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녀석, 한 자라도 더 배워 실력을 쌓고 어서 어서 성공하여 부모에게 돈과 명예로 보답해야 하거늘 감히 수업시간에 장난을 치다니. 혼내줘야겠다 생각하고 책을 빼앗아 놓았는데 아이가 돌아간 뒤 다시 보니 예사 그림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마치 새싹이 자라 꽃이라도 피우려는 듯 초록과 빨강의 그림이 어쩌면 삽화보다 시에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 처럼 급하면서 어지럽기도 하고 아무리 들어도 잘 모르겠는 윤이상의 음악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가볍거나 싱겁게 보이지도 않는 저 그림은 뭘까.
저 아이가 저런 공부 방식을 고수하는 한, 저 아이의 부모를 설득하기는 힘들 것이다. 아이의 마음이 저러하다면 부모가 당연히 이해해 줘야 할 텐데 저 아이의 낮은 성적은 아이와 부모를 여전히 불화하게 만들고 있다.
5학년 국어 말하기, 듣기, 쓰기를 공부하는 책 첫 단원에는 시가 나온다. 시를 읽고 해석하고 비유적 표현을 찾는 과정을 마치면 실제로 내가 시를 직접 써보는 절차로 단원을 마감하는데 단원의 제목도 그래서 '마음의 빛깔'이다. 난 이 보다 훌륭한 단원 제목을 본 적이 없다.
이 단원의 공부를 마치면서 나는 너희들이라면 이 단원의 제목을 뭐라고 붙이겠느냐고 아이들에게 물은 적이 있는데 멋지고 창의적인 제목들 중 유독 한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지겨운 공부의 빛깔."
저 그림의 주인공이었다.
아이가 일부러 학습을 거부하지 않는 한, 이 교과서를 통해 스펀지에 물감 스미듯 친절하게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예쁜 그림과 친절한 설명으로 꾸며져 있는데도 갈수록 배우는 것을 짜증스러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당혹스럽다. 아이들 대부분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최대한 안 해도 될 상황까지 버텨보고 싶어 하는 까닭에 아이들과 부모들은 늘 공부로 인해 더 나눌 수 있는 사랑을 감추고만 산다.
배워야 산다, 오직 배워야만 살 수 있다는, 유독 높은 교육열이 사람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이 나라에서는 아이들이 공부 문제로 부모를 이겨낼 수는 없다. 아이가 공부로 버티기를 끝내면 부모는 끝내 포기할 뿐 아이의 선택을 인정하는 것은 여전히 아니다. 때문에 아직 부모의 포기를 부르기엔 너무 어린 12살의 우리 반 아이들은 오늘도 책을 들고 힘겨운 싸움을 한다.
제 아이에게 공부를 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공부를 왜 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이 우선일 텐데 이 단계를 뛰어 넘은 상태에서 학습을 시작하다 보니, 늘 뭔가에 쫓기거나 억지로 공부하는 아이들이 많다. 부모 입장에선 자기 아이가 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지 모르겠고 아이 입장에선 왜 우리 부모는 공부만 하라고 하는지 모른다. 결국 아이들은 일찌감치 공부에 대한 거부감을 키워가고만 있다.
아이야, 네 마음의 빛깔은 무엇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