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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놀러간 친구네 집에서 신기한 목각인형을 보았다. 인형을 반으로 가르면 그 속에서 작은 인형들이 계속해서 10여 개 정도가 나오는 것이었다. 무역상사에서 근무하는 친구 아버지가 러시아에서 사온 민속 공예품 마뜨료쉬카였다. 신기한 마뜨료쉬카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훤한 앞 머리에 세계지도를 그리고 온화하게 미소짓는 우리가 대머리 '고르비'라고 부르던 고르바쵸프 소련 대통령이었다.

머리에 뿔달린 공산주의자들이 산다는 동토의 땅! 소련의 정치인을 어린 초등학생들이 어떻게 아냐고 의아해 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린 나와 친구들이 고르바쵸프를 대머리 '고르비'라 부르며 머리에 새겨진 무늬가 세계지도인가에 대한 논쟁등으로 시끄러웠던 이유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의 고르바쵸프와 서기장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그 장소가 다름 아닌 내가 살고 있는 제주도였기 때문이다. 당시 TV 뉴스 등 언론은 물론이고 고르바쵸프의 숙소였던 신라호텔을 비롯해 제주도 전체가 고르바쵸프 맞이준비로 떠나갈 듯 난리법석을 떨었던 기억이 있다.

소련 개혁개방과 붕괴의 온전한 목격자

문득 그를 다시 떠올리는 건 지금이 소련의 붕괴 2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으로 취임한 고르바쵸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로 대표되는 개혁개방 정책으로 서구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미국과의 군비경쟁으로 경제난 속에 국가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소련과 고르바쵸프로서는 당연한 선택이라고 평가받았고 서방의 전폭적 지지 속에서 그는 1991년 노벨상까지 수상했다.

그렇기에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의 지도자와는 달리 온화한 이미지로 언론에 보도되며 전체주의 공산집단으로부터 세계평화를 지킨 용기 있는 지도자로 묘사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냉전 이후 고르바쵸프의 정치활동에 대한 다양한 평가들이 이루어졌으며, 소련 붕괴 과정에서의 우유부단한 정책결단력, 서방을 의식한 정치적 제스쳐로 소련의 급격한 붕괴를 초래하였다는 냉정한 평가들도 존재한다.

소련의 붕괴 20주년을 맞이하는 현 시점에서는 그리 후한 평가가 이루어 지고 있지는 않는 것이 사실이다. 올해 초 독일의 권위있는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고르바쵸프재단에 조사차 방문하는 동안, 현재 런던에 거주 중인 젊은 러시아 역사학자 파벨 스트로일로프가 비밀리에 3만 페이지의 문서목록을 복사했고 <슈피겔>에 이용을 허락하면서 밝혀진 인터뷰를 통해 소련붕괴 과정을 돌아보는 기획기사에서 고르바쵸프가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당시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에게 의존했으며, 그루지아(현 조지아)과 아제르바이잔 등이 소련으로부터 독립과정에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독립 몇 개월 전까지 전혀 그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등 소련 연방해체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정치적 무능함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고르바쵸프, 푸틴에게 민주주의를 부탁해?

1990년 대 초반 냉전의 종식 이후 급격한 붕괴를 거치고 국가부도사태까지 겪은 러시아는 세계의 패권을 놓고 미국과 자웅을 겨루던 권위 온데간데 없이 급격히 도입한 시장경제의 운용에 실패하여 하루하루 삶이 버거운 후진국으로 전락해 있었다. 생필품을 사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선 러시아 국민들의 모습은 공산주의의 실패를 보여주는 반공냉전 교육의 중요한 상징이 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바르샤바 조약기구 해체 이후 미국이 중심이 된 NATO에 의해 이루어진 1998년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을 바라보며 러시아는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인들의 자존심과 애국심을 자극하며 집권한 푸틴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러시아 국민들은 열광했으며, 때마침 세계적 경제위기 속 에너지 가격의 국제적 상승에 따라 러시아 경제도 조금씩 회복 기미를 보이며 푸틴의 확고하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러시아에서 고르바쵸프는 서서히 정치적 존재감을 잃어갔다.

실각 이후 고르바쵸프가 다시금 의미있는 정치적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2006년 반정부적 논조가 강한 <노바야 가제타> 신문의 지분을 인수하면서 부터이다. <노바야 가제타>는 푸틴정권하에서 푸틴의 체첸반군 진압과정에서의 민간인 학살, 러시아 관료와 마피아 결탁 등을 폭로하며 주목을 끈 반정부적 논조가 강한 신문이다.2006년 정부 비판 기사를 쓰다 총에 맞아 숨진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 기자를 비롯하여 '목숨을 걸고 기사를 쓴다'는 말을 실감케 할만큼 수많은 기자들이 숨져가며 푸틴 정권의 치부를 드러내어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신문이다.

초기에는 푸틴에 대해 우호적인 발언을 지속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해온 고르바쵸프이지만, 2009년부터는 푸틴의 권위주의에 대해 비판을 본격화 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하원의원 총선거가 끝나고 부정선거 의혹으로 야당지지자들이 모스크바를 비롯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에서 가두시위에 나서 재선거를 주장하며 혼란스러웠던 지난 12월 15일.

그는 모스크바에에서 일본 NHK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번 총선 관련 시위사태를 "푸틴체제에 대해 국민들이 염증을 느낀 결과다"라고 비판하는가 하면, 통일 러시아당이 "지도부에 권력이 집중되어 정권유지가 목적이 되었다"고 서슴없이 비판했다.

푸틴 총리가 내년 대선에서 당선되어 2024년까지 장기집권할 것이라는 일각의 분석에 대해서는 "국민이 원하지 않을 것"이라며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는 "푸틴 자신이 개혁과 쇄신으로 민주주의 강화에 기여해야 할 것"이라며 현 러시아의 민주주의 상황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이러한 고르바쵸프의 발언이 푸틴에게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끼칠지는 미지수다. 러시아 국내에서 고르바쵸프의 정치적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개혁개방으로 상징으로 여전히 세계적 지명도를 활용하여 현 러시아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가속화 한다면, 현재의 총선정국에 맞물려 그 파장은 쉽게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푸틴이 실패하고 노쇠한 정치인으로 그를 무시하기 어려운 이유다.


#푸틴#러시아#고르바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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