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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망설입니다. 일어서려 들지를 않으니까요. '시체놀이'에도 마음과 몸이 고단하긴 마찬가집니다. "밥 한 번 먹자"는 '미모의 유혹'도 바보상자 속 인사치레일 뿐이죠. 통 큰 결단, 그리고 일탈은 '오래된 미래'였던 모양입니다. 지리산 노고(老姑) 할머니가 전하는 샛바람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지리산으로 가기로 하자 우리는 탄성을 터뜨렸습니다. "그렇지, 바로 이거야."
 

여행생활협동조합 추진위(상임대표 김일섭·여행생협추진위)를 띄워놓고 두 달여 만에 동행입니다. '즐겁고 알찬 여행'을 하자던 다짐도 잠시, 구태의연에 빠졌던 모양입니다. 뒤이어 찾아온 '밝은 소식'. 지난 12월 3일, 마한(馬韓)을 지킨 정(鄭)장군의 혼이 서린 정령치를 타고 노고 산신의 단아함이 굽이쳐 흐른 능선에 있는 '지리산 밝은마을'(이사장 황선진)에 다녀왔습니다.

 

가을걷이가 막 시작된 9월, 열다섯 명가량이 여행생협추진위를 결성할 때부터 지리산 여행을 예감했습니다. 지리산에서 왔다는 세 추진위원이 쏘아대는 심상찮은 안광을 마주하며 알아봤던 거죠. 그 느낌, 빛나는 눈과 가슴 울리는 소리가 마음으로 통했던 것일까요? 아마 우리는 '바로 우리가 찾던 곳이야. 거기에 가야 한다'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추진위 결성 두 달, 구태의연함을 깨다

 

지리산은 늘 어머니의 땅이었습니다. 축 늘어진 남도의 전사들을 위무하고 찾아왔던 곳도 노고 할머니의 품이었습니다. 그 참혹함에 마주할 수 없었던 주검의 잔영을 하나하나 지워줬던 망각의 땅이었죠. 장엄한 육봉, 들풀의 유혹에 빠져 있노라면, 성한 데라곤 찾을 길 없던 마음속 생채기도 깨끗이 치유해준 억겁의 의원이었습니다.

 

도시 한가운데서 부서지고 닳아가는 육신과 영혼에 청량제가 필요했습니다. 지친 여행자의 심신을 달래는 수련이 필요했던 거죠. 하루 이틀 마음수련으로 다 해결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간'이나 보려던 것이었죠. 언젠가는 수련을 시작할 테니 친숙함을 조금만 가져두려는 것이었고.

 

여행자들은 4호선 사당(舍堂)역에서 모였습니다. 우연일 테지만, 노고산신 할매의 샛바람을 사당(祠堂) 마을에서 마주했다니 놀랍습니다. 주민들이 섬기고 좋아했던 도당(都堂)의 느티나무를 뽑아버리고 지하철(사당역) 사거리를 세워놓은 어리석은 우리에게 김삿갓의 조롱이 들리는 듯합니다.

 

"좌수별감이 네겐 분에 넘치니 기병 보졸 따위나 마땅하리." (풍자시)

 

'밝은마을' 가는 길은 확 트였습니다. 12인승 승합차가 주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꽉 막히는 고속도로 위에서 '파란선'(버스 전용차로)을 타고 씽씽 달리는 쾌감에 모두 신났습니다.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창밖 풍경을 보며 손가락질 합니다. 조옥화 선생(복지관장)의 탄성이 더 흥겹습니다.

 

"야, 신난다. 너희들, 우리가 부럽지?"

 

어머니의 땅, 억겁의 품에 안겨

 

 

남원까지 3시간. 경부고속도로, 천안-논산 민자고속도로, 전주-남원 사이에 새로 난 고속도로를 타니 곧 도착했습니다. 빨라서 좋았던 것일까요? 어디를 얼마나 빨리 가겠다고 동서남북으로, 그물망처럼 큰길들을 닦아놓았는지.

 

남원 시내를 지나려는데 일행은 막걸리와 간식을 사야 한다며 슈퍼에 들르자고 합니다. 눈에 띄는 데가 있어 들어가 보니 재벌 유통사의 할인마트였습니다. 10여 년 전 이마트가 들어서며 재래시장 대부분이 문을 닫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또 다른 대형 유통매장이 들어섰습니다. 소도시의 정겨움과 지역 농민·상인의 상권은 어쩌라고. 신선하고 질 좋은 먹을거리를 즐길 지역민들의 권리는 또 어쩐답니까?

 

처가(妻家) 마을의 아련함도 잠시. 노고단 자락으로 접어듭니다. 굽이굽이 육모정 길을 오르니 삼신 할매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사라져버린 사당(祠堂)의 애달픔을 싣고 온 여행자를 반겨주길 기대하며 험한 고갯길을 넘는데 경고 문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겨울철 눈이나 결빙으로 위험하니 조심….'

 

뭐 별일 있겠냐는 생각으로 산길 통제 경고를 무시하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두려움보다는 낭만이 앞섭니다. 읽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일본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도입부가 떠올랐습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험한 고갯길 넘어 하얀 세상이 펼쳐질까요? 그런데 정말 하얀 세상이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노고 할매의 머리는 하얗게 덮여 있었습니다. 다행히 여행자들을 질책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산자락 마을들은 아직입니다. 좀 더 더러워질 때를 기다리시는 듯합니다. 봉우리만 하얀 것은 때가 되면 소멸과 생성의 하얀 역사를 땅에 쓰겠다는 예시인 것 같습니다.

 

두려워 할 건 없습니다. 물론 빨강, 파랑의 유한한 채색에 빠진 인간들은 하얀색을 죽음으로 착각하지만 실은 영생을 의미하니까요. 하얀색은 음식(화이트는 밀 - wheat에서 유래)이고 권위(정부의 백서)이며, 지도자(하얀 건물)죠. 생명 평화(하얀 깃발)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하얗게 비우라는 것입니다.

 

생명 평화 '하얀 세상'이 반기고...

 

그렇게 밝은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산길을 못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디지털기기의 도움에 마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눈앞의 풍경에 눈이 조금씩 맑아졌습니다. 수련원에 당도했습니다. 주변에 있는 집들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멀리 여행생협 도반 김혜경 선생이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곁에 백구 한 마리도 꼬리를 흔들며 반깁니다.

 

노고단 북녘 자락에 자리한 아담한 밝은마을. 고기리 구릉을 돌아 백여 미터를 오르면 하얀 사각건물(숙박시설로 지었지만 지금은 내버려둔 상태)이 있습니다. 다시 백여 미터 S(에스)라인을 그리며 올라가면 동쪽에 백여 평 남짓한 수련장도 보입니다. 주변에는 아담하게 쳐놓은 '게르'(몽골식 이동가옥)가 있고 야산을 개간한 수천 평의 너른 목초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 수련원 '지리산 밝은마을'에 온 것입니다. 1만2천여 평의 땅에 대안학교(백일학교 등)와 치유·명상·수련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철학을 실천하는 곳입니다. 모든 생명체와 어울려 하나 되고, 세상 만물과 한 뿌리 한 몸 되는 삶을 동경하는 이들이 배우며 사는 곳입니다.

 

국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 삶을 영위하던 옛 마을을 재현한 것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며 자연과 지구를 착취하는 과학기술문명 패러다임 위기를 해결하자는 것이 이들이 마을을 만든 이유라고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저널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여행생협, #지리산, #밝은학교, #탐방, #마음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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