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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법주사 들어가는 길에 만난 두 개의 비석

법주사 일주문
 법주사 일주문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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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답사지가 충북 보은으로 잡혔다. 보은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속리산 법주사다. 그 다음은 삼년산성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선병국 가옥이 부각되고 있다. 이들 세 곳은 모두 그 성격이 달라 답사의 즐거움을 더해 준다. 법주사에서는 귀중한 불교문화유산을 볼 수 있다. 팔상전, 쌍사자석등, 석연지, 미륵대불 등은 오로지 이곳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삼년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서로 차지하려고 쟁패를 벌였던 요충지다. 그리고 선병국 가옥은 최근 종가(宗家)가 부각되면서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차가 37번 국도를 지나 내속리면 사내리로 들어선다. 아침에 출발할 때는 날씨가 좋았는데 비가 내린다. 회원 대부분이 비를 대비하지 않아 난감해 한다. 속리산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별 수 없이 우비와 우산을 준비한다. 금방 그칠 비가 아닐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리숲을 걸어 법주사 경내로 들어가야 한다. 매표소를 지나면 처음 만나는 것이 법주사 일주문이다. 일주문 바깥으로 호서제일가람이라는 현판이 보이고, 그 안으로 속리산대법주사라는 편액이 보인다.

속리산사실비
 속리산사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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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다시 5분쯤 올라가면 보은 속리산사실비(俗離山事實碑)를 만날 수 있다. 1666년(현종 7년) 2월에 세운 것으로, 속리산과 수정봉 거북바위에 얽힌 일화를 기록했다.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속리산이 기이함과 절승으로 소금강산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수정봉 위에 거북바위가 있는데, 그 머리가 서쪽을 향하고 있어 중국의 재물이 동쪽에 있는 조선 땅으로 실려 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안 중국 사람들이 거북의 머리를 잘랐고, 지기를 누르기 위해 거북의 등 위에 10층의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옥천군수 이두양이 1653년 각성 스님에게 말해 머리를 붙이게 하였고, 충청도 병마절도사 민진익이 1665년 스님에게 명해 부도를 부수어 없애도록 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실의 기록이다. 그 다음에는 비문을 찬한 송시열의 의견이 들어가 있다. 거북의 머리를 잘라버린 뒤 중국의 재물이 실려 오지 않았던가? 부도를 부숴버린 뒤 다시 재물이 실려 왔나? 모두 사람의 마음이 만들어낸 이상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부도를 빙자하여 자기네 주장을 신비화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도가나 술사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계하고 있다.

벽암대사비
 벽암대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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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사실비 옆에는 1664년(현종 5년)에 세운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가 있다. 승정원 동부승지 정두경(鄭斗卿)이 지은 비문에 의하면, 벽암은 법호이고 스님의 속명은 김각성(金覺性)이다. 1575년 보은에서 태어났다. 서산대사와 동문인 부휴의 수제자가 되어 선 수행에 열중했을 뿐 아니라, 나라가 국난을 당하자 남한산성을 축성하고 의승을 조직하여 구국에도 앞장섰다. 대사는 1660년(현종 1년) 1월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기고 입적했다.

염송 삼십 편에                                   拈頌三十篇
불경 팔만 게송을 공부하니,                  契經八萬偈
어찌 뒤섞여 갈등을 일으키겠는가?        何湏打葛藤
가히 웃을 만하다, 많은 일이 있었도다.   可咲多事在

법주사 창건주 의신조사와 현대의 중흥조 금호대종사

개산조 의신조사
 개산조 의신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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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수정교를 건넌다. 여전히 겨울비가 내린다, 세속의 때를 벗고 들어가라는 하늘의 뜻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금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추래암(墜來巖)으로 간다. 추래암은 수정봉에서 떨어져 나온 바위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글자와 그림이 조각되어 있다. 글자는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미륵존불이다. 그림은 법주사 창건주인 의신조사(義信祖師)가 말에 불경을 싣고 도착하는 장면과 말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소의 모습이다. 그리고 또 다른 암벽에는 마애여래의상과 지장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마애여래의상은 부처님이 연화대좌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미륵불로 추정하고 있다. 양식으로 볼 때 고려 초기 작품이다. 높이가 6m에 이르고, 예술성은 조금 떨어진다. 마애여래의상 오른쪽 바위에는 정교함이 떨어지는 또 다른 마애불이 있다. 왼손에 여의주가 있는 것으로 보아 지장보살로 여겨진다. 미륵불과 지장보살, 이들은 사후와 미래를 관장하는 부처님이다. 이들 마애불은 미륵신앙을 추구하는 법주사의 성격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마애여래의상(오른쪽)과 지장보살
 마애여래의상(오른쪽)과 지장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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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보고 나서 나는 옆의 부도전으로 간다. 이곳에는 법주사의 현대 중흥조인 금오선사의 부도와 부도비가 있다. 금오선사(1896-1968)는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현대 한국선불교의 한 맥을 이루는 스님이다. 계보상으로는 만공의 제자인 보월(寶月: 1884-1924)의 법을 잇고 있다. 보월과 금오의 만남을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인연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금오선사가 선공부의 경계를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표현하자, 보월화상이 바로 자신의 법을 잇는 상수제자로 삼았기 때문이다.

시방세계 투철하고 나니                         透出十方界
없고 없고 없고 또 없구나.                      無無無亦無
모든 것이 다 이와 같으니                       個個只此爾
근본을 찾아보아도 없고 또 없을 뿐이네.   覓本亦無無

금오선사 부도
 금오선사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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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보월화상이 갑자기 입적하는 바람에 금오선사는 전법게를 조사스님인 만공으로부터 받는다. 이 게송에 만공의 금오에 대한 기대가 잘 나타난다. 1925년 보월의 법을 이은 금오는 다시 10년간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는 운수행(雲水行)으로 선공부를 한다. 그리고 1945년 직지사 조실이 되어 전법(傳法)과 경행(經行)으로 후학을 가르쳤다.

덕숭산맥 아래에서                  德崇山脈下
지금 마음으로 인을 전하노니,   今付無文印
보월 아래 계수나무                 寶月下桂樹
금오가 하늘을 뚫고 오를 걸세.  金烏徹天飛

1954년 정화불사가 일어나자 금오선사는 전국비구승대회 준비위원회 추진위원장을 맡아 조계종의 재건에도 앞장섰다. 1958년 조계종 총무원장이 되어 부처의 심인을 전하고 자비정신을 펼치는데도 기여했다. 그는 1967년 법주사 조실이 되어 후학을 가르치다 1968년 법랍 57세로 입적하였다. 금오의 문도로는 월산, 월주, 월탄, 탄성스님이 있고, 문손으로는 성타, 명진, 도법스님 등이 있다.

법주사에 적멸보궁이 생긴 연유

법주사 세존사리탑
 법주사 세존사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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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래암과 미륵대불 사이에는 능인전이 있다. 우리는 이곳에 있는 세존사리탑(충북 유형문화재 제16호)을 보러 간다. 능인전은 지금 적멸보궁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624년(인조 2년) 벽암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적멸보궁이어서 법당 안에는 부처님이 없다. 창문을 통해 밖의 세존사리탑을 볼 수 있다. 법당 안에서는 탱화와 종이 있다.

법당을 나온 나는 세존사리탑으로 간다. 이 사리탑은 고려 말인 1362년(공민왕 11년)에 조성되었다. 사리탑 옆에는 1650년(효종 1년)에 조성된 세존사리비(世尊舍利碑)가 있어 사리탑의 역사를 알 수 있다. 홍건적을 격파한 후 공민왕은 그 공덕이 부처님의 은혜에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법주사를 찾은 왕은 통도사의 적멸보궁에 모셔진 석가여래의 진신사리 1과를 이곳에 옮겨 봉안하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사리를 모시기 위한 사리탑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사리탑의 기단부
 사리탑의 기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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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탑은 사각형의 기단 위에 팔각의 기단부를 올리고, 그 위에 공모양의 탑신과 옥개석, 보주를 얹은 형태다. 기단부는 상대, 중대, 하대로 나뉘는데 사각형의 지대석을 놓고 안상(眼象)과 연꽃문양이 새겨진 팔각의 하대석을 얹었다. 중대석 역시 팔각으로 각 면마다 연꽃문양의 안상과 우주(隅柱)를 나타냈다. 상대석에는 우주가 없이 큼직한 연꽃문양만을 새겼다.

탑신은 아무런 문양이 없는 둥근 공 모양으로 하대석과 옥개석이 맞닿는 부분만 평면으로 처리하였다. 원형의 탑신은 곧 원융무애한 부처님 그 자체이다. 그래서인지 기단부와 탑신의 석재가 조금은 달라보인다. 재질도 좋아 보이고, 좀 더 밝은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옥개석은 경사가 급한 낙수면을 지녔으나 추녀에 이르러 위로 살짝 반전되었다. 상륜부는 단순한 형태의 보륜과 보주로 이루어졌다. 전체 높이가 3.4m로, 고려 말기 부도와 비슷한 양식을 보여준다.

팔상전과 미륵대불
 팔상전과 미륵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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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마당에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추래암 위에 세워진 작은 탑을 볼 수 있다. 겨울비를 맞아 외롭고 쓸쓸한 모습이다. 다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담장 너머로 웅장한 미륵대불의 옆모습을 볼 수 있다. 황금색의 법신과 검은색의 나발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 앞쪽으로는 절 한가운데 위치한 팔상전이 겨울비에 젖어 있다. 산위로는 안개가 피어올라 절집의 적멸을 더해 준다.

그때 밖에서 적멸을 깨는 관광객의 외침소리가 들린다. "무슨 입장료를 4,000원이나 받아?" 그의 불만이 계속 이어진다. 옆을 지나는 스님은 무심히 가던 길을 간다. 남의 집 안방에 와서 지나친 행동은 아닌지. 문화재관람료라는 이름으로 받는 입장료, 해결해야할 과제이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표출하는 건 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든다. 씁쓸한 마음으로 미륵대불을 올려다본다. 부처님도 여전히 그렇게 비만 맞고 있다.

덧붙이는 글 | 12월 6일(火) 충북 보은으로 문화유산 답사를 다녀왔다. 속리산 법주사, 삼년산성, 선병국 가옥을 보았다. 역사와 문화, 문화유산의 관점에서 이들에 대한 기사를 5회 정도 쓸 예정이다.



태그:#속리산 법주사, #의신조사, #벽암대사, #금오선사, #수정봉과 추래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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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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