칠 때 스스로 해답을 찾기보다 유명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하던 방식을 따르는 자신을 볼 때 지수씨는 자신의 대학시절을 후회했다. '만약 다시 대학생활로 돌아간다면 인문사회과학책도 읽고 여러 활동들도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철학을 세울 텐데...'라고. 이런 얘기를 전하면서 그는 후배들에게 평소 고민해왔던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그 질문들에 함께 답을 찾는 60일을 보내면 어떨까?" 두 후배는 "와! 재미있겠다, 좋아요"라며 박수를 쳤다.

커리큘럼도 함께 의논했다. 인생로드맵 만들기, 맑은 정신으로 아침일기 쓰기, 인생의 선배들 만나서 인터뷰하기, 낯선 장소에 가보기, 책 읽고 서로 얘기하기 등. 그 결과물들은 고스란히 '60일간의 계절학기 블로그'(http://hello60days.com)에 담았다. 지수씨가 지인들을 꼬드겨 자신의 대학시절을 돌아보는 칼럼을 쓰게 한 '청춘이 청춘에게'라는 코너도 만들었다.

두 후배에겐 도전의 연속이었다. 생전 쳐다보지도 않던 법원도 떨리는 맘으로 가보고, 새벽시장도 들렸다. 종교가 없는 세희씨는 성당에 가서 미사를 보기도 했다. 기업홍보팀과 여행기자를 장래희망으로 삼고 있는 세희씨와 혜인씨를 위해 지수씨가 수소문해 홍보대행사에서 일하는 분과 여행기자들과의 만남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성장통 앓으며 한 뼘 자란 여름

서울 탐방중에 김혜인, 목지수, 박세희씨(좌측부터)
 서울 탐방중에 김혜인, 목지수, 박세희씨(좌측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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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스스로의 한계도 절감했다. 여행기자를 만난 후 여행기자의 꿈을 접은 혜인씨가 말했다.

"'여행기자'라는 꿈을 정해놓고 대학에 들어오면서 자부심이 있었어요. 나에겐 확고한 꿈이 있다는 자부심. 요즘 젊은 사람들은 꿈이 없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대학생활 4년 하면서 내가 왜 여행기자가 되고 싶은지, 가족과 떨어져 오지 같은 데 갈 자신은 있는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더라고요. 여행기자분이 '여행 진짜 좋아하냐'고 물으셨을 때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단번에 '그럼 너는 못해' 그러시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나고 충격 먹었어요. 나에 대해 제대로 보게 된 거죠. '아, 내가 꿈을 자랑하고 싶은 거였구나'라고."

세희씨도 성장통을 앓았다. 약속한 60일 중 40일쯤 지났을 때 선배한테 "프로젝트가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라면서 그만두고 싶다는 의중을 내비쳤다.

"처음에 선배가 프로젝트를 제안하면서 '앞으로 너희가 이것도 해보자, 저것도 하고 싶다고 얘기해라. 하다보면 그렇게 될 거다'라고 하셨는데 막상 저희는 그게 잘 안 되는 거예요. 선배가 '어디 가봐라, 뭘 해봐라'고 하면 '네, 해볼게요' 하다가도 '그걸 왜 하지?'라는 생각도 들고... 난 왜 주체적이지 못한지,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컸죠. 내가 겨우 요 정도였구나."

사실 세희씨뿐 아니라 주입식 교육과 입시경쟁에 찌들었던 우리세대 모두,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많이 잃었다.

'이왕 한 거 끝까지 하자'고 마음을 고쳐먹고 프로젝트 끝까지 왔을 때쯤 세희씨는 자신이 힘들었던 이유의 실마리를 찾았다. 프로젝트 내내 '어떤 진로를 선택하고 어떻게 살까'처럼 계속 '나'만 바라봤는데 "세상을 넓게 봐야지 내가 보이는 구나"를 깨달았다. 이제는 세상에 관심 갖고 '세상 바라보기'도 해보려고 한다.

송년 기획제목이 '잘 찍은 쉼표 하나'라고 하자 세희씨는 "우리 쉰 거 아닌데...'라며 인터뷰 요청에 의아했다. 밤잠을 줄여가면서 블로그에 글을 올려도 써야할 글이 늘어나서 힘들었단다. 그와 함께 읽을 책도, 만날 사람도, 해볼 일들도 많았다. 일상은 일상대로 있었다. 프로젝트 와중에도 학보사 '고참'인 혜인씨는 매일같이 학보사로 출근했다. 세희씨도 학과사무실 사무보조 알바를 했다. 데이트들도 해야 되고...

새로운 깨달음을 떠올랐는지 세희씨가 눈을 반짝였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4학년 여름방학에 그렇게 쉼표를 찍고, 다시 내 장래며 미래를 생각하게 된 거니까 쉰 것 같아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긴 했지만... 넓게 보면 쉬었네요."

<60일간의 계절학기> 프로젝트 중에 김혜인씨가 취재하면서 찍은 희망의 버스 참가단의 풍등.
 <60일간의 계절학기> 프로젝트 중에 김혜인씨가 취재하면서 찍은 희망의 버스 참가단의 풍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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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기준이 생겼어요"

혜인씨는 이제야 토익공부를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 취업원서 내는 거 보면서 토익점수가 없어 원서조차 못 낼 때는 '좀 일찍 시작할 걸' 싶긴 하지만 "토익은 지금이라도 할 수 있으니 지난 여름이 전혀 아깝지 않아요"라고 한다. 프로젝트 이후 4학년이 되고 나서 입에 달고 살던 "뭐 해먹고 살지?"라는 말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다고.

다른 대학생들한테도 이런 프로젝트를 권하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필수적인 것 같다"고 답했다.

"인생을 살면서 내가 뭘 좋아하고 난 어떤 사람인지를 고민한 다음에 내 진로를 선택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생각보다 주변에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친구들이 별로 없어요. 좋은 기업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사람들도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요? 자기 고민 없이는 인생 제대로 사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세희씨가 얼마 전 영어학원에서 있던 일을 들려준다. "토익성적 발표날이었어요. 강사님이 다들 토익성적이 잘 안 나왔다고 얘기를 하는데 21살짜리 여자애가 울음을 터뜨리는 거예요. 편입 준비하는 친구거든요. 근데 그게 제 모습 같았어요. 지난달에 제가 토익점수도 안 나오고 취업원서 낸 데도 떨어져서 좌절했었거든요. 그 동생 보는데 내 모습이 저런가 싶고, 저 어린나이에 토익 점수 하나 때문에 우는 게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세 군데 냈던 원서가 다 떨어졌을 땐 좌절하기도 했다. 다른 4학년들처럼 취업스트레스도 만만찮다. 그래도 세희씨는 이제 인생의 기준이 생겨서 덜 힘들단다.

혜인씨도 "꿈이 직업이면 취업을 하고 나면 꿈이 없어지는 거잖아요"라면서 "꿈이 직업이냐?"는 질문에 답을 했다. 직업은 꿈의 일부고, 꿈은 인생 자체에서 이루는 것일 거라고. "어릴 때 장래희망 써서 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칸이 너무 작아서 명사화한 직업밖에 적을 수가 없어요. 이번 여름방학을 거치면서 학교에서는 왜 그렇게만 가르쳤을까 싶더라고요. 의사, 교사 이런 게 아니라 '좋은 곳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살고 싶어요' '가고 싶은 곳들을 여행하면서 살고 싶어요'라고 장래희망을 가져도 될 텐데 말이죠."

요즘 혜인씨는 자신이 찜한 지역신문사가 언제 채용공고를 하나 열심히 사이트를 들락날락한단다. 지난 4년의 학보사생활을 돌아봤더니 자기에겐 취재기자가 적성에 맞다는 걸 깨달았다고. "선배가 '나가서 인터뷰 따와!' 할 땐 속으로 욕도 하고 그랬는데 취재 갔다 오면 꼭 남는 게 있더라고요. 기자일 하면 항상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지난 60일 프로젝트의 성과를 묻자 지수씨는 "나이 들면 위축되거나 새로운 걸 하기 두려워하는데 그런 것이 제거된 것 같다"고 했다. 어렸을 적엔 일본에 관심이 많아서 혼자서 일본 교과서를 구해 보기도 했는데 입시교육을 통과하면서 그런 자발성들이 사라졌단다. 그때의 일본어를 비롯해 도시 브랜딩, 일러스트 등 평생 하고 싶은 공부들이 생겼다.

과정에서 직장도 옮겼다. 다시 도시 브랜드업계로 돌아갔다. 그런데 예전과는 달라졌다. 이전엔 세상을 바라보는 축이 X와 Y만 있었다면 NGO활동을 하면서 이젠 Z축도 생겼다. 다른 사람보다 연봉을 더 받기 위해 경쟁하고 계속해서 더 큰 회사로 옮겨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났다. 지금은 1등이든 꼴등이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행복하다는 걸 안다.

지수씨는 다음 프로젝트도 구상했다. 내년 서른아홉을 40대를 기획하는 나이로 정했다. 40대를 먼저 산 인생 선배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등 40대를 탐구하는 과정을 매일 일기식으로 기록하려고 한다.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박세희, 김혜인씨.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박세희, 김혜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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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일간의 계절학기'는 이번 겨울방학을 맞아 2기를 모집했다. 6명의 대학교 3학년생들이 함께 하기로 했다. 세희씨와 혜인씨는 그들이 여름에 만났던 인생 선배들과 함께 2기들의 계절학기를 돕는 스태프로 활동할 계획이다.

60일 프로젝트 기간 중 세희씨와 혜인씨는 용인시에 있는 백남준 아트센터도 탐방했다.

"비디오테이프를 되감기는 할 수 있어도 우리의 삶을 되감기 할 수는 없다. 비디오테이프 녹화기에 '빨리 감기' '되감기' '정지' 버튼이 있지만, 우리의 삶에는 '시작'버튼 하나뿐이다. 만일 내가 47세에 뉴욕에서 가난한 예술가의 삶을 살리라는 것을 25세 때 알았더라면 계획을 다르게 세웠을 것이다. 삶에는 '빨리 감기'나 '되감기'가 없기에 앞날을 전혀 예견할 수 없다. 그러니 한걸음씩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벽면에 적힌 백남준의 이 말을 한참 바라봤다는 혜인씨는 블로그에 올린 탐방기에 이렇게 덧붙였다.

"아마 삶을 비디오 돌리듯이 선택할 수 있다면 삶은 재미없고, 하찮게 여겨질 것입니다. 지루하면 빨리 돌려버리고 지난날의 실수가 후회된다면 다시 되감기 해버리면 그만인 그런 삶이라면, 누가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려고 할까요? 그럴 수 없기에 삶은 열정을 바칠 수 있고,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방학을 방학답게 놀아본 이들의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재생'될지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 <노동세상> 12월호에 실린 기사를 일부 수정했습니다.



태그:#60일간의 계절학기, #잘 찍은 쉼표 하나, #목지수, #박세희, #김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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