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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화백(53)은 1994년, 홀연 전주를 떠났다. 줄곧 전북민미협(민족미술협의회) 회원으로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치던 그는 고향 전주를 떠나 서울로 이사했다. 그가 서울로 간다고 했을 때 주변사람들은 모두 만류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 그에게 고향은 예술세계의 원천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향을 떠나고 15년 동안, '서울사람'이 되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이 화백은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향에 다시 돌아왔다.

귀향한 뒤 2년 뒤, 그는 전시회를 열었다. 지난 7일, 전주 서신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이기홍 화백을 만났다. 이번 전시회는 그에게 남달랐다. 그의 생애 첫 개인전이다. 첫 개인전 치고는 조금 늦은 감이 있다고 내가 말하자, 이 화백은 이렇게 말했다.

 이기홍 화백. 고향을 떠난지 15년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고향에 돌아와 다시 붓을 들 수 있었던 것은 고향에 있던 친구, 동료들 덕분이었다.
이기홍 화백. 고향을 떠난지 15년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고향에 돌아와 다시 붓을 들 수 있었던 것은 고향에 있던 친구, 동료들 덕분이었다. ⓒ 안소민
"제가 민미협활동을 하던 20~30대에는 단체전을 많이 했어요. 그 당시에는 그림을 통해 이념과 사상을 표현했기 때문에 오히려 단체전이 더 호소력 있었죠. 단체전이니, 개인전이니 그것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요."

첫 개인전에 대한 이 화백의 감회는 특별하진 않다. 그냥 무덤덤하다고 했다. 원래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온 것 뿐이다. 허나, 어찌 무덤덤하기만 할까.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는 안온함과, 화가 본연의 길로 들어섰다는 기쁨은 손뼉치고 어린아이처럼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할 기쁨은 아니다. 오히려 고요한 환희다. 마치 ,흰 눈이 쌓인 조용한 시골길을 걸을 때 느끼는 충만한 기쁨. 그것은 첫 눈이 올 때 느끼는 설렘과는 분명 또 다른 느낌일 것이다.

15년이 지난 후, 그의 미술세계도 변했다. 주먹과 투쟁, 총, 칼을 버리고 그가 택한 소재는 우리 농촌의 모습이었다. 실제 전주 교외에 사는 이기홍 화백은 농촌의 풍경에서 자신의 소재들을 찾는다. 하늘, 땅, 산, 논, 안개, 비, 구름,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그림속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는 왜 홀연 고향을 떠났던 것일까. 그는 대답대신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냥 어느날 문득, 떠나고싶었어요. 이렇다 할 특별한 이유는 없었죠. 결혼할 때도 어느 순간, 눈에 뭐가 씌어서 결혼하잖아요. 아마 저도 그랬나봐요."

우리도 살다보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젊은 시절, 이화백의 서울행도 아마 그런 것일지 모른다. 주변 친구들과 동료들이 그렇게 만류했지만 그는 서울을 택했다. 그곳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했다. 미술계를 아주 떠나지는 않았지만,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그림은 그리지 못했다. 그림에 늘 목이 말랐다. 그러나 그가 더욱 힘들었던 건, 어려운 경제형편이었다. 그림은 그 다음이었다. 예술도 창작도, 모두 경제적 안정이 뒷받침된 후에야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방랑은 15년이면 족했다. 귀향을 결심하고, 그는 다시 붓을 쥐었다.

'...(전략)오후에는/ 그림 그리는 기홍이 낙향/ 집들이 갔다/ 전주 변두리 시골이다. 낡은 집, 가난이 환하다. 가슴이 막막하다. 눈물이 솟아난다. 참았다. 80연대, 옛 친구들이 흘러간 노래를 부르며 오래된 흙 마당에 서성인다. 흩어져있는 허름한 세간들, 속살이 허연 김치, 식은 삼겹살, 풋고추, 흰마늘/ 철없는 어린 딸이 뛰어다닌다... (후략)'
-김용택 시인이 이기홍 화백이 귀향한 날 쓴 시 <섬진강 40> 일부-

겨우, 한 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삶 전체를 엿본다는 것은 무리다. 그의 그림에 어떤 깊은 철학과 사상이 담겨있는지 알 수 없다. 아는 척하는 것도 교만이다. 그냥 평범한 한 관객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감상을 말해본다면, 이번 전시회에서 만난 이화백의 그림은 평온함과 고요를 안겨준다. 그림은 보는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겠지만, 초겨울 문턱에서 그의 그림을 본 순간, 나는 '생명'을 떠올렸다.

 <대숲>
<대숲> ⓒ 이기홍

그의 그림 <대숲>은 전북 고창 왕대밭숲 한가운데서 바라본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림을 보고있으면 정말 대숲밭 한가운데 깊이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좋은 착각이 든다. 울창한 대숲사이로 반짝거리는 햇살은 우중충한 초겨울에 보기드문 풍경이다. 삼림욕을 하고난 뒤 피톤치드가 몸 속 깊이 스며드는 기분이다.

비가 오고난 후 풍경을 그린 <우후(雨後)>는 세수를 하고 난 소녀의 얼굴을 보는 듯하다. 이 그림을 보니 나에게는 생각나는 또 하나의 풍경이 있다. 올 여름, 시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49재를 모시기전, 일곱 번의 재를 모시기위해 절에 갔는데 그때마다 소나기가 자주 내렸다.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간 후, 물안개가 자욱했던 풍경을 보면서 할머니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를 떠올렸던 기억이 있다. 이 화백의 그림 <우후>를 보면서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이 화백의 그림에서 나는 지난 여름의 추억을 만났다. 화가와 관객이 만나는 교차점이자 코드.

그렇다면, 그는 이제 '이념'을 버린걸까. 지난 시절, 치열하게 싸우고 투쟁하며 갈구했던 그 이념은 이제 화폭에서 사라졌을까. 특히 요즘 농촌의 현실은 그림속의 풍경처럼 그리 낭만적이지도, 평화롭지도 못하다. 농촌이 안고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그는 그냥 외면해버리겠다는 걸까. 이화백은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는 직접적으로 말했다면 지금은 조금 방향을 바꾸었죠. 그 당시에는 저희 그림을 보는 분들이 불편해하고, 어려워했죠. 직접적인 표현을 하지 않는다고해서, 제 그림의 본질이 변한 건 아닙니다. 농민들 뿐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 참 고단하잖아요. 그걸 깊이 담으려고 했습니다."

 <바람-옥수수>
<바람-옥수수> ⓒ 이기홍

<바람-옥수수>라는 그림이 그렇다. 옥수수는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간식이지만 지난 시절에는 식량을 대신했다. 쌀이 없으면 옥수수로 끼니를 때우곤했다. 옥수수 철이 지난 뒤, 옥수수밭을 지나던 이 화백은 무성한 옥수수대를 보며 이 그림을 그렸다.

"무성하게 자란 옥수수대가 바람에 여기저기 흩들리는 모습을 보니 묘하게 생명력이 느껴지더라구요. 마치 군무를 추고있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철 지난 옥수수대는 사실 쓸모없는 것이잖아요. 인생의 말로를 보는 것 같지만 옥수수대의 군무를 보면서 아직은 자신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략)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일부-

이 화백의 <바람-옥수수>를 보니 김수영시인의 '풀'이 떠오른다. 최근 한미FTA로 인해 우리 농촌이 위기를 맞고있다. 어느 때 우리 농촌에 바람 잘 분 날이 있었을까 싶지만, 한미FTA가 몰고 온 바람은 심각하다. 이 위기 앞에서 아직은 우리 농촌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건재해야된다는 걸 얘기하고 싶은 걸까. 예전 민미협 활동시기에 비해 표현방법은 좀 더 완곡해졌지만 그 속뜻은 더 깊어지고 해졌다.

이 화백의 고향이 고향으로 남을 수 있었던 건, 그를 기다리는 친구와 동료들 덕분이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그는 다시 붓을 잡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 화백은 아직도 그리고싶은 것이 많다. 이제 시작이다. 자신의 주위 풍경과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흙 냄새, 사람 냄새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 이것이 이기홍 화백의 귀향의 꿈이다. 


#이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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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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