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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나무> 세종 '이도' 한석규
 <뿌리깊은 나무> 세종 '이도' 한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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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이런 드라마는 없었다. 칭찬이 끊이지 않던 배우들의 신들린 듯한 연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드라마가 쉼 없이 던져온 묵직한 질문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때로는 피를 흩뿌리며 칼로써 새 왕조를 열어낸 이방원의 입을 통해, 때로는 새로운 정치를 꿈꾸던 이상주의자 이도의 입을 통해, 그리고 때로는 선비의 나라를 가슴에 품었던 혁명가 정기준의 입을 통해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드라마는 쉬지 않고 질문들을 쏟아냈다.

역사가 되풀이되는 탓일까. 600년 전 조선의 길을 묻던 질문들이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도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회가 거듭할수록 답을 찾고자 했던 나의 고민도 깊어져갔다. 어쩌면 당신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을지 모르겠다. 600년 전 조선에서 2011년 대한민국의 정치와 민주주의에 던진 몇 가지 질문들을 곱씹어 보기로 하자.

첫 번째 질문, "너의 조선은 어떤 조선이냐?"

"나의 조선은 다릅니다. 다를 것입니다."(이도)
"어찌 다를 것인가. 어떻게 다르게 할 것인가, 답을 해보거라."(이방원)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을 두 번이나 거쳐 천하를 얻은 상왕 이방원의 앞을 젊은 임금인 이도가 막아서자 상왕이 답을 내놓으라며 다그친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이자 임금이었던 이방원의 패도정치가 몸서리치게 싫었던 이도는 자신의 조선은 다를 것이라며 호기롭게 맞서보지만 '너의 조선은 어떤 조선이냐'는 상왕의 물음에 끝내 답하지 못한다. 이것이 드라마가 던진 첫 번째 질문이다.

때는 바야흐로 박원순 서울시장이 10·26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의 야권 단일 후보가 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아마 그도 '오세훈의 서울특별시', 나아가 '이명박의 대한민국'이 몸서리치게 싫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만의 답, 즉 '박원순의 서울특별시'를 꿈꾸며 출사표를 던졌을 터. 그런 그는 과연 어떤 답을 가지고 있었을까. 드라마를 보며 문득 그에게 묻고 싶었다. '박원순의 서울은 어떤 서울이냐'고 말이다.

이미 선거가 끝나고 그가 서울시장이 된 지금도 난 그가 정말 자신만의 답을 가지고 있었는지, 또 그것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시민이 시장'이라고 했던 그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고 믿을 뿐이다. 그리고 변치 않길 바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답이 될 수 없다.

비록 드라마 속 이야기지만, "칼이 아닌 말로서 설득하고, 모두의 진심을 얻어내어 모두를 오직 품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인내하고 기다릴 것"이라던 젊은 임금의 따뜻하던 이상은 차가운 현실 앞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중화(中華)의 그늘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못하던 사대부·관료들에 더해 성리학이라는 높은 성 위에 앉아 백성은 물론 임금조차 내려다보던 비밀 결사인 밀본이 그의 앞길을 막아 나섰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어쩌면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보다 더 위태로울지 모른다. 중화가 물러간 자리에는 서구에서 밀려든 신자유주의가 깊이 뿌리를 내렸고, 성리학이 무너진 자리에는 시장을 우러르는 이른바 주류 경제학이 더 높은 성벽을 쌓아올린 지 오래지 않은가. 따뜻한 이상을 넘어 그것을 세상에 펼쳐낼 수 있는 세밀한 밑그림이 필요한 이유다. 그것은 곧 '당신의 대한민국은 어떤 대한민국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2012년 두 번의 큰 선거를 앞둔 우리는 이 질문을 늘 마음속에 품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10월 3일 서울시장 야권단일후보로 선출된 박원순 시민사회 후보가 박영선 민주당 후보, 최규엽 민주노동당 후보와 손을 맞잡고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10월 3일 서울시장 야권단일후보로 선출된 박원순 시민사회 후보가 박영선 민주당 후보, 최규엽 민주노동당 후보와 손을 맞잡고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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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질문, 대한민국 권력을 뒷받침하는 무기는?

"모든 사람이 글자를 쓰는 세상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글자는 무기다. 글자란 권력이 모두에게 나눠지고, 질서는 무너지고 나라는 혼돈 속으로 들어가는 게야."(정기준)

훈민정음을 접한 밀본의 본원 정기준은 위기감에 휩싸인다. 성리학이라는 앞선 사상으로 단련되고 또 선택된 소수의 선비들만이 사대부로서 나라를 이끌 수 있다고 믿어온 그였다. 그런 그에게 누구나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세상은 곧 누구나 권력을 향해 달려드는 아비규환의 지옥을 떠올리게 했다. 결국 그는 새로운 글자의 반포를 막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비록 그는 끝까지 백성을 믿지 못했다는 점에서 시대의 한계에 갇힌 인물이었지만, '모든 사람이 글자를 쓰는 세상'이 가져올 엄청난 변화를 내다봤다는 점에서 대단한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600년 전 조선에서 글자가 권력을 뒷받침했듯, 오늘 대한민국에서 권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 권력을 얻기 위해 국민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식과 정보일까. 아니면, 언로(言路)일까. 그런 정도라면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아니, 혹시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만을 쥐고서 모두 손에 넣은 양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보편적 복지 체계는 또 어떤가. 일자리가 더 급한 것은 아닐까. 노동시간을 줄여 충분한 휴식을 얻는 것도 절실한 문제가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무엇이든, 혹시 우리 스스로 우리들 자신을 믿지 못하거나, 또는 그것이 가져올 변화가 두려워 손에 넣기를 망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드라마 속 정기준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다. 당신은 그 무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세 번째 질문, 우리 앞을 막고 선 '시대의 한계'는?

"그들의 욕망은 결국 정치를 향하게 돼 있어. 국가의 정책에 관여하려 들 테고 나아가서 그들의 지도자를 스스로 선출하려 들 것이다. 동서고금에 그런 무책임한 제도가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역사를 발전시키는 건 저 무지몽매한 군중이 아니라 책임을 질 수 있는 몇몇이다."(정기준)

그는 묻는다. 동서고금에 그런 무책임한 제도가 어찌 있을 수 있느냐고. 여기서 새겨봐야 할 대목은 질문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질문을 던진 정기준의 시대적 한계다. 정기준과 이도 모두 600년 전의 인물이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한계 앞에서 길을 몰라 헤매곤 한다.

당연한 일이다. 이도가 아무리 백성을 어여삐 여겼던들 스스로 계급 질서를 무너뜨리며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날 수는 없지 않았겠는가. 어느 시대에든, 또 누구에게든 넘기 힘든 시대의 벽은 존재하기 마련이며, 그것을 뛰어넘을 때 비로소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법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선 '시대의 한계'는 무엇일까. 우리만의 글자는 결코 만들어질 수도, 만들어져서도 안 된다고 믿었던 600년 전 조선의 지식인들처럼 혹시 우리도 너무도 익숙한 낡은 틀 안에 갇힌 채 새로운 것을 꿈꾸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닐까.

가령, 수천만 원의 빚을 안고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뗀 스물다섯 살 청년들을 모아 국회로 보내는 것은 어떨까. 고용노동부 장관 자리에 앉히는 것도 괜찮다. 중고등학생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건 어떨까. 한 달에 한 번씩 온라인 국민투표를 하는 건 무리일까. 또 인터넷 커뮤니티를 만들 듯 누구라도 쉽게 정당을 만들거나 선거에 출마할 수 있도록 하는 건 어떨까. SNS 정당처럼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이 그저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일 뿐일까.

그때도 그랬다. 하지만 이도는 천출이었던 장영실을 자신의 곁에 두며 종3품 대호군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했고, 세금제도 개혁을 위해 17만여 명(노비와 여성을 뺀 거의 모두)에 달하는 백성에게 가부 의견을 묻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우리의 글자를 만들어냈다.

대한민국 정치권이 변화와 혁신을 목놓아 외치면서도 정작 눈에 보이는 것은 갈 곳 모르는 앙상한 깃발뿐인 오늘의 현실은 또 한번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그들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최종회의 마지막 장면. 상상 속의 한 장면으로 소이(신세경 분)와 강채윤(장혁 분)이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 <뿌리깊은 나무>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최종회의 마지막 장면. 상상 속의 한 장면으로 소이(신세경 분)와 강채윤(장혁 분)이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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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질문과 답, "지더라도 괜찮다... 또 싸우면 되니까"

"너의 글자로 지혜를 갖게 된 백성은 속게 될 것이다. 더욱 많이 속게 될 것이고, 이용당하게 될 것이야.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개새끼처럼."(정기준)
"어떤 때는 이기고, 또 어떤 때는 속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지기도 하겠지. 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역사니까. 또 지더라도 괜찮다. 또 싸우면 되니까."(이도)

이도와 정기준,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다. 백성은 속게 되고 결국 이용당하게 될 것이라는 정기준의 우려는 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때로 백성은 잘못된 선택을 하고, 또 후회를 하기도 한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정기준의 말에서는 변화도 읽힌다. 정도전이 유생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가르쳤다는 정륜암에서 만나 한참이나 목소리를 높이며 논쟁하던 때를 떠올리면 정기준의 목소리는 많이 낮아져 있다. 화살을 맞아서가 아니다. 무지몽매한 백성이 욕망을 품게 되는 것은 곧 지옥이라 믿던 그가 조심스럽게 백성의 입장에서 백성의 힘에 대해 가늠해보기 시작한 것이다.

오로지 사대부에게만 향해 있던 그의 단단한 믿음 한 구석에 백성에 대한 연민과 기대가 싹텄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는 "이제 주상의 말이 맞기를 바라는 수밖에"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이도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드라마는 '그것이 역사니까'라는 답으로 끝을 맺는다. 드라마가 더 이상 어떤 답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만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사실 '지더라도 괜찮은' 삶이란 없다. '또 싸우면 되는' 힘이 남아 있을지도 알 수 없다. 현실에서는 '지더라도 싸워야 하는 삶'만이 있을 뿐이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달리 방법이 없어서 싸울 수밖에 없는, 이기든 지든 싸울 수밖에 없는 삶이 바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지금까지 드라마가 던진 질문들을 곱씹어 보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드라마의 첫 회, 임금의 장인이자 영의정이던 심온의 집 뒷마당에 노비들이 둘러앉아 흥겹게 노동요를 부르며 일을 하던 장면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성균관 노비들이 모여 살던 반촌의 아침 풍경 곳곳을 역시 노동요 가락에 실어 비춰주던 장면도 그랬다. 아마도 태평성대임을 보여주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공들여 되살려낸 조선 민초들의 삶에 절로 웃음이 나던 기억이 새롭다.

그들을 바라보는 드라마의 시선은 이처럼 따뜻했다. 600년 전 조선의 네 번째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의 시선도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일찍이 없던' 멋진 드라마가 남긴 묵직한 질문들의 여운과 함께 그의 따뜻한 미소가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것 같다.


태그:#뿌리깊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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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전북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 혁명>(2023),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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